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뱅커 스토리] <3> [영업의 늪 ②]'금행원 은행원 흙행원'
"제대로 보셨네요. 우리끼리 아무리 나눠봐야 크게 보면 흙이에요. 위에서 상품 뿌리고, 가운데서 점수 매기고, 우린 그 밑에서 자폭하지 않습니까." 은행원 사이에도 금·은·흙으로 나뉘는 계급론이 있다. 금융당국과 은행장은 금행원, 중간관리자는 은행원이다. 반면에 남자와 여자, 뱅커와 텔러를 한데 묶는 굴레가 있다. 자폭·자뻑으로 대변되는 업무 환경과 관치금융 아래선 모두가 흙수저 즉, '흙행원'이다. 이들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이를 들여다보고, 행원들이 외치는 '진짜 계급' 이야기를 들어봤다. ◆ 남녀 행원 임금·근속 2배 차이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은행권에도 있다. 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의 남녀 근로자 수는 각각 1만548명과 1만288명으로 비슷하다. 신한과 우리, 하나은행도 남녀 사원수가 비슷하다. 그러나 국민은행의 경우 남자 평균 연봉은 1억400만원인데 반해 여자는 5900만원을 받는다. 이에 대해 행원들은 "군필자 신입 호봉이 2년 앞선다"면서도 "진짜 원인은 근속 연수"라고 말했다. 실제 금감원 자료를 보면, 남자가 21년 4개월을 다니는데 반해, 여자는 근속기간이 10년이었다. "자녀 교육 문제 등의 이유로 차장 때 그만두는 여성 행원이 많다"는 게 금융계의 전언이다. ◆ 동기와 승진 격차로 내적 갈등 은행은 정부가 내놓은 상품을 잘 팔면서 시험도 잘 봐야 승진하는 구조다. 농협은행의 경우 승진시험이 둘로 나뉜다. 자격시험과 임용시험이다. 자격시험에 붙으면 승진할 자격을 얻고, 그에 상응하는 인사평가를 받으면 승진하게 된다. 승진까지 보통 3~4년 걸린다. 반면 임용시험을 통과하면 길어야 1년 뒤에 승진한다. '고시'라고 불리는 이 시험에 통과하려면 농협법론·농협회계·실무1·실무2 등 4과목을 치러야 한다. 임용시험은 4과목을 한 번에 통과해야 한다. 상대평가로 석차를 매긴다. 반면, 절대평가인 자격시험은 하나씩 통과해도 된다. 기업은행에는 자격시험만 있다. 여신과 수신, 외환 과목이 있다. 매년 3월에 치르는 절대평가 시험에서 각 60점 이상 받아야 한다. 행원들이 주말을 반납하고 도서관에 가는 이유다. 승진시험이 부담스러운 이유 중에는 동기 사이에 벌어지는 직급 문제도 있다. 입행 9년차인 송 모씨(36)는 "동기가 차장과 지역 본부장으로 3계단 벌어진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입행 13년차인 유 모씨(39)는 "특히 본점 행원의 경우 '지점보다는 잘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부담이 더 크다"고 말했다. 입행 5년차인 김 모씨(31)도 "합격자 명단에 본점 행원 이름이 더 많다"며 "세 과목 가운데 두 과목을 동시 합격하는 사람도 많다"고 전했다. 유 씨는 "마음에 여유를 두다가 동기들보다 승진이 뒤쳐진 편"이라며 "결국 주말마다 공부하는 데 시간을 썼지만, 동기와 차이가 나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A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새로 만든 상품 공부에 승진시험 준비까지 하다보면 1년에 쉬는 날을 손에 꼽을 정도"라며 한숨을 쉬었다. ◆ '빠른'창구의 '다른' 텔러들 격차는 행원과 텔러 사이에도 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창구에 앉아 있어도 이들 사이에는 월급 차이가 적지 않다. B은행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텔러 연봉이 행원의 70% 수준"이라며 "시중은행에서 가장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전한 신입 연봉은 뱅커가 4000만원, 텔러가 3000만원 수준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타행 텔러와 달리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며 "신규 대출은 못하지만 대출 연장 업무 등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텔러는 외환위기 이후 생겼다. 원래는 행원들이 보통·대부·당좌계 등으로 나뉘어 있다가 서로 자리를 옮기는 식이었다. 전국금융노조 관계자는 "그런데 사용자들은 '빠른창구'로 불리는 보통계가 가장 편하니, 계약직을 뽑으면 인건비가 절약된다는 점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규직으로 인정된 뒤에도 여전히 가·나직군으로 나뉘어 입사한다"며 "일 할 땐 선후배와 언니 오빠사이지만, 노조가 달라 갈등의 불씨는 남아있다"고 전했다. ◆ 성별, 직군 달라도 크게 보면 '흙행원' 은행에선 끝 모를 성과주의로 모두 하나의 말풍선에 묶이게 된다. 행장과 금융 수장들이 금행원, 그 아래서 직원 실적을 평가하는 중간관리자가 은행원이라면, 나머지는 남녀와 직군 구분 없이 '흙행원'에 속한다. 오늘도 행원들은 정부의 금융정책에 부합하는 상품 판매와 승진시험에 짓눌린다. 10년간 외국계 은행에서 일한 오 모씨는 "은행 수익을 높이기 위해 증권과 보험 상품을 팔면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직원들에게 일을 시킨 게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며 "은행과 증권, 보험사의 역할을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C은행에서 16년째 일하는 이 모씨는 관치금융이 낳은 단기성과주의를 비판했다. "행장과 금융 수장은 길어야 3~4년 안에 조직을 떠날 사람들이에요. 창조니 행복이니….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도 인기몰이식 상품입니다. 실제로 인기 있다는 게 아니라, 인기를 노리고 만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는 주객이 전도됐다고 말했다. "정말 좋은 상품이라면, 은행이 자발적으로 홍보하고 자랑삼아야 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왜 은행이 아닌 정부가 자화자찬하는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