[스포츠 인문학] 빈볼 : 누가 타자의 머리에 공을 던졌는가?
[스포츠 인문학] 빈볼 : 누가 타자의 머리에 공을 던졌는가? 19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사람의 머리를 콩(Bean)이라고 부르는 유행이 있었다. 어째서 사람의 머리를 콩이란 속어로 부르게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콩이 사람의 머리 모양처럼 생겨서 그렇게 부르게 됐다는 설과 머리가 나쁜, 생각이 얕은 이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라는 설이 있다. 100년도 넘은 지금도 이 속어는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다. 바로 야구에서다. 12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한화의 투수 김민우와 이동걸이 롯데의 황재균에게 빈볼을 던졌기 때문이다. 빈볼(bean ball)의 사전적 의미는 '야구 경기에서 투수가 타자를 위협하기 위하여 고의로 타자의 머리 쪽으로 던지는 공'이다. 이 용어는 1900년대 초부터 사용됐다. 언제부터, 누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한 기록은 없다. 빈볼은 또한 빈볼을 피한 타자가 땅에 주저 앉을 때 묻은 먼지를 털어내야 하기 때문에 '더스터(Duster)', 빈볼이 타자로 하여금 땅에 주저앉거나 몸을 수그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녹다운 피치(Knockdown Pitch)'라고도 한다. 빈볼은 두 얼굴을 지녔다. 투수와 타자의 입장에서 빈볼의 사용 용도는 명확하게 갈린다. 투수 입장에서는 몸쪽 공을 던지지 못하도록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은 타자가 몸을 피하도록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야구에서는 이를 '브러시백'이라고 한다. 투수가 던지는 빈볼에는 전술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빈볼은 타자 입장에서 보면 '살인구'나 마찬가지다. 인체의 급소인 머리에 돌처럼 딱딱한 경식구가 맞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빈볼은 여러 희생자를 낳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20년 8월 16일 폴로 그라운드 대 뉴욕 양키스전에서 레이 채프먼이 칼 메이스의 빈볼에 맞고 쓰러진 사건이다. 채프먼은 경기에서 왼쪽 관자놀이에 공을 맞고 입, 코,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다음날인 1920년 8월 17일에 두개골 골절로 사망했다. 1936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미키 코그란이 또다시 머리에 공을 맞고 사망했고 이후 연맹은 타자의 헬멧 착용을 의무화했다. 국내에서는 1955년 선린상고 최운식이 경기고 투수 이한원에게 머리를 맞고 뇌출혈을 일으켜 다음날 사망한 것이 최초 기록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2001년부터 빈볼 투수에게 즉각 퇴장을 명령하는 '제로 톨러런스 룰'(Zero Tolerance Rule)을 정해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국내서도 심판원이 빈볼이라고 판단하면 해당 투수와 감독까지 퇴장시킨다고 규정하고 있다(야구규칙 8.02 투수의 금지사항 d). 빈볼과 관련해 '빈볼 워'(Bean ball war)라는 용어도 있다. 빈볼시비로 감정이 악화돼 양 팀 간에 의도적인 보복 행위가 꼬리를 물고 이어져 심각한 갈등관계가 형성된 것을 의미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이토록 위험한 행위인 빈볼이 현대 야구에서도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빈볼은 타자에게 몸쪽볼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주거나, 상대 타자가 중요한 안타를 내서 보복을 할 목적, 과도한 자기 과시를 견제하기 위해 위협하는 등, 심리적인 면에서 우위에 서겠다는 비신사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투구 방식을 남용하는 투수에게 종종 헤드헌터(Headhunter)라는 별명이 붙곤 한다. 현대 야구에서는 주로 상대의 비매너 플레이 혹은 조롱을 당한 보복으로 빈볼을 던지곤 한다.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기자 레너드 코페트가 남긴 저서 '야구란 무엇인가'의 첫장의 주제는 '타격'이다. 그는 여기서 투수들의 몸쪽 공략을 야구의 한 전략으로 봤다. 또한 상대편의 비매너 플레이에 대한 의도적 보복을 당연시했다. 즉, 보복도 야구의 일부라는 것이다. 실제로 야구의 본고장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보복성 투구를 불명예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의도적 빈볼로 '헤드헌터'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LA다저스의 1960년대 명투수 돈 드라이스데일은 "몸쪽으로 붙는 타자는 내 할머니라도 맞춰버리겠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던 호전적 투수였다. 그는 심지어 고의사구 상황에서 볼을 4개씩 던지는 대신 힛바이피치로 타자를 내보내는 플레이도 즐겨했었다. 로저 클레멘스나 페드로 마르티네즈 역시 유명한 '헤드헌터'였지만 그 때문에 비판받은 적은 없다. 돈 드라이스데일은 1984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페드로 마르티네즈 역시 명예의 전당 행이 거의 확정적인 투수이다. 지금 로저 클레멘스가 받는 비난은 단지 약물 복용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미국 야구 팬들은 극히 악질적인 빈볼이 아니라면 호전적인 플레이에 대해 비난 대신 찬사를 보낸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플레이 스타일이자 개성이며, 나아가서는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기주장이 강한 미국인들의 성향이 고스란히 스포츠에도 반영된 셈이다. 반면, 한국 프로야구는 빈볼 혹은 투수들의 몸쪽 공략에 부정적이다. 선후배 위계 질서가 확실하고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예'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야구의 플레이 중 하나인 빈볼은 여러 역사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희생을, 때로는 이야깃거리를 낳으면서 빈볼은 100년이 넘는 야구 역사 속에서 존재를 지켜냈다. 하지만 빈볼이 위험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만약 지구상에서 야구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빈볼 때문이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선수들은 과연 공정함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스포츠에서 '보복'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