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이 포기한 ‘염전노예’ 국가배상 항소심, ‘패소자 부담원칙’이 발목 잡았다
상대방 변호사 비용을 내야 하는 현행법이 ‘염전노예’ 국가배상을 반쪽짜리로 만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조계에서는 공익 소송의 경우 변호사비용을 각자부담하는 ‘편면적 패소자 부담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장애인 노동력 착취로 공분을 산 염전노예 사건의 국가배상 소송 2심이 23일 절반의 승소로 끝났다. 항소한 3명 모두 승소했지만, 1심 당시 원고는 8명이었다. 1심에서 승소한 한 명을 제외한 7명 가운데 4명이 항소를 포기했다. 현행 민사소송법 제98조에 따라, 소송비용을 패소자가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송비용에는 변호사 보수가 포함된다. 1심 패소 당시 원고 7명이 청구받은 소송비용은 697만2000원이었다. 장애인 단체의 반발과 원고 측 의견서 제출 이후 법원은 변호사 보수액을 1/4로 줄여 소송비용을 160만7620원으로 확정했다. ♦︎공권력 방관에 목숨 잃을뻔 항소심 판결문에는 공권력이 방조하거나 가담한 인권유린의 실상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지적장애 3급인 김모(53) 씨는 서울역에서 노숙 하다 2003년 3월~2014년 3월 전남 완도군 고금면 고금도에서 염부로 일했다. 염전 주인 김씨는 2006년~2007년 피해자의 아버지로부터 양육 위탁과 함께 노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당시 고금파출소 경찰이 “나중에 (피해자) 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사고가 나면 큰일 나니까 조치를 잘하라”고 조언한 데 따른 조치였다. 김씨는 염주로부터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인권침해 첩보를 입수한 완도경찰서는 2011년 6월 두 사람을 분리하지 않고 사건을 조사했다. 광주지방고용노동청 목포지청 근로감독관 역시 같은해 7월 같은 방식으로 조사했다. 현행 형사소송법과 범죄수사규칙에 따르면, 정신장애를 겪는 피해자는 가해자와 분리된 곳에서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과 동석해 조사 받아야 한다. 준사기죄와 장애인복지법 위반, 근로기준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가해자 김씨는 지난해 항소심에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자기결정 능력이 부족한 최모(57) 씨는 노임 없는 염부 생활 끝에 목숨을 잃을뻔 했다. 최씨는 1991년 3월~2014년 3월 전남 신안군 신의면 소재 섬에 있는 박모 씨의 염전과 식당에서 노임 없이 일하다 2010년 3월 박씨가 휘두른 칼에 하복부를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 하지만 같은해 4월 1일 섬에 돌아와 일해야 했다. 박씨의 신고에 경찰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아서다. 최씨는 박씨 지시로 다른 염주 4명의 염전에서도 일해야 했다. 노임은 박씨가 챙겼다. 경찰은 2014년 염전노예 사건이 불거진 이후 수사에 돌입했다. 박씨는 항소심에서도 살인미수와 횡령죄가 인정돼 지난해 징역 5년이 확정됐다. 피해자 측 최정규 변호사에 따르면, 2014년 이후 밝혀진 염전노예 피해자는 60~70명 규모에 이른다. 염전노예 사건은 국가기관의 안일한 대처로 인권이 유린됐어도, 경제적 부담 때문에 공익 소송을 주저하게 만드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일본과 미국처럼 변호사 보수 각자 부담원칙을 따르던 한국은 1990년 민사소송법 개정으로 패소자 부담 원칙을 적용했다. ♦︎약자 입 막는 ‘패소자 변호사비용 부담’ 이를 두고 소송 남발 폐해를 방지했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승패와 무관하게 문제 제기 자체로 악습이나 제도를 개선할 기회를 주는 공익소송에 일률적인 경제적 제재를 가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조주희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팀장은 21일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열린 ‘공익소송등에서의 소송비용 부담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다양한 시도 끝에 하나의 대안으로 선택하는 ‘공익소송’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 패소자 부담 원칙은 장애인의 사법 접근권을 제한하고 소송을 통한 권리구제 기회도 박탈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공익소송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무료 또는 소액으로 소송을 수임하는 경우가 많은데, 피고측 변호사 비용을 포함한 거액의 패소비용을 원고가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박호균 변호사가 같은날 발표한 ‘공익소송 등과 소송비용의 문제점 및 개선방향’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은 변호사 보수를 원고와 피고인 각자가 부담한다. 다만 미국 연방법과 주법은 대체로 인권·소비자보호·고용관계·환경보호 소송에 ‘편면적 패소자 부담주의’를 따른다. 편면적 패소자 부담주의는 원고가 승소한 경우, 패소자에게 변호사비용을 청구할 수 있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하다. 하지만 원고가 패소하더라도 상대방의 변호사비용을 물어 줄 필요가 없다. 편면적 패소주의는 ▲승소한 당사자에게 변호사비용을 포함한 완전한 손해를 배상 받도록 하고 ▲공익적 소송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패소자의 불법행위를 처벌하거나 억제하고 ▲패소자가 부당하게 응소해 다투는 일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됐다는 설명이다. 일본의 경우, 변호사 보수는 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당사자가 각자 부담한다. 민사소송법 61조에 따라 재판비용은 패소자가 부담해야 하지만, 이는 변호사 보수가 아니라 법원에 지급해야 하는 재판비용 뿐이다. 다만 민법상 불법행위나 채무불이행은 예외다. 패소자 부담주의가 소송남발을 막는다는 근거는 약해보인다. 25일 대법원에 따르면, 2017년 민사소송 1심 접수 건수는 101만7707건이다. 항소심은 6만2860건, 상고심은 1만5364건이다. 2016년 1심 접수는 97만3310건, 항소심 6만1552건, 상고심은 1만3887건으로 소송은 점차 늘어나는 모습이다. 민사소송 사건 접수는 늘어나는 반면, 조정과 화해는 줄어들고 있다. 2016년 조정은 4만6803건, 화해는 3만6217건이었다. 지난해 조정은 4만3916건, 화해는 3만931건으로 줄었다. 박 변호사는 발표에서 “현행 패소자 부담원칙을 유지하면서도 공익소송이나 입증 부담이 있는 인권 관련 소송 등에서는 경제적·사회적으로 열악한 원고가 승소한 경우 패소자에게 변호사 비용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자”며 “다만 원고가 패소할 경우 상대방의 변호사 비용을 물어 줄 필요가 없는 ‘편면적 패소자 부담주의’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