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시시일각] 천천히 익어가는 시간의 힘
2025년 기준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31명이다. 반면 한국은 평화상과 문학상 단 두 명이다. 과학상으로 한정하면 스코어는 더욱 벌어진다. 일본은 1949년부터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 등 모든 분야에서 고루 메달을 땄다. 올해만 '노벨 2관왕'을 기록했다. 한국은 여전히 '0명'이다. 후보로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이 격차를 연구 인프라의 문제로만 설명하긴 어렵다. 나라에 돈도 있고 인재도 있다. 지원금 예산도 일본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항상 옆 나라를 부러워하는 처지다. 왜일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연구의 시간'을 우리 사회가 견디지 못한다는데 있다. 기초과학 분야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하면 일본의 연구 환경은 한 과학자가 20년, 30년에 걸쳐 하나의 주제를 파고들 수 있도록 설계된다. 오사카나 교토대학의 연구소들은 장기적 자율연구를 보장하며, 성과보다는 지속성을 중시한다. 시간은 단절되지 않고, 축적은 곧 공동의 유산이다. 이것이 노벨상의 토대가 되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연구 시스템은 다르다. 대부분의 과제가 단기로 제한되고, 평가와 보고서, 실적 중심의 체계가 지배한다. '깊이'에 앞서 '속도'가 우선되다보니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 공모에 응해야 한다. 반복적 갱신의 일상화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의 미술창작레지던시 제도에서도 똑같은 논리가 작동한다. 과학계처럼 이곳도 상시적 갱신의 습관화가 고착되어 있다. 레지던시는 예술가에게 일정 기간 창작 공간과 지원금을 제공하는 제도다. 기초예술 증진과 장기적 창작 역량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선발해 다양한 실험 및 교류를 지원하여 거목으로 자라도록 돕는 것이 존재의 이유다. 그러나 이들의 다수는 공모, 심사, 입주, 결과발표 전시를 잇는 단기형 '순환 이벤트' 공간이기 일쑤다. 정부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공 레지던시도 매한가지다. 예술가들은 짧으면 3개월에서 6개월, 기껏해야 1년 남짓 체류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결과 전시와 보고라는 가시적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행정의 일정표' 속에서 즉각적인 완결에 연연해야 하고, 입주 작가 결과전이 종료되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즉, '리셋(reset)' 된다. 과학에서 노벨상이 기초연구의 결실이라면, 예술에서도 기초예술의 개념은 필수적이다. 여기서의 기초예술이란 드로잉 연습이나 조형요소와 원리 따위를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결말을 전제하지 않은 탐구, 당장의 완성보다 연구의 시간을 통한 '과정의 사유'를 중시하는 창작을 뜻한다. 레지던시는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하고, 어쩌면 그것이 본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예술정책은 이 개념을 제도화하는데 무관심했다. 예술가의 시간을 과정의 사유로 채울 수 있게 하려면 최소한 3년 이상의 다년형 체류 프로그램이 요구될 뿐더러, 과정 중심의 평가와 입주 이후의 후속 연구 지원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 나아가 실패의 기록이나 기억의 연결까지 미학적 자산으로 삼도록 장려해야 맞다. 현실은 판이하다. 연구의 시간을 '기한의 시간'으로 밀어내는 것도 모자라 일부 공공 레지던시에선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역 경제 활성화나 도시재생, 관광의 도구로 소비한다. 몇몇 지자체는 아예 문화센터가 되길 바란다. 대민 서비스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사고에 기반 한 '시민 향유'가 명분이다. 한국이 과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전혀 없는 이유나 한국의 레지던시가 세계적 예술 플랫폼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또는 레지던시를 통한 글로벌 아티스트들이 배출되지 못하는 배경엔 '시간의 가치'에 소홀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정의 사유에 인색하고 장기간에 걸친 연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도 같다. 이제는 기초과학이든 문화예술이든 천천히 익어가는 시간의 힘을 믿어야할 때다. 지난 76년간 일본이 그러했듯 말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