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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너 > 되살아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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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74)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종로 '사직단'

"궐 안에 역도들이 창궐해 나라가 누란지세에 처했다. 그대들은 과인을 도와 역도들을 몰아내고 종묘와 사직을 바로 세우겠는가?" 지난해 MBN에서 방영된 사극 '세자가 사라졌다'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나 영화 등에는 '종묘'와 함께 '사직'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저 두 개념이 국가의 근본을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묘는 사람을, 사직은 신을 모시는 공간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조선의 근본 상징하는 공간, 사직단 지난달 2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사직단을 방문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독립문 방향으로 약 337m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를 단행하며 1395년 경복궁 동편에 종묘를, 서편에 사직단을 조성했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며, 사직단은 임금이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을 의미한다. 사직단 동쪽엔 사단이, 서쪽엔 직단이 설치됐다. 두 단은 한 변의 길이가 7.65m인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약 1m다. 이중의 담이 단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안에는 '유'라고 불리는 낮은 담을, 바깥에는 4개의 신문이 세워진 담을 둘렀고, 그 외부엔 제사 준비를 위한 부속 시설을 뒀다. 1910년 전후 일제에 의해 제사가 폐지됐고, 부속 건물들이 헐려 두 단만 남겨진 상태에서 공원으로 조성됐다. 사직단은 1963년 사적 제121호로 지정됐으며, 1980년대에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가 복원됐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1988년부터 매해 이곳에서 사직 대제를 거행하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안향청 일대는 현재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안전 가림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대한 회백색 장벽을 지나 샛길로 들어서 사직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 맞은편에 자리한 동신문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남신문, 서신문, 북신문이 설치됐다. 다른 홍살문과 달리 바깥 담장의 북문만 3개의 문으로 이뤄졌다.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 격을 높인 것이라고. 안팎의 두 북문 사이엔 제례 중 국왕이 서 있는 자리인 판위가 있었다. 유의 북문과 담장의 북문을 잇는 건 향축로(향과 축문이 이동하는 길)이고, 여기서 서신문으로 어로(임금이 다니는 길)가 나 있다. 유의 바깥 서남쪽에 위치한 건물이 신위를 모시는 신실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을 한 바퀴 휘 둘러본 뒤 전사청으로 갔다. ◆제례 음식 준비하는 곳, 전사청 제례를 총괄하는 전사청은 사직단 서쪽에 자리했다. 전사관은 전사청에서 제사 음식을 점검했다. 전사청 양옆에는 제물이 될 소, 양, 돼지 등을 잡는 재생정과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가 배치됐다. 이외에 주요 시설로는 일하는 사람이 머물던 수복방, 절구를 두고 곡식을 찧던 장소인 저구가, 우물 등이 있다. 전사청 일대의 시설은 일제강점기 때 전부 철거돼 공원으로 이용되다가 2021년 복원됐다. 이날 전사청 권역에선 제사 때 쓰인 각양각색의 그릇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술잔으로 사용된 제기 '작' ▲메조와 차조를 담는 제기 '궤' ▲제례시 신을 맞이하기 위해 향을 피우는 제기 '향로' ▲간을 한 소, 양, 돼지고깃국을 담는 제기 '형' ▲산과 구름, 우레를 새긴 술항아리 '산뢰' ▲쌀과 수수를 담는 제기 '보' ▲코끼리 모양의 술항아리 '상준' 등이 전시됐다. 제기들 가운데 상준이 가장 눈에 띄었다. 부처님 귀처럼 아래로 길게 늘어진 귀와 고슴도치 가시마냥 삐쭉 솟은 상아를 가진 코끼리의 등에 화장품 용기를 얹은 형태였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술항아리를 쥐고 제사에 올릴 술을 따라야 했던 조상님들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당시 치러진 제례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전시물이 하나 더 있다. 사직 제관의 복식이 바로 그것. 제례에 참여하는 제관들은 검은색 계열의 제복을 입었고, 머리엔 제관을 썼다. 속에는 중단을, 겉옷으로는 흑색 의(衣)를 입었으며 그 위에 상, 대대, 수, 폐슬, 패옥, 품대, 방심곡령을 착용했다. 사극에 종종 제복이 나와서 특별히 새롭게 느껴지진 않았는데 제관에 부착된 세로선의 개수가 다르다는 사실은 이날 처음 알게 됐다. 이 세로선(양)의 수를 통해 신분을 나타냈다고. 사직단 안향청 권역 복원 공사는 연내 마무리될 예정이다. 국가유산청은 "일제강점기 민족 정체성을 훼손하기 위해 공원으로 격하한 국가 최고의 의례 시설을 되살려 사직단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회복할 것"이라며 "국민 문화 향유권 신장과 관광 자원 창출에 기여하겠다"고 전했다.

2025-02-04 13:48:50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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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73) 등산객 만남의 광장...관악구 '나들목공원과 관악산 으뜸공원·폭포쉼터'

서울의 외사산 중 하나인 관악산은 서남부 권역의 명산으로 꼽힌다. 관악산 정상은 큰 바위기둥을 세워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그 모습이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쓰고 다니던 '갓'을 닮아 산명이 '갓 관(冠)' 자에 '큰 산 악(嶽)' 자를 쓰는 '관악산'이 됐다.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서울역사답사기'에 따르면, '악' 자체가 '산'을 뜻해 예전엔 '관악'으로 일컬어졌다. 과거 관악산과 함께 경기 5악에 포함된 ▲개성의 송악산 ▲가평의 화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모두 의미가 중복돼 '악' 뒤에 '산'을 덧대지 않았으나, 오늘날엔 전부 뒤에 '산' 자를 붙여 부르게 된 것을 통해 국어생활의 변화상을 알 수 있게 됐다고. ◆생태 학습장 역할 톡톡히 하는 '나들목공원' 지난 6일 오후 관악산 앞에 자리한 소공원 2곳과 폭포쉼터를 방문했다. 경전철 신림선 관악산역 1번 출구로 나와 나들목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은 5분 정도면 휘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였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공원 한켠에 심어진 키 큰 소나무 4그루였다. 나무 기둥이 전봇대 굵기 3분의 1 정도로 얇아 키다리 삐에로를 연상시켰다. 과거 이곳은 고물상들이 밀집해있던 부지였다. 주변 경관을 해치고 환경을 훼손한다는 주민 민원을 계기로 관악구는 2009년부터 토지 보상을 진행해 땅을 사들였다. 구는 생계 곤란을 이유로 이전을 거부하는 상인들을 설득해 2013년 고물상 부지 정리를 마치고, 서울시로부터 4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공원을 만들어 이듬해 11월 '나들목공원'을 개원했다. 공원명은 공모를 통해 선정됐으며, '관악산을 드나드는 길목'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공원 한가운데는 도시 농업을 체험할 수 있는 친환경 텃밭이 마련됐다. 관악구청이 삼성고등학교와 협력해 운영 중인 교육용 텃밭으로, 사방에 무단 침입을 금지하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무단 침입 신고 후 수사 중입니다. CCTV 확보', '경고! 무단 침입시 고발 조치합니다' 등의 살벌한 경계 문구들을 보며, 우리가 전보다 한층 더 각박해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아 입맛이 썼다. 관용 없는 사회가 문제인 걸까, 기본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일까. 어떤 이는 '길가다 발견한 방울토마토가 신기해 기념으로 한두 개 따갔을 수 있지'라며 경고문을 고깝게 여길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일 년을 꼬박 고생해 기른 작물을 도둑이 훔쳐갔다'고 분노하면서 오랜 시간 미워하는 마음을 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텃밭을 지나쳐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행 약자도 즐길 수 있는 '관악산 으뜸공원·폭포쉼터' 나들목공원의 맞은편에 위치한 관악산 으뜸공원은 최근에 문을 연 주민 휴식처다. 공원이라고 해서 거대한 녹지가 또 하나 생겼구나 하는 기대감을 안고 방문했는데 실망이 컸다. 녹색 식물은 보이지 않고 회색 시멘트 벽돌만 바닥에 잔뜩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구는 낡은 휴게소와 지하 주차장을 허문 자리에 관악산 으뜸공원을 만들어 작년 8월 개장했다. 공원은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1960㎡ 크기의 휴게소와 대형 광장을 갖췄다. 공원 조성에 101억원이 투입됐다고 하는 데 볼거리가 정말 없어서 '이 돈이 대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허허벌판 앞에 건물 한 채가 휑뎅그렁하게 홀로 서 있어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허리가 굽은 노인들은 벤치에 앉아 있다가 엉덩이가 배기면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느릿느릿 산책했다. 어르신의 뒤를 따라 관악산 폭포쉼터로 이동했다. 안타깝게도 동절기엔 폭포가 가동되지 않아 시원한 물줄기를 구경할 순 없었다. 쉼터에는 정자와 운동기구 몇 개가 설치됐다. 하체 근육 풀기, 오금 펴기 등의 운동기구에는 '위험 안전제일'이라는 빨간색 글씨가 적힌 테이프가 빙 둘러졌다. 콘크리트 양생 기간이 끝날 때까지 사용을 금하는 안내문이 붙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정자로 향했다. 정자에는 별도의 바닥 없이 벤치만 설치됐다. 코로나 이후 이러한 형태의 정자가 특히 더 많이 만들어졌다. '신발을 벗고 정자 안으로 들어가 동네 주민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이제 옛 추억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운함이 든 것도 잠시, 희한한 물건을 발견해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원을 찾은 방문객들이 앉아서 다리 마사지를 할 수 있게 벤치에 달아놓은 롤러였다. 옥외용 롤러 마사지기는 저항 2개와 전선이 직렬로 연결된 것처럼 생겼다.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의자에 앉아 종아리를 롤러에 밀착시킨 상태로 다리를 움직이며 가볍게 마사지를 하거나, 양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복근에 힘을 주며 자전거 페달을 밟듯 번갈아 종아리를 문지르면 된다. 정자에 앉아 옥외용 롤러 마사지기로 뭉친 근육을 풀고 일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광장으로 나왔다. 나들목공원에서부터 으뜸공원을 거쳐 폭포쉼터까지는 전 구역이 다 평지로 이뤄져 있어 휠체어 탄 장애인이나 유아차 이용자 등 보행 약자 누구나 불편 없이 이용 가능하다. 운영 시간은 365일 24시간, 연중무휴다.

2025-01-07 15:39:5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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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72) 왕이 꿈에서 본 적을 찾은 곳…양천구 '용왕산공원'

서울 양천구 목동에는 21만3552㎡ 규모의 '용왕산공원'이 자리해 있다. 공원은 안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올림픽대로 인근에 위치했으며 다목적운동장, 게이트볼장, 반려견 놀이터, 야외무대, 실내 배드민턴장, 약수터, 유아 숲 체험장 등을 갖췄다. 과거 목동은 목초가 우거져 말을 방목하고 키우는 지역이었다. 목동과 그 가족이 모여 살아서 목동(牧洞)으로 일컬어지다가 훗날 나무목(木)을 붙인 목동(木洞)으로 바뀌었다. ◆용왕산에 깃든 전설은? 가느다란 눈발이 흩날린 지난 16일 용왕산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5호선 목동역 3번 출구로 나와 6620번 버스를 타고 6개 정류장을 이동해 월촌초등학교 정거장에서 내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목동 우성아파트 102동 쪽으로 가면 공원과 맞닿은 용왕정길이 나온다. 굽이굽이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 무장애 숲길 진입로에 다다랐다. 무장애 숲길은 유아차를 끄는 보호자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이용하기 쉽게 완만한 경사의 데크로 조성됐다. 이날 오후 숲길 들머리에선 두툼한 패딩과 마스크, 털모자와 장갑으로 무장한 모녀가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순도순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산책하는 두 사람을 지나 공원 내 다목적운동장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물어 제법 한산한 숲길과 달리 운동장은 체력 단련을 하는 주민들로 북적여 활력이 넘쳤다. 어르신들은 공중 걷기, 허리 돌리기, 노 젓기, 윗몸 일으키기, 역기 내리기 등을 돌아가며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운동을 하다가 땀을 많이 흘린 노인은 두꺼운 잠바를 고이 접어 벤치에 올려 두고 열을 식히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을 보며 노인과 왕, 용이 등장하는 용왕산의 전설을 떠올렸다. 용왕산은 옛 지도에 엄지산(嚴知山)으로 기록돼 있다. 해발 78m와 68m의 두 봉우리가 엄지손가락처럼 생겼다 해 이 같이 불렸다. 평범하고 지루했던 산명은 왕이 꾼 꿈을 계기로 비범하고 신묘한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어느날 왕은 갈대가 무성한 천호지벌(현 목동 신시가지 지역)에서 기운이 세고 험상궂은 장수가 자신을 해치는 꿈을 꾸게 된다. 흉몽이 찝찝했던 왕은 신하에게 천호지벌을 살펴보고 오라고 시킨다. 그 무렵 엄지산 아래 박씨 성을 가진 노인이 임종을 맞으며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거든 남들에게 알리지도, 염도 말고 그대로 관에 넣어서 물구나무서듯 머리가 땅을 향하게 세워 묻거라" 자손들은 노인의 말을 듣지 않고 관습대로 장례를 치른다. 한편 왕의 명을 받고 한양에서 온 신하들은 천호지벌을 샅샅이 뒤지던 중 얼마 전 장례를 마친 박씨 노인의 봉분이 파헤쳐진 것을 알게 된다. 시신은 사라지고 관은 부서진데다가 무덤에서 산 아래로 길게 파 내려간 흔적까지 발견된다. 이들은 수상한 흔적을 따라가다 갈대가 빼곡한 연못 속에서 거대한 용이 밧줄에 묶여 꿈틀거리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목격한다. 연못을 에워싼 군사들은 활과 창으로 용을 공격한다. 그렇게 용은 힘도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훗날 박씨 노인의 유언이 지켜졌으면 왕의 꿈처럼 용이 힘센 장수로 변신해 한 나라의 수장이 됐을 것이라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엄지산은 왕을 상징하는 '용(龍)'자와 '왕(王)'자를 합쳐 용왕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엄지산은 이름에 '왕'자가 포함된 왕령산, 왕재산으로도 일컬어졌다. ◆용왕정·황톳길서 놀멍쉬멍 다목적운동장 한켠엔 연못과 같이 둥글게 담이 둘린 맨발황톳길이 마련됐다. 안타깝게도 이날은 황토 위에 얇게 얼음이 덮여 있어서 황토 체험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 황톳길 옆엔 유리 온실처럼 생긴 쉼터가 설치됐다. 쉼터는 여가를 즐기러 온 노인들로 붐볐다. 할아버지들은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거나 장기를 뒀다. 쉼터 뒤로 난 갓길을 따라 용왕정으로 갔다. 용왕산 정상에 있는 용왕정은 1994년 서울 정도 600년(1394~1994)을 기념해 세워진 팔각형 정자로, 조선 중기 건축 형태로 건립됐다. 정자에 올라 한강 풍광을 감상했다. 해가 쨍쨍한 날엔 남산서울타워와 롯데월드타워도 보인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이날은 안개가 가득해 가시거리가 짧아 서울의 대표 랜드마크를 볼 수 없었다. 용왕산에는 호랑이 모양을 한 '범바위'도 있다. 세월이 흐르며 지물명이 '봉바위'로 바뀌었는데, 자식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불공을 드린 후 효험을 봤다는 말이 전해진다.

2024-12-17 15:03:2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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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71) 수변 활력 거점으로 재탄생한 강남구 '세곡천'

서울시가 지난달 11일 '서울형 수변 감성 도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세곡천 수변 활력 거점을 조성해 개장했다. 수변 감성 도시 사업은 서울 곳곳을 실핏줄처럼 잇는 78개, 334km 길이의 소하천과 실개천 수변 공간을 여가·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프로젝트다. 시는 작년 1호 홍제천 홍제 폭포 카페의 문을 연 데 이어 올해 2호 관악구 도림천 공유형 수변 테라스, 3호 동작구 도림천 주민 커뮤니티, 4호 홍제천 상류 홍지문 역사문화 공간을 차례로 개장했다. 시는 서울형 수변 감성 도시 프로젝트를 통해 서울 전역에 흐르는 물길을 따라 지역 특성을 반영한 문화, 경제, 휴식·여가 활동이 이뤄지는 신개념 수변 공간을 선보인다는 구상이다. 현재 서울시내 하천과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자연 생태형 ▲역사 관광 명소화형 ▲지역 경제 활성화형 ▲문화·여가형 총 4가지 형태의 수변 활력 거점 조성을 추진 중이라고 시는 덧붙였다. ◆수(水)세권 품은 복합문화공간 지난달 25일 서울 강남구에 새롭게 생긴 세곡천 수변 활력 거점(세곡동 509)을 방문했다. 지하철 3호선 수서역 6번 출구로 나와 강남06-1번 마을버스를 타고 8개 정류장을 이동해 강남 신동아 파밀리에 2단지 정거장에서 내려 목적지에 닿았다. 가장 먼저 실여울교 앞에 자리한 물맞이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황색, 노란색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단풍나무가 방문객을 맞았다. 이날 오후 물맞이공원을 찾은 어르신들은 늦가을 찬바람을 맞아 감기에 걸리는 게 걱정됐는지 마스크와 모자, 목도리로 중무장한 차림으로 느릿느릿 산책했다. 공원 내 오솔길을 따라 세곡1교 방향으로 걷다 보면 하천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물맞이광장과 수변 스탠드가 나온다. 아기 배냇머리처럼 들쑥날쑥 자란 연둣빛 사초, 보라색 데이지 같은 청화쑥부쟁이, 잎끝이 붉은 홍띠 등 돌계단 사이사이에 식재된 식물들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수변 라이프 즐기는 곳 은곡사거리 구간은 녹지와 펜스로 막혀 있던 기존 공간이 뻥 뚫린 사거리광장으로 재정비됐다. 지난 11월 25일 이곳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개천 위를 둥둥 떠다니는 청둥오리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깊이가 얕은 천에 먹이가 있을까 궁금해 넓적한 직사각형 모양의 돌다리를 건너면서 하천 바닥을 눈으로 훑었다. 검지와 약지, 소지 크기의 피라미들이 떼를 지어 돌무더기 근처에 몸을 숨기곤 천적의 눈치를 살폈다. 작은 물살이들은 잎이 가느다랗고 긴 낙엽과 생김새가 매우 흡사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확인해야 나뭇잎과 식별이 가능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먹잇감의 절박한 심정을 알 리 없는 동네 주민들은 물고기가 숨어든 돌다리 위를 자유로이 거닐며 걷기 운동을 했다. 이날 세곡천에서는 사람들 몰래 무언가를 캐고 있는 노인도 볼 수 있었다. 그는 두툼하고 거친 손으로 블루베리처럼 생긴 맥문동 열매를 한 움큼씩 따서 검은색 비닐봉지에 재빠르게 담았다. 마치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한국 버전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보는 듯했다. 맥문동 열매를 채취하는 어르신을 지나 세곡5교로 자리를 이동했다. 요트 돛처럼 생긴 조형물이 달린 다리 서쪽에 자리한 반고개테라스는 근린생활시설이 밀집한 아랫반 마을과 하천을 잇는 개방된 공간으로 설계됐다. 스탠드 곳곳에 네트형 휴게 공간이 생겼고, 다양한 수생 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생태 체험 데크도 설치됐다. 아이들을 위한 사면 놀이터는 세곡보도2교 일대에 조성됐다. 둔치 사면을 활용해 그물망 타기, 줄타기, 미끄럼틀, 클라이밍을 할 수 있는 자연 친화적 놀이터로 만들어졌다. 어린이들이 자주 이용하는 시설과 연계하기 위해 대왕어린이공원 인근에 뒀다고 한다. 서울시와 강남구는 향후 주민 의견을 수렴해 친수 공간을 확대할 예정이다. 세곡4교 밑에 빛의 갤러리를, 물맞이공원 앞에 수상 무대를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구는 전했다.

2024-12-03 15:13:2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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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70) 비가 오길 빌며 제사 지내던 곳...강서구 '우장산공원'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과 화곡동의 경계에는 허파처럼 생긴 '우장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지도를 펼쳐 놓고 가운데 있는 우장산로를 중심선으로 삼아 반을 접는다고 해서 두 개의 녹지가 데칼코마니처럼 꼭 맞게 겹치는 건 아니다. 늑골의 보호를 받는 장기(臟器) 폐처럼 한쪽이 조금 더 크기 때문이다. 참고로 허파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우장산공원은 남쪽이 북쪽보다 크다. ◆기우제 열면 반드시 비 내려 지난 11일 우장산공원을 방문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우장산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강서05'번 마을버스를 타고 6개 정류장을 이동, '강서구민회관' 정거장에서 하차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장산은 땅이 기름져 벼가 잘되는 마을에서 유래된 동명을 가진 '화곡동'의 진산으로, 두 개의 봉우리로 형성됐다. 북쪽 산은 검두산·검덕산·검지산·검둥뫼로, 남쪽 산은 원당산·남산으로도 일컬어진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현 서울역사편찬원)가 펴낸 '서울의 산'에 의하면, 산명은 검두산과 원당산 두 곳에 기우제단을 차려놓고 천신께 비를 내려달라고 빌 때 제주(祭主·제사의 주장이 되는 상제)가 세번째 기우제를 지내는 날에는 언제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이 날 참가자 모두가 우장(雨裝)을 쓰고 산을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우장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쓰는 우산, 갈삿갓이나 짚·띠 따위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인 도롱이 등을 이르는 말이다. 검두산과 원당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서부터 두 산을 합쳐 우장산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미국에도 이와 유사한 구전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비가 올 확률이 100%인 '인디언 기우제' 이야기다. 인디언들이 대단한 신통력을 지녀서가 아니라 비가 올 때까지 제사를 지내 이들이 기우제를 치르면 하늘에서 반드시 비가 쏟아졌다고. 우장산은 1980년대 중후반 시민공원으로 조성돼 1987년 12월 30일 개원했다. 우장산공원 면적은 35만9435㎡에 달한다. 공원 남쪽을 먼저 둘러보기 위해 원당산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서구민회관에서 싱그러운 낙엽 향을 따라 걷다 보면 '우장산 유아숲체험원'이 나온다. 유아숲체험원에는 ▲경사진 나무와 밧줄 위를 오르내리며 체력을 단련하는 '까치둥지 오르기' ▲흔들거리는 나무다리를 건너고 밧줄을 오르며 모험심을 기르는 '꿈틀꿈틀 놀이터' ▲숲속놀이의 안전 규칙, 놀이 방법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자연 속에서 야외 학습을 하는 '도란도란 숲속교실' 등의 다채로운 놀이 공간이 마련됐다. 이날 어린이 한 명 없이 쓸쓸한 유아숲체험원을 보며 한국이 저출생 국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장산공원에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만 있는 건 아니다. 산을 좀 더 오르면 작은 통나무집처럼 생긴 '우장근린공원 힐링체험센터'가 나온다. 센터에서는 오감숲산책, 숲카페 컵 만들기 등으로 구성된 '스트레스 회복 프로그램', 원예테라피, 피톤치드 호흡을 해보는 '오감 체험 프로그램' 등을 즐길 수 있다. 나무 건물 옆엔 맨발로 걷는 황톳길과 함께 세족장과 족욕장도 갖춰졌다. ◆새마을운동 흔적 남은 곳 우장산공원 남쪽을 찬찬히 둘러본 뒤 북쪽으로 길을 다시 잡았다. 우장산약수터에서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을 배경으로 멋들어진 은행나무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산책로를 걸었다. 길은 공원 관리 차량이 다닐 수 있게 콘크리트로 포장된 회색 도로와 푹신해서 걷기 좋은 붉은 탄성 포장도로 두 개로 나뉘었다. 좌측 통행이 익숙한 어르신과, 우측 통행이 친숙한 젊은이들이 마주보며 걸어오다가 스텝이 꼬여 엉거주춤 당황하는 모습을 재밌게 구경하며 최종 목적지로 향했다. 우장산 정상에는 회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새마을 지도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새마을 운동 중앙회에 따르면, 이 탑은 1986년 8월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가 새마을 운동의 영속적인 발전과 새마을 지도자의 숭고한 봉사 정신을 표상하기 위해 건립했다. 당시 전국 23만 새마을 지도자의 성금으로 착공 8개월 만에 완성됐다고 한다. 400평의 부지 위에 직경 40m의 원형 바닥에 세워진 높이 15m, 13층짜리 화강석 탑으로, 탑신은 당시 전국 9개도와 1개 특별시, 3개 직할시를 의미한다. 8각형 바닥에 깔린 231개의 돌은 전국 시, 군, 구의 향토석을 이용한 것으로 각 지역에서 국가와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새마을 지도자들의 화합과 단결을 상징하며, 탑신 중 두 개가 수직으로 결합된 형태는 도시와 농촌 새마을 운동 역군들의 협동 정신을 나타낸다고. '서울의 산'을 집필한 나각순 박사는 "우장산 서쪽 기슭 발산2동 문화유씨 집성촌은 조선 숙종 때 좌의정을 지낸 유담후가 개화동 쪽에서 새로운 농토를 찾아 정착한 곳"이라며 "문화유씨 집성촌은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이곳의 지세에 대해 우장산과 앞의 원당평야, 그리고 한강이 마을 앞 먼 곳에서 동류서향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러한 연유로 내발산동 문화유씨 주민들은 우장산을 땔감도 얻고 홍수도 예방해주는 영산으로 여겨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풍년과 동네의 안녕·번영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내곤 했다"고 덧붙였다.

2024-11-12 15:26:0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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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9) 1000그루 소나무 숲에 풍덩...나무의 바다 '강북구 솔밭근린공원'

서울 강북구에는 '우이동'이란 마을이 존재한다. 도봉산 산봉우리 가운데 소의 귀처럼 생긴 쇠귀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서울 지명 사전'에 따르면, 조선 시대 초부터 우이동은 한성부 동부 성외 지역이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서울 행정구역을 5부 8면제로 개편하면서 이 마을은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우이리가 됐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한 서울시 행정구역의 확장으로 우이리는 시에 재편입되고 새롭게 생긴 성북구로 들어가게 됐다. 우이동은 그로부터 24년 뒤인 1973년에 신설된 도봉구에 흡수됐다가, 1995년 강북구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에 속하게 됐다. ◆주민이 지켜낸 소나무 숲 지난 14일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한 솔밭근린공원을 찾았다. 우이신설선을 타고 4.19민주묘지역에서 하차해 2번 출구로 나와 도봉도서관 방향으로 308m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맞는 건 벤치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고령자들이다. 사교성이 있는 노인들은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눴고 낯을 가리는 어르신들은 입을 꾹 닫고 앞만 바라봤다. 하릴없이 시간을 축내는 모습이 신선놀음을 하는 것 같아 부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눈칫밥을 먹으며 도시를 배회하는 비둘기처럼 보여 짠하기도 했다. 가을의 낙엽처럼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공원의 소나무들은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굴하지 않고 짙은 녹음을 뽐냈다. 솔밭공원은 서울 유일의 평지형 소나무 군락지로 60~100년생 소나무 1000여그루가 자라나고 있다. 강북구는 주민 요구를 수용해 당초 사유지였던 소나무 자생지를 사들이기로 결정하고, 서울시로부터 매입비 일부를 지원받아 160여억원을 투입해 공원 녹지를 조성했다. 구는 기존에 있던 소나무를 최대한 보존하고, 옥잠화, 노루오줌, 원추리, 하늘매발톱, 금낭화, 비비추 등 약 34만본의 초화류를 추가로 식재해 지난 2004년 1월 28일 솔밭근린공원을 개원했다. 소나무 숲에서는 단풍을 볼 수 없어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침엽수와 어우러진 단풍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등이 노랗고 붉은 물결을 이뤘다. ◆자전거·배드민턴·장기...놀 거리 가득 솔밭근린공원에는 생태 연못, 그늘 시렁, 산책로, 데크 광장, 어린이 놀이터, 야외 무대, 놀이 마당, 바닥분수 등이 설치됐다. 이날 공원으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은 제 또래들이 즐기고 있는 놀잇거리를 찾아 함께 어울렸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거북이 등딱지 같은 가방을 놀이터에 내팽겨쳐놓고 그네를 향해 달려갔다. 신 나게 노는 모습을 구경하던 엄마들은 목마르다고 징징대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음료를 주문하러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은 공원에서 자전거 라이딩을 했고, 20~30대 청년들은 헤드폰을 머리에 얹고 빠른 걸음으로 산책했다. 중장년층은 둘 혹은 넷씩 짝을 이뤄 배드민턴을 즐겼다. "어제 실컷 했겠네", "엉 이기려고 계속 연습했지"라는 등의 대화를 나누며 킬킬거렸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할아버지들은 콜라 캔처럼 생긴 벤치들이 놓인 쉼터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 수 물러줘", "에헤이~" 하며 가벼운 실랑이를 벌이는 익살스러운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됐다. 장기·바둑 쉼터에 모인 노인들은 입구에 넋 놓고 앉아 있는 어르신들보다는 제법 기력이 있어 보였다. 솔밭근린공원만의 볼거리로는 '소나무 시'가 있다. 서울시내 공원 중 소나무를 주제로 한 시가 가장 많이 전시됐다. '하고 싶은 말을 / 죄다 안으로 삭여서인지 / 바늘처럼 돋아난 진초록의 / 무성한 잎, 그 입술들 // 세상이 바뀌고 아무리 달라져도 / 말 없는 말들만 낮지만 높게 쟁이듯이 // 등 구부린 채 하늘을 끌어안는 저 나무들.' '제 키만큼 속으로 깊은 토굴을 파고 / 절대 침묵 속에 용맹정진하던 / 푸른 수도승들의 다비식이 끝났다. // 그 부재의 잿더미 우으로 / 흰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 어쩌면 솔향 그윽한 사리를 / 찾으러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솔밭근린공원에서 소나무 숲길을 거닐다 만난 아름다운 시구절들이 삶을 예찬하고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2024-10-29 14:45:0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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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8) 조선시대 죽음의 흔적 엿볼 수 있는 은평구 '진관근린공원'

조선시대 죽음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는 진관근린공원은 은평구 소재 이말산에 자리했다. 산이 곧 공원인 셈이다. 이말산의 해발고도는 132.7m이며, 면적은 98만3791㎡에 이른다. '이말'은 '말리(茉莉)' 혹은 '재스민'으로 불리는 식물을 뜻하는데, 현재로선 산에 이 같은 이름이 붙은 연유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구파발역 인공폭포에서 입곡교 앞 북한산 국립공원까지 이어지는 진관근린공원은 과거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이 성묘를 다녔던 곳이었다. ◆참호·진지 등 군사시설 곳곳에 지난달 23일 오후 진관근린공원을 방문했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로 나와 7723번 버스를 타고 6개 정류장을 이동해 생태공원앞·구립상림도서관 정거장에서 내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는 이말산 생태 놀이터가 설치됐다. 아이들이 숲을 자유롭게 체험하며 모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조성한 놀이 공간으로 짚라인 타기, 징검다리, 나무집 놀이대, 인디언 집놀이, 나무 실로폰, 평균대 건너기, 흔들 밧줄 건너기, 림보 놀이대 등의 기구가 마련됐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하교하는 아이들이 줄줄이 학원 차에 실려가는 바람에 이날 놀이터는 어린이들 웃음소리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놀이터를 지나 걷다 보면 쟈스민정이라는 아담한 나무 정자가 하나 나온다. 공원으로 마실 나온 주민들은 정자에서 껌이나, 물 등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흙길에 떨어진 밤송이와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열매가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케 했다. 눈을 크게 뜨고 바닥을 살폈더니 사람이 잡아 뜯은 것마냥 수십장의 잎과 함께 떨어진 상수리나무 열매들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요리 고수가 칼로 깍둑썰기를 한 것처럼 정교하게 잘린 나뭇가지 단면을 바라보며 '도토리거위벌레'를 떠올렸다. 작은 톱처럼 생긴 주둥이를 가진 도토리거위벌레는 자식들을 위해 온종일 나무줄기를 잘라내는 일을 한다. 도토리거위벌레는 도토리 열매가 영글기 전 초록색을 띨 때 안에 알을 까 넣어 놓고는 나뭇잎 여러장과 함께 가지를 절단한다. 새들로부터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수십장의 나뭇잎은 알이 든 열매가 땅에 떨어질 때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자식 사랑이 지극한 도토리거위벌레 이야기를 되새기며 산을 오르다 보면, 무시무시한 경고 문구를 만나게 된다. '이 지역은 군 사격장으로 도비탄 및 불발탄에 의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지역이므로 민간인 출입을 금지합니다. 무단출입으로 인한 사고 발생시 군부대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이를 위반한 자는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보호법 제24조에 따라 처벌됩니다. 폭발물 의심 물체 발견시 폭발 위험이 있으므로 절대 접근 또는 접촉하지 말고 군부대로 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는 안내문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둘레길 곳곳에 설치된 폐타이어로 만든 참호(야전에서 몸을 숨기며 적과 싸우기 위해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와 콘크리트로 삼면을 두른 진지(언제든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설비 또는 장비를 갖추고 부대를 배치해둔 곳)가 스산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조선시대 분묘군…다양한 문인석 볼거리 군사시설 외 진관근린공원만의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목 잘린 문인석(문관석)이 바로 그것. 문인석은 무덤 앞에 배치하는 석물 중 하나로 금관조복형과 복두공복형이 있다. 조선 초·중기에는 복두공복형의 문인석을 세웠고, 중종대(1506~1544) 이후에는 금관조복형을 주로 설치했다. 산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다가 금관조복형 좌문인석 1기를 발견했다. 다른 것들과 달리 온전한 형태였다. 이는 조선 명종 때 내시부 상선 노윤천 묘 하단의 금관조복형 좌측 문인석으로, 머리 부분이 떨어진 것을 정비 과정에서 접합해 세운 것이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인물상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잔뜩 움츠러든 거북목 자세를 취한 게 현대 직장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신기하게 느껴졌다. 진관근린공원에 크고 작은 문인석이 세워진 이유는 이곳에 조선시대 분묘군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능묘'에 따르면, 이말산 일대에는 서쪽 사면으로부터 우봉 김씨, 임실 이씨, 영천 이씨, 해주 최씨, 남양 홍씨, 완산 이씨, 옥구 임씨, 전주 이씨 은언군파 등 15세기 이래 사대부·중인·내시·궁녀를 포함해 다양한 신분층의 많은 묘가 시기별로 다채롭게 분포됐다. 대표적으로 숙종 때 역관이자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홍세태(1653~1725)의 무덤이 있다. 이외에 정3품 상다 김경량, 정6품 상세 정여손의 묘표가 있고, 현종의 보모상궁인 임상궁, 상궁 임실 이씨 등의 묘표가 확인됐다. 이말산 일대에는 왜 무덤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걸까. '서울 洞(동)의 역사'에 의하면, 조선의 공식 법전인 '경국대전'에 도성으로부터 10리 안에는 무덤을 못 쓰게 하는 금장 규정이 있었다. 진관동은 성저십리 바로 바깥에 위치해 많은 묘가 만들어졌다. 특히 조선 왕실의 살림을 도맡아 했던 내시와 궁녀, 통역 일을 하는 역관들의 무덤이 많았다. 조선 제일의 역관 가문이었던 우봉 김씨의 집안 묘지 구역도 진관동 중앙에 자리한 이말산에 있었으며, 영조의 손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이인 또한 이말산에 안장됐다. 안타깝게도 조선의 제25대 국왕 철종의 조부인 이인의 분묘는 6.25 전쟁 중 유실됐다고 한다.

2024-10-01 14:16:1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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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7) 걱정·근심 내려놓는 서울 속 시골, '도봉구 무수골'

서울 도봉구에는 '도시 속 시골'로 불리는 '무수골(無愁골)'이 있다. 세종의 17번째 아들 영해군(1435~1477)의 묘를 조성하면서 생긴 마을로, 550년 가까운 역사를 지녔다. 마을명은 영해군의 묘를 찾은 세종이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 뒤 '물 좋고 풍광이 좋아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 대전 중구, 상주 모동면, 영동 양산면 등 전국 각지에 무수골이라는 지명이 붙은 곳이 존재한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서울 지명사전'에 따르면, 골짜기나 산 밑에 있는 마을 중 물이 많은 곳에 '무수골'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곳 지난 7일 오후 무수골을 찾았다. 지하철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로 나와 목적지에 가닿고자 탄 도봉08번 마을버스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버스에 타는 사람, 내리는 사람,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버스에 오르는 사람은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버스 기사는 "왜 이렇게 오랜만이여. 얼굴 보기 힘드네", "반대편에서 기다리면 안 돼요. 버스 안 가요"라는 등의 말을 건넸다. 마을버스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르신들은 "상전이 와서 장을 많이 봤다", "자식이 왜 상전이냐", "눈치 보이면 상전이지", "가는 날이 장날이다", "추석이 왜 장날이냐, 축제지" 하는 등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깔깔거렸다. 대화 내용이 흥미로워서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말소리를 엿들었다. 버스 안 분위기가 오순도순 화기애애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노인이 버스에 오르면 재빨리 자리를 양보했고, 어르신들은 "아유 참. 고마워요"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내리는 사람들은 "다음에 봐요", "잘 들어가"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3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 대중교통을 수없이 많이 이용해봤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이토록 진하게 풍겨오는 마을버스를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훈훈한 광경을 눈에 남긴 뒤 종점에서 하차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직 가을에 자리를 내줄 준비가 되지 않은 숲은 짙은 녹음을 드리웠고, 미세먼지 한 톨 없는 청명한 하늘은 푸르름을 뽐냈다.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매미 우는 소리, 풀벌레 노랫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서 만나는 벼의 황금빛 물결 무수골은 윗말, 중간말, 아랫말 세 개로 나뉜다. 국립공원에 포함돼 개발 광풍을 피해 간 윗무수골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라 고찰 원통사 밑에서 발원한 계곡 물줄기를 하류에서부터 따라 올라갔다.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물속 생명체들을 잡는 데 열을 올렸다. 차양 모자를 푹 눌러 쓴 어른들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했다.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길을 걷다 보면 성신여자대학교 난향별원이 나온다. 넓은 정원과 2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학생 단체의 합숙 훈련 장소라고 하는데, 잡풀이 우거져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난향별원에서 만세교로 진입하는 길목은 놓쳐선 안 될 사진 명소다. 나무가 우거져 그늘진 공간 뒤로, 쭉 뻗은 평야 위에 햇빛이 쏟아져 한 폭의 명화를 그대로 베껴놓은 듯했다. 이곳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현실 세계에서 판타지 세상으로 가는 천국의 문이 찍힌 것처럼 보인다.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 같은 길을 지나면 광활한 논이 펼쳐진다. 여기선 푸릇푸릇한 벼들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지개 논 입구에 박힌 나무 팻말에는 "도봉산 윗무수골은 북한산 자락에 남은 유일한 농경지로, 봄에는 어린 모, 여름엔 파릇파릇 자라는 벼, 가을에는 황금 물결, 겨울에는 눈 위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며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자연의 지혜를 배워보자"는 말이 쓰였다.

2024-09-10 14:49:20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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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6) 기술과 사람의 공존 모색하는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

서울시가 지난 20일 도봉구 창동에 국내 로봇산업의 메카가 될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Seoul Robot & AI Museum·서울RAIM)'의 문을 열었다. 시는 창동·상계 신경제중심지에 산업혁명 전진기지 역할을 할 전문 과학관이자 동북권 핵심 문화시설을 조성키로 결정하고, 2021년 5월 착공에 들어가 금년 3월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을 준공했다. 서울RAIM은 올 7월부터 총 2차례의 시범 운영 기간을 거쳐 이달 20일 정식 개관했다. ◆인간 vs 로봇, 인간과 로봇 지난 8월 20일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을 방문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창동역 1번 출구로 나와 중랑천 방향으로 약 408m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빵사 모자처럼 둥글 넓적한 하얀색 건물은 터키의 유명 건축가 멜리케 알티니시크의 작품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 건축사사무소의 수석건축가 출신인 그는 서울RAIM에 곡선의 비정형 디자인을 적용했다. 내부엔 건물 외관과 조화를 이루는 튜브형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됐다.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은 건축면적 14만3129㎡, 연면적 7308㎡,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날 서울RAIM 1~3층에서는 각각 ▲로봇·인공지능과의 만남 ▲로봇·인공지능을 알아가다 ▲생각하는 기계, 질문하는 인간을 주제로 한 상설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먼저 볼거리가 가장 많은 3층으로 향했다. SF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람 형상의 거대 로봇이 전시실 한가운데서 관람객들을 맞았다. 초록색 버튼을 누르고 질문하면 메타 휴머노이드 마스크봇이 대답을 하는 방식으로 체험이 이뤄졌다. "너는 거짓말을 잘하니?"라는 첫 번째 물음에 로봇은 "그런 의심이 들겠군요"라고 태연하게 답변했다. "오늘 몇 사람이랑 대화했어?"라는 질문엔 "오늘 많은 분들과 대화해서 즐거웠어요"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힘들어서 퇴근하고 싶지?"라고 묻자 "헤엑. 저는 퇴근이 필요 없어요. 여러분과 대화하는 게 아주 즐겁답니다"라는 로봇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또 하나 기억에 남았던 건 '얼굴 없는 초상화'였다. 작가들에게 제시된 인물 사진으로 초상화를 제작하되, 인공지능이 대상의 얼굴을 식별하지 못하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미션을 준 결과 탄생한 작품들이었다. 인공지능이 아직 가닿지 못한 인간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금방 또 따라잡히겠지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기계가 ON하면, 사람은 OFF 이어 '온 앤 오프' 특별전이 마련된 4층 기획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명에는 '로봇과 인공지능을 작동하려면 전기적 온(ON)/오프(OFF)가 필요하다'는 의미와 '로봇·AI가 작동(ON)하면 사람의 일자리와 역할은 오프(OFF)된다'는 두 가지 뜻을 담았다고. 가장 인상 깊은 전시물은 '로보틱 미러월'이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숫자 0과 1이 빼곡히 적힌 벽면이 둘렸고, 정면엔 유리 패널이 붙은 로봇팔 3개가 설치됐다. 'ㄱ', 'ㅁ', 'ㄴ'이라는 한글 자음 모양의 오브제를 든 로봇팔은 춤추듯 자유롭게 움직이다가 맨 마지막에 '<◇>'라는 기호를 만들어냈다. 유리 패널엔 숫자 0, 1뿐만 아니라 앞에선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이진원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장은 "로봇과 인공지능이 귀찮고 머리 아픈 일들을 대신해 세상이 편해졌다고 여기기 쉽지만, 우리가 행동하는 것들, 생각했던 것들, 판단했던 것들이 정보화돼 나도 모르게 수집되고 관제되고 있다"며 "기술의 발달에 의해 편해진 이면에 또 다른 불편함이 있다는 것을 같이 고민하고 생각해보기 위해 이렇게 전시를 꾸며봤다"고 말했다. 로보틱 미러월에 이어 'PBV 응급차' 전시 공간을 둘러봤다. '로봇 간호사'라는 명찰을 단 깜찍한 꼬마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왕눈이 로봇 간호사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자 눈이 보라색으로 변했다. '배가 아파요'라는 어르신의 말에 로봇 간호사는 "많이 아프시겠어요. 배를 따뜻하게 하고 휴식을 취해보세요"라고 답했다. '주사 맞아야 돼요?'라는 질문에 로봇이 재빨리 답을 고르지 못하자 관람객들은 "눈만 껌뻑인다"며 박장대소했다. 꼬마 간호사가 뒤늦게 "주사는 꼭 필요할 때만 맞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대답을 내놓자 어르신들은 "아유 귀여워~"라며 기특해했다. 팔뚝 만한 크기의 로봇 간호사는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인형처럼 눈 깜빡임이 어색하고 동작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로봇 간호사를 대했고, 쉽게 마음을 내줬다. 전시실 벽에 작품 소개와 함께 적혀 있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봇이 우리가 해왔던 많은 일들을 대신할 때,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 운영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관람 희망자는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홈페이지에 접속해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65세 이상은 무료로 입장 가능하며, 20~64세 성인 관람료는 2000원이다.

2024-08-27 14:50:0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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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5) 정조의 사부곡 들려오는 동대문구 '배봉산근린공원'

동대문구는 서울 25개 자치구 중 공원 면적이 가장 작다. '배봉산근린공원'은 구에 몇 없는 녹색 허파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현 서울역사편찬원)가 펴낸 '서울의 산'에 따르면, 배봉산은 전농3동 산 32-20을 중심으로 21필지 21만9980㎡(6만6600평)를 대상으로 1977년 7월 9일 건설부고시 제138호로 시설 근린공원으로 지정됐다. 이후 1987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고시 제153호로 지적 고시됐고, 이어 1991년 12월부터 공원 조성 공사가 시작돼 1993년 4월 준공됐다. ◆숲속도서관부터 인공폭포까지…피서지로 제격 폭염이 기승을 부린 지난 11일 오후 배봉산근린공원을 방문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에서 하차해 2번 출구에서 2015번 버스를 타고 6개 정류장을 이동해 '전동초등학교·전농동SK아파트' 정거장에서 내린 다음 배봉차도육교 방향으로 148m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날 공원은 낮 최고 기온이 34도까지 치솟은 무더운 날씨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몸을 향한 시민들로 북적였다. 입구 우측에는 거대한 흰색 차양막이 설치된 배봉산 열린 광장이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은 분홍색, 흰색, 보라색 빈백에 누워 잠을 청했고, 젊은이들은 1인용 소파에 구부정하게 앉아 스마트폰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광장 옆에는 배봉산 숲속 폭포가 마련됐다. 네 명의 어린이가 폭포 물줄기를 맞으며 첨벙첨벙 물장구를 쳤다. 어른들은 파라솔 밑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면서 힐끗힐끗 곁눈질로 아이들의 안전을 살폈다. 동대문구는 "배봉산 숲속 폭포는 과거 채석장으로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인식됐으나 주민들에게 새로운 볼거리와 함께 청량감과 희망을 선물하는 아름다운 수경 공간으로 변신했다"며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수면 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 야간 조명이 연출하는 다양한 빛과 색채를 감상할 수 있다"고 전했다. 폭포 규모는 폭 41m, 높이 19m이며, 유리 섬유 강화 시멘트(Glass fiber Reinforced Cement·GRC) 인조암을 활용해 만들었다. 자동 수질 정화 시스템이 구축된 상수도를 수원으로 하며, 용수량은 80t에 이른다. 수조 크기는 83.4㎥이고, 폭포와 분수(샤프, 가이샤, 안개)로 구성됐다. 청청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배봉산 숲속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날이 더워서 사람이 없겠거니 하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섰는데 이게 웬걸,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부가 붐볐다. 11일 오후 배봉산 숲속 도서관으로 나들이 나온 시민들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독서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어른들은 두꺼운 책을 손에 붙들고 학구열을 불태웠다. 아직 글을 깨치지 못한 꼬마들은 동화책을 실감 나게 읽어주는 엄마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경청했다. 도서관은 사면에 책장이 붙은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낮은 키의 책장 네댓 개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이 벽에 스며든 형태로 설치돼 숨바꼭질하듯 서가 사이를 거니는 낭만이 사라져 아쉬웠다. 내부 구조상 책을 많이 못 넣는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슬라이딩 이중 책장을 도입, 책을 두 겹으로 쌓았다. 도서관은 아담한 규모에 비해 책이 많았다. 한국십진분류법을 따라 900번대에는 역사책이 꽂혀 있었는데, '배봉산과 사도세자'라는 북큐레이션 코너가 특히 인상 깊었다. 이곳에는 ▲사도세자 비밀의 서 ▲버림받은 왕자 사도 ▲영조와 사도 ▲역사 추리 조선사 ▲정조, 나무를 심다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 생활 칠십 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영조와 네 개의 죽음 ▲사도의 8일 등 제목부터 흥미진진한 책들이 가득했다. ◆삼국시대 관방 유적·영우원 터 있는 역사적 장소 숲속 도서관에서 사람 구경을 한 뒤 배봉산근린공원으로 이동했다. 배봉산의 산명 유래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진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할 만큼 강단 있는 인물이었다. 정조가 뒤주에 갇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에게 못다 한 효를 이어가기 위해 궁궐에서 매일 아버지 묘소가 자리한 곳을 향해 절하며 예를 표해 산 이름이 '배봉산(拜峰山)'이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외에 배봉산 자락에 영우원과 휘경원 등 왕실의 묘원이 마련돼 백성들이 고개를 숙여 절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배봉산으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 있고, 산의 모습이 도성을 향해 절하는 형상이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귀를 기울이면 어디에선가 정조의 사부곡이 들려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배봉산을 탔다. 정상 전망대에 올라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전경을 감상했다. 좌측에서부터 천마산, 구능산, 백봉산, 망우산, 장안교, 동부간선도로, 중랑천, 용마산, 용마폭포공원, 아차산, 남한산, 롯데월드타워, 대모산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배봉산 정상부는 1968년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1973년 수도방위사령부 방공단 소속 군부대가 설치돼 약 반세기 동안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었다. 군부대 이전 후 정상부를 배봉산근린공원으로 복원하던 중 고구려 관방 유적이 발견됐다. 배봉산 보루 유적은 2016년 공원 조성을 위한 사전 발굴 조사에서 확인됐다.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과 흙으로 쌓은 시설물로, 주로 소규모 성곽을 일컫는다. 구는 "배봉산 관방 유적은 기존의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군과 달리 중랑천의 서쪽에 위치하며, 한강 수로를 이용해 내륙과 서해를 오가는 수상루트와 중랑천을 통해 한강으로 남하하는 길을 동시에 관망 가능한 곳에 자리한 새로운 유적"이라면서 "고대 서울 지역에서 삼국의 역사적 정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추가적으로 이번 조사지와 더불어 주변으로 본 유적에 선행하는 선사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배봉산에는 선사시대부터 양호한 입지를 바탕으로 장기간에 걸쳐 유적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결론적으로 배봉산 관방 유적은 동대문구의 유구한 역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색이 없다"고 덧붙였다.

2024-08-13 15:04:3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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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4) 조선 왕들의 매 사냥터서 공공 녹지로 거듭난 '응봉근린공원'

응봉근린공원은 서울 중구와 성동구에 걸쳐 있는 녹지다. '응봉'이라는 명칭과 관련해서는 조선 시대 임금이 사냥할 때 매를 풀고 꿩을 잡은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봉우리가 매처럼 생겨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600여년전 왕족들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던 이 공간은 시간이 지나고 사회가 변화하며 시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공녹지로 거듭났다. ◆도시개발로 5개로 나뉜 공원 응봉근린공원은 과거 하나의 거대한 줄기였으나, 도시개발 과정을 거치면서 잘게 쪼개졌다. 응봉산(성동구 금호동4가 1540), 대현산(성동구 독서당로63길 44), 매봉산(중구 신당동 산51), 배수지공원(성동구 난계로 61-46), 금호산(성동구 매봉18길 79) 총 5개로 나뉘었다. 세월이 흐르며 대현산과 매봉산은 각각 대현산공원과 매봉산공원으로, 배수지공원은 대현산배수지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응봉산만 전과 같이 불리고 있다. 금호산은 응봉근린공원으로 이름을 갈고 옛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성동구에 자리한 응봉근린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3호선 약수역 4번 출구로 나와 신금호역 방향으로 564m(도보 약 16분 소요)를 걸었다. 가파른 경사로가 끝도 없이 이어져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목적지에 다다를 때쯤 흰색 옹벽이 나타났다. 벽면엔 왼쪽 화살표가 그려진 안내 푯말이 두개 붙어 있었다. 두개 중 왼편에는 '금호산 가는 길', 우측에는 '남산자락숲길'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초행길인 사람은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종일 장맛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며 푹푹 찌는 습한 날씨 때문인지 산을 오르기도 전에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 버렸다. 돌계단이 설치된 응봉근린공원 입구에서 벤치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반가운 포스터를 발견했다. 옆에 있는 '반고개 쉼터에서 쉬었다 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왜 등산을 하기도 전에 휴식을 취하라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응봉근린공원 들목이 서울에서 제일 높은 등산로 입구여서 이곳에 쉼터를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쉼터 안내문에는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금호산 트래킹 시작점에서 '시작이 반'이라고 마음을 다잡으며 휴식을 즐기다 가라"는 따뜻한 말이 쓰여 있었다. 쉼터에는 선풍기, 에어컨, 원목 식탁, 기다란 소파와 의자 몇 개가 준비됐다. 그 옆에는 '약수 3080+ 대찬성!!! 로또보다 3080 재개발', '민간 재개발했음 벌써 했다. 우리 구역은 3080+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동의율 70% 달성되면 브랜드 아파트가 내꺼!' 라고 적힌 플래카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쉼터 곳곳을 휘둘러보고 응봉근린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계단과 연결된 나무데크길을 따라 천천히 산을 올랐다. 손수건과 미니 선풍기, 생수병도 무더위 앞에서는 별소용이 없었다. 손수건으로 닦아내도 땀이 금세 뚝뚝 떨어졌고, 선풍기 바람 세기를 4단계로 올려도 공기는 후텁지근하기만 했다. 생수병에 든 물은 뜨뜻미지근해 목이 말라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집에 가고픈 마음이 간절해질 때쯤 서울 용산구, 중구, 성동구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조망 명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산서울타워에서부터 시작해 국립극장, 동국대학교,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까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풍광에 취해 "그래! 이 맛에 등산하는 거지!"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연과 어우러진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은 불과 5분 전까지의 짜증 섞인 푸념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걷기 편한 '남산자락숲길' 응봉근린공원과 관련해 재밌는 사실 중 하나는 도시개발로 조각난 녹지를 하나로 이으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구는 무학봉에서부터 남산까지 연결된 '응봉친화숲길' 5.14km를 조성해 올 4월 26일 개통했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적용돼 성별, 나이,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갖췄다. 전 구간에 계단과 턱을 없애 유아차나 휠체어 사용자도 손쉽게 이용 가능하며, 숲길을 따라 걸으면 대현산, 금호산, 매봉산을 거쳐 남산까지 한번에 오를 수 있다. 구는 응봉친화숲길의 이름을 남산자락숲길로 고치고, 올 연말까지 버티고개 생태 육교와 남산을 잇는 마지막 구간을 준공할 예정이다. 남산자락숲길 전 구간이 개통되면 동쪽 신당동부터 서쪽 중림동까지 남산자락숲길, 서울로7017과 연결돼 중구를 가로지르는 보행 녹치축이 완성된다.

2024-07-30 11:14:1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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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3) 한양도성 동북쪽에 세워진 사소문 '혜화문'

"너는 사정이 어지간만 하면 한양 사대문 밖에 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중략) 그것도 힘들거든 사대문 가까운 곳에서는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보고 듣는 게 많고 기회들이 많다." '서울문화, 그 정체성을 묻다'의 저자인 송도영 한양대 교수는 "누구보다도 백성의 삶을 근심하면서 관리의 임무는 결국 민본주의임을 역설했다고 알려진 다산 정약용조차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위와 같은 편지를 보냈다"며 "지방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서울은 그렇게 애증의 복잡한 감정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책에 따르면, 조선의 서울인 한성은 전국의 인재들을 빨아들이는 도시가 됐고, '사람이 새끼를 낳거든 서울로 보내고 말이 새끼를 낳거든 제주도로 보내라'는 소름 끼칠 듯한 속담이 당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사대문과 사소문은 조선의 초대 왕 태조 이성계가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권을 과시, 외부 침입으로부터 도읍지를 보호하고자 1397년 한양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운 성문이다. ◆홍화문→혜화문, 개칭 이유는? 보슬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재 혜화문(창경궁로 307)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혜화동 로터리 방향으로 270m(도보 약 4분 소요)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혜화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공사 현장 안전 고깔이 설치됐고, 그 앞에는 접근금지 표지가 붙어 있었다. 현재 보수 중이니 북문을 이용해달라는 내용의 안내문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아담한 정자 하나와 벤치 두어개, 공중 걷기와 허리 돌리기를 위한 운동기구, 음수대 등이 마련된 쉼터가 나왔다. 정비를 위해 쉼터 이곳저곳에 빙 둘러놓은 '위험, 안전제일' 테이프는 누군가가 거칠게 잡아 뜯은 탓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화단에 버려진 하늘색 여행용 캐리어가 처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쉼터와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혜화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 성북구에는 한양도성의 동북쪽 작은 문 '동소문'이 자리한 지역이라 해 동명이 '동소문동'인 곳이 있다. 창건 당시 동소문은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렸으나, 성종 때 지은 창경궁의 동문에 같은 이름이 붙으면서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중종 6년(1511) '혜화문'으로 이름을 갈았다. ◆다락 천장에 용 대신 새긴 봉황, 왜? 혜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 구조로 정면에서는 지붕이 사다리꼴로, 측면에선 삼각형으로 보인다. 영조 때 없던 문루를 지어 올렸으나 1928년 없앴고, 홍예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1938년에 소실됐다. 혜화문은 다락이 낡고 헐었다는 이유로 왜인의 손에 의해 헐렸다. 1928년 전차가 뚫리며 사라졌고, 1939년엔 도로 확장 공사를 위해 아치 석재부 마저 없애버렸다. 지금의 혜화문은 1992~1994년 복원 공사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본래보다 북쪽에 문루와 홍예를 새로 지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다른 성문의 다락 천장에 용 그림이 새겨진 것과 달리 이곳엔 봉황이 그려졌다. 이 부근에 새로 인한 피해가 커 이를 막기 위해 새들의 왕이라고 하는 봉황으로 제압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성북구 삼선동에는 과거 '봉황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의 마을명 역시 새가 주는 피해를 막기 위해 주민들이 봉황정이라는 정자를 세운 데서 유래됐다.

2024-07-09 14:53:0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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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2) 화살이 꽂힌 벌판서 만나볼 수 있는 '송정제방공원'과 '살곶이다리'

서울 성동구에 있는 '살곶이다리'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돌다리다.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 같다고 해서 '제반교'로 일컬어지기도 했고, 살곶이다리를 한자로 바꾼 '전곶교'로도 불렸다. 과거 조선의 수도 한양과 한반도의 동남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 기능했던 살곶이다리는 청계천과 중랑천 합수부 일대 한강과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지난 17일 오후 현존하는 조선 시대 다리 가운데 가장 긴 살곶이다리를 찾았다. ◆무더위 피난처 된 '송정제방공원' 살곶이다리를 방문하기 전 먼저 들른 곳은 송정제방공원이었다. 공원에서 보는 다리의 풍광이 일품이라는 이야기에 솔깃해 두 곳을 모두 가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7호선 건대입구역 4번출구로 나와 2222번 버스를 타고 8개 정류장을 이동해 '상원' 정거장에서 내려 송정제방공원에 도착했다. 송정제방공원은 장안철교와 성동교 사이에 위치한 선형공원이다. 이날 오후 송정제방공원에서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시원한 그늘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은 벚나무, 단풍나무, 측백나무 등 수목이 울창한 공원 벤치에 가만히 앉아 사색을 즐겼다. 공원 한 귀퉁이에는 '산책로 범죄예방시스템'을 안내하는 플래카드가 길게 걸려 있었다. 산책로 범죄예방시스템은 안내문 QR(정보무늬) 코드를 스캔하고 전화번호 입력 후 영상 및 위치 전송에 동의하면 사용자의 정보가 구청 관제센터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위급시 '긴급 신고'도 가능하다. 플래카드에 적힌 '범죄 예방 모니터링 전용 PC를 통한 실시간 감시', '긴급 상황 영상 송출 또는 긴급 신고시 112, 119와 연계로 신속한 조치' 등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자연을 보며 힐링하는 휴식 공간인 공원에서도 범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가 흉흉해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선 전기에 만든 다리 중 가장 긴 '살곶이다리' 가벼운 맨몸 운동을 하는 동네 주민들을 구경하다가 송정제방공원 끝머리에 설치된 살곶이교 지하보도를 통해 다음 목적지인 살곶이다리로 이동했다.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가라'는 안내문이 지하보도와 살곶이다리 곳곳에 붙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비교적 안전하게 느껴지는 지하보도 내에선 경고문을 무시했지만, 다리를 건널 때는 자전거를 옆구리에 끼고 끌고 갔다. 원형을 최대한 살려 복원한 살곶이다리에는 별도의 안전펜스가 설치돼 있지 않다. 다리의 모양새를 보고 위험을 감지한 라이더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자전거에서 내려와 터덜터덜 걸어갔다. 살곶이다리는 조선 전기에 설치된 석조다리 중 길이가 가장 길다. 매 사냥터, 말 목장, 군대를 사열하는 장소로 쓰인 동교 일대를 살곳이들이라 해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세종 2년(1420)에 착공했으나 중간에 공사가 중단됐다. 다리는 이후 63년이 흐른 성종 14년(1483)에 준공됐다. 살곶이다리는 1925년 대홍수와 6·25 전쟁으로 일부가 손상됐고, 1970년에 보수됐다. 살곶이다리의 돌기둥은 물살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름모 모양으로 다듬었다. 고인돌 여러 개를 이어놓은 것처럼 생긴 살곶이다리를 건너 행당중학교 방면으로 걷다 보면 야외 석재 전시장이 나온다. 이곳에 전시된 귀틀석 '가-1·2', '나-1·2', '다-1·2'는 2018년 살곶이다리 원형 복원 공사를 할 때 수해로 파손돼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석재들이다. 그 외 석재는 과거 자전거 도로를 개설할 때 발견된 것들로, 재사용이 불가능해 다른 귀틀석들과 전시장에 놓이게 됐다. 보존 가치가 있는 다리의 원래 재료들을 전시해 현장 교육용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이날 오후 전시장은 온통 잡풀로 뒤덮여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귀틀석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기둥 위 멍엣돌 상단에 설치해 다리의 최상판인 청판석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부재다. 살곶이다리는 위에서부터 청판, 귀틀석, 멍엣돌, 기둥 순으로 이뤄졌다. 현재 서울 살곶이다리 야외 석재 전시장에는 수습된 ▲청판석 13개 ▲귀틀석 5개 ▲기타석 3개 ▲표석 2개가 전시돼 있다. 살곶이는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성수동 지역에 형성된 평야를 이르던 이름으로, 뚝섬이라고도 했다. 뚝섬은 둑제를 지내는 섬이란 의미를 지녔다. 둑제는 군대가 참전할 때 둑기(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로, 임금의 수레나 군대의 왼쪽에 둠)를 세우고 승전을 기원하던 제사다. 서거정은 '서울의 십 경을 노래하다'라는 뜻의 '한도십영'이라는 시 가운데 6번째인 '전교심방'에서 '살곶이는 꽃구경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야사에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자의 난 이후 고향으로 내려간 태조 이성계는 함흥 차사 박순과 무학 대사의 설득으로 이곳으로 돌아왔다. 하륜은 태종 이방원에게 천막 기둥 뒤에서 부왕께 절하라고 조언했다. 잠시 뒤 태조는 갑자기 아들에게 화살을 쐈고, 화살은 기둥에 맞았다. 이에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이 된 것을 천명으로 여기고, 그를 용서했다. 이후 이곳은 '화살 꽂힌 벌판'을 줄여서 '살꽂이 벌' 혹은 '살곶이'로 불리게 됐다.

2024-06-25 15:07:5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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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1) 조선의 역사를 만나는 곳, 서울 은평구 '화의군 이영 묘역'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는 조선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 화의군 이영 묘역이 바로 그곳이다. '서울 지명사전'에 따르면, 진관동이라는 동명은 지역 내 진관사라는 절이 있는 데서 유래했다. 고려 현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진관사의 전신인 신혈사에 숨어 있었다. 당시 작은 암자였던 신혈사에서 수도하던 진관조사라는 노승이 그를 도왔고, 왕이 된 현종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절을 새로 짓고 승려의 이름을 따 '진관사'로 명명했다. 진관사를 경계로 뒤쪽은 진관내동, 앞쪽은 진관외동으로 법정동이 나뉘어 있었으나, 2007년 진관동으로 합쳐졌다. ◆불천지위 하사받은 육종영, 화의군 이영 지난 3일 오후 은평구 진관동 산60-2번지에 자리한 화의군 이영 묘역을 방문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4번 출구 앞에서 7723번 버스를 타고 '제각말5단지·은평뉴타운도서관' 정류소에서 하차해 진관생태다리쪽으로 약 300m(도보 5분 소요)를 걸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화의군 이영 묘역의 뒤에는 북한산이, 앞에는 아파트단지가 둘러쳐졌다. 홍살문(악귀를 물리치고 액운을 쫓고자 세운 문)을 기준으로 우측에는 작은 연못이 나 있었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물레방아 모형과 장식용 석등으로 꾸며진 연못 위를 둥둥 떠다녔다.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의 능묘'에는 이곳의 홍살문이 특별한 이유가 나와 있다. 화의군 이영 묘역의 홍살문은 순조 10년(1810)에 왕명으로 불천지위(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사당에 안치하도록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의 전교와 함께 받은 것이다. 불천지위를 하사받은 왕실은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과 화의군 둘 뿐이라고. 연못의 오른편에는 화의군 신도비가 설치됐다. 거북이 형태의 비석 받침인 귀부 위에 비신(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이 세워졌다. 조선의 4대왕 세종의 여섯번째 아들인 화의군 이영은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종의 한글창제에도 참여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지내기도 했다. 홍살문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면 영절문(影節門)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이 나온다. 영절은 '큰 절개를 비춘다'는 의미로, 화의군 이영의 절개를 추모한다는 뜻이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서울의 문화재'에 의하면, 화의군 이영은 1455년 금성대군 등과 결탁해 국기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외지에 부처됐다가 이듬해 사면된 뒤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돼 전라도 금산에 안치됐다. 화의군은 정조 때 종친 중 절의가 깊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안평대군 이용 ▲금성대군 이유 ▲한남군 이어 ▲영풍군 이전 ▲하령군 이양과 함께 육종영으로 불렸다. 육종영은 단종을 위해 세조와 맞서다 죽임을 당한 6명의 종친을 가리킨다. 이날은 아쉽게도 문이 잠겨 사당을 둘러볼 순 없었다. 그 좌측엔 재실인 충경재가 건립됐다. 이곳 역시 자물쇠가 걸려 있어 내부 접근이 불가했다. ◆사망 시기 의견 분분 화의군의 묘는 묘역 맨 위에 단분 합장 형태로 안치됐다. '전기울타리 감전위험 접근금지'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붙어 있어 멀찌감치 떨어져 목을 쭉 빼고 구경했다. '서울의 문화재'에 따르면, 화의군 묘역 내엔 분묘를 중심으로 뒤쪽으로는 곡장이 둥글게 둘러졌다. 계체석을 경계로 위쪽으론 묘갈과 혼유석이, 아래쪽으론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이 좌우로 각 1기씩 배치됐다. 두 무인석의 중간엔 장명등 1기가 자리했다. 묘갈의 머리부분은 반원형으로 구름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조각됐으며, 앞면 구름무늬 한가운데엔 해를, 뒷면엔 그믐달을 새겨 넣었다. 비의 몸돌은 방형으로, 앞면에 적힌 '화의군지묘'와 뒷면에 쓰인 '융경3년4월일립'이라는 문구를 통해 묘주의 신분과 묘갈 건립 연대가 1569년임을 알 수 있다. 문인석 2기 모두 몸과 얼굴이 가느다랗고 호리호리하다. 눈을 감은 채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 쓴 관은 조선 후기 석인상에서 많이 보이는 복두가 높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화의군 이영 묘역은 16세기 중반 조성돼 선조~영조 연간의 묘제와 석물 조각 방식을 잘 보여준다"며 "비교적 원형이 제대로 보존돼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서울의 능묘'에는 세조 3년(1457)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으로 죽임을 당하고 화의군도 전라도 금산으로 귀양을 가서 사약을 받아 이곳에 처음 묻혔다고 나와 있으나,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국가유산청은 "성종대왕실록에 1489년 65세가 된 화의군이 자신의 죄에 연루돼 서민으로 사는 서자를 종실의 일원으로 거둬 달라고 상서하자 성종이 조정의 논의를 거쳐 그의 자손을 천역(賤役·천한 일을 하는 사람)에서 면해 준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금산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36세를 일기로 순절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화의군 이영 묘역의 재실을 비롯한 전체 공간은 6필지, 6만8194㎡ 규모이다. 서울시는 지난 2005년 12월 8일 이 중 265㎡ 면적에 총 10기 유적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했다.

2024-06-04 14:46:2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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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60) 정원으로 로또 맞은 광진구 '뚝섬한강공원'

'역대 최대 면적, 최다 참여...최단 기간, 최다 방문객' 서울 광진구 뚝섬한강공원에서 올해 9번째로 열린 서울정원박람회가 개최 이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유례 없는 호황을 이루고 있다. 과거 강변유원지에서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첫 도약을 이뤄낸 뚝섬한강공원은 정원으로 변신을 꾀해 제2의 도약을 맞았다. ◆뚝섬한강공원에 피어난 76개 정원 지난 16일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는 뚝섬한강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7호선 자양역 2번출구로 나오면 목적지에 닿는다. '해치 소울 프렌즈' 캐릭터로 꾸며진 '해치 웰컴 가든'이 역 앞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았다. 멍~한 무표정이 매력적인 분홍색 '해치'의 왼팔엔 강아지처럼 귀여운 '청룡'이, 머리 위에는 오리처럼 입을 쭉 내민 '주작'이 붙어 있었다. 그 곁에는 태권도복을 입은 '백호'와 목이 사슴처럼 긴 '현무'도 보였다. 뚝섬한강공원으로 소풍 온 학생들은 해치의 거대한 엉덩이에 손가락으로 'ㅇㅇ♡ㅁㅁ' 등의 낙서를 끄적이며 즐거워했다. 현재 시는 뚝섬한강공원에서 2024 서울국제정원박람회를 진행하고 있다. 6만평 뚝섬한강공원 부지 중 1만460㎡에 국내·외 정원 작가와 학생·시민·외국인, 기업·기관과 함께 만든 76개 가든을 선보인다. 올해 행사 주제는 '서울, 그린 바이브(Seoul, Green Vibe, 서울에서의 정원의 삶)'이다. 시는 서울국제정원박람회를 통해 한강 수변을 정원으로 재탄생시켜 시민들에게 강과 정원이 어우러진 여가 공간을 제공한다는 구상이다. 프레스투어를 맡은 서울시 관계자는 "많은 분들이 왜 뚝섬에서 정원박람회를 하는지 궁금해한다. 정원문화를 일상에 전파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를 고민하다가 한강공원이 시민과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생각했고, 그중 유일하게 물에 잠기지 않는 뚝섬한강공원을 개최지로 선정하게 됐다"고 밝혔다. '앉는 정원'(김영민·김영찬 作)에서는 썬캡을 쓴 어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까 먹고 있었다. 벤치 모양이 통일된 다른 정원들과 달리 의자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폭이 좁은 '1인용 벤치', 썬베드 같은 'L자 모양의 의자', 여럿이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평상형 벤치' 등 의자의 생김새가 다양한 이유는 사람마다 다른 앉는 행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이날 뚝섬한강공원에 나들이를 나온 민모 씨(80대)는 "정원의 매력은 모르는 사람과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거다"며 "지하철에서 옆사람한테 말을 걸면 이상한 사람 취급 당한다. 밖에서 만났다면 그냥 지나쳤을 사이인데 여기서는 친구가 된다"고 말했다. '여기가 과연 정원이 맞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이색 가든도 있었다. 방글라데시 작가의 '심심해지다, 명상하다, 고마워하다'라는 작품이다. 반원 형태의 나무 벽과 그 앞에 놓인 벤치가 구조물의 전부였고, 초화류도 듬성듬성 심어졌다. 최소한의 설계를 통해 심심함을 만들어 스트레스 해소를 유도한 공간이라고 한다. 평소 지나치기 쉬운 식재인 수크령 '하멜른'을 단독으로 활용해 자연과 한층 더 깊은 관계를 맺게 의도한 것이라고. 시 관계자는 "복잡하고 바쁜 현대 사회에서 이 공간 안에 들어오면 시야가 차단돼 멍을 때리게 된다"며 "의자에 앉으면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힐링할 수 있다. 풀도 일부러 단일종으로 심었다. 상설 전시 기간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다. ◆공원엔 형형색색꽃, 얼굴엔 웃음꽃 자연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게 하는 정원도 곳곳에 마련됐다. 태국 작가들이 만든 '나비효과'가 대표적인 예다. 양날개를 펄럭이며 바쁘게 움직이던 배추흰나비는 나비의 날개를 형상화한 구조물에 붙어 쉬고 있었다. 작은 정원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 지구의 탄소 발생량을 저감, 기후환경 전체를 바꿀 수 있는 나비효과를 상징하는 정원을 조성했다고. 버섯처럼 생긴 보라색 꽃으로 장식된 중국 작가의 '생물학적 자기구성형 정원'도 눈에 띄었다. 식물과 공생하며 토양에 탄소를 공급하는 점균류의 알고리즘을 모티브로 한 가든이다. 점균류의 모양을 형상화한 구조물은 곤충과 새들에게 서식처를 제공하고 노후화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로운 구조를 갖게 된다고 시는 설명했다. 작가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정원 안에 있는 그네에 앉은 푸바오를 보며 '꺄르르' 싱그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아름다운 한강뷰를 갖춘 정원은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의 '인사이드아웃 가든'이다. 각 캐릭터 색깔에 맞춰 우울이는 보라색 수국과 파란색 델피늄으로, 불안이는 주황색 나리꽃 등으로 꾸몄다. 동작구에 사는 30대 이모 씨는 "공원을 꽃으로 예쁘게 만들어 놓으니까 애기가 관심을 가져서 좋다"며 "구경할 게 너무 많아 하루 종일 놀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1일 시에 따르면, 지난 16일 개막한 서울국제정원박람회장을 찾은 누적 관람객은 20일 기준 102만2924명에 달한다. 시는 뚝섬한강공원에서 이달 22일까지 본행사를 열고, 올 10월 8일까지 상설 전시를 진행할 예정이다. 본행사 때는 가든센터(정원용품 판매)와 각종 정원문화 프로그램 부스를 설치·운영하고, 상설전시에서는 정원 관람을 중심으로 해설·교육·참여 프로그램을 곁들일 계획이라고 시는 덧붙였다.

2024-05-21 14:40:3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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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59) 채석장이던 돌산서 시민 휴식처로 재탄생한 중랑구 '용마폭포공원'

서울시 중랑구 면목4동 산1-4번지에는 '용마폭포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서울에 몇 없는 초대형 인공폭포를 볼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공원 규모는 16만7172㎡에 달하며, 이름은 아차산의 최고봉인 용마봉(용마산)에서 따왔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용마봉은 과거 용마가 나왔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봉우리가 큰 탓에 '대봉'으로도 불린다. ◆채석장, 돌산공원 거쳐 폭포공원으로 용마폭포공원은 과거 채석장으로 쓰였다. 서울시는 1961년 용마산 일대에 북부건설자재 사업소를 짓고, 27년 동안 토목공사용 골재를 채취했다. 당시엔 한적한 변두리 돌산이어서 화강암을 캐기 수월했지만, 시간이 흘러 생활권이 확장되고 지역이 부도심권으로 성장하면서 산을 깎아 돌을 들여오는 일이 어려워졌다. 분진과 소음을 일으키는 채석장이 도시 미관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1988년 골재 채취 작업이 중단됐다. 시는 산자락이 허옇게 드러난 용마산 일대 5만여평의 부지를 녹지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1990년 초 공원 조성 사업을 시작했다. 공사에는 약 50억원이 투입됐다. 시는 산이 깎여 생겨난 평지에 운동장과 잔디광장을 만들고, 놀이마당, 노인정, 정자 등을 설치해 1993년 10월 '용마돌산공원'의 문을 열었다. 용마산 일대를 서울시 자연공원으로 조성키로 한 것은 이곳이 채석장으로 사용됐을 때 주민들이 입은 분진과 소음 피해에 대한 보상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시는 설명했다. ◆스포츠 클라이밍·독서... 즐길거리 가득 지난달 29일 용마폭포공원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용마산역 2번 출구로 나와 면목현대아파트 방향으로 약 350m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공원 입구에는 제법 큰 규모의 공영주차장이 마련됐다. 주차장 앞 나들목에서는 요구르트 판매원이 아기띠를 멘 새댁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용마폭포공원은 하늘 위에서 보면 부채꼴 모양으로 생겼다. 부채꼴 꼭짓점에 위치한 인공폭포에서부터 시작해 반시계방향으로 클라이밍 경기장, 다목적광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배드민턴장, 지압보도, 체력단련장, 축구장, 어린이놀이터, 다목적체육시설, 소운동장, 황톳길, 세족장이 차례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중랑 스포츠 클라이밍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장으로 가는 길 곳곳에 파란색 안전 가림막이 설치돼 있었다. 펜스에 붙은 안내문에는 '낙석으로 인한 안전사고 발생이 우려돼 통제선 내 출입을 삼가 바란다'는 당부의 말이 적혔다.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경기장은 스포츠 클라이밍을 즐기는 시민들로 복닥거렸다. 사람들은 둘씩 짝을 지어 인공암벽을 탔다. 손목 보호대를 차고 클라이밍화를 신은 체육인들이 형형색색의 홀드(인공바위)를 잡고 천천히 인공암벽을 기어 올랐다. 클라이밍을 하다 지친 사람들은 저그 홀드 위에 왼손을 걸치고 잠시 쉬다가 허리춤에 매달린 초크백을 휘적여 손에 하얀색 가루를 묻혔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선 확보자는 등반자가 인공암벽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게 밑에서 줄을 잡아줬다. 리드벽 옆에는 스피드벽이 마련됐다. 스피드는 다른 사람과 속도 경쟁을 하는 클라이밍 종목 중 하나다. 스포츠 클라이밍 동호인들은 스파이더맨보다 빠른 속도로 인공암벽을 탔다. 악령에 빙의된 리건 맥닐이 몸을 뒤틀어 거미처럼 계단을 우다다다 내려오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 영화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클라이밍 경기장 우측에는 인공폭포가 자리했다. 시는 1997년 용마돌산공원에 높이 51.4m의 용마폭포를 만들고, 그 좌우에 21m짜리 청룡폭포와 백마폭포를 조성한 뒤 공원명을 '용마폭포공원'으로 바꿨다. 이날은 아쉽게도 폭포 가동 기간(5월 1일부터 9월 1일까지)이 아니어서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폭포수를 감상할 순 없었다. 산세를 조망한 후 맨발로 황톳길을 밟는 동네 주민들을 따라 산책길을 걷다가 라임색 버스 한 대를 발견했다. 폐버스를 활용해 만든 '책깨비 도서관'이었다. 버스 내부엔 책 읽는 공간이 마련됐다. 아이들 키 높이에 맞춰 낮게 설계된 책장들에는 '신기한 스쿨버스 키즈' 시리즈 등 어린이용 동화책과 어른들을 위한 인문교양 베스트셀러들이 꽂혀 있었다. 버스 좌석처럼 생긴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면 집중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깨비 도서관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법정 공휴일(일요일 제외)과 12~2월 혹한기에는 휴관한다.

2024-05-07 14:29:5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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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58) 한국인의 생활상 엿볼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

서울 광화문 경복궁을 지나다보면 탑처럼 생긴 좁고 뾰족한 건물을 볼 수 있다. 층고가 낮은 전각과 정전들 사이에서 나홀로 위로 높게 솟은 이 건축물의 정체는 '국립민속박물관 본관'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한국인의 생활문화를 연구·전시하고 교육·보존하는 공간으로, 지난 1946년 남산 시정기념관에 '국립민족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개칭과 이전을 거친 국립민속박물관은 1993년 현 건물로 터를 옮겨 개관했다. 국립민속박물관 본관 건물은 1966년 '국립종합박물관 설계경기' 공모 특선 당선작이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였고,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이 옮겨와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한국인의 생활문화 한 눈에 지난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로 37에 자리한 국립민속박물관을 방문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와 경복궁 방향으로 884m(도보 15분 소요)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하늘 위에서 보면 호리병 모양으로 생겼다. 병 주둥이 부분에 돌탑과 장승, 효자각이 있다. 그 아래에 전통문화배움터, 연자방아, 물레방아, 오촌댁, 제수합이 위치했다. 병의 바닥부분에는 7080 추억의 거리, 놀이마당, 어린이박물관, 본관, 앞마당, 십이지신상이 들어서 있다. 가장 먼저 이색적인 풍광을 뽐내는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 정면 계단은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를, 건물 중앙은 법주사 팔상전을, 오른쪽은 금산사 미륵전을, 왼쪽은 화엄사 각황전을 본떠 디자인해서 그런지 건축물 외관이 묘하게 조립식 로봇 같은 인상을 풍겼다. 본관에는 한국인의 오늘, 일 년, 일생을 다룬 3개의 상설전시관과 2개의 기획전시실이 마련됐다. '한국인의 오늘' 전시관에는 '쓸모 있는', '자연스러운', '함께 하는'을 주제로 한 것들이 전시됐다. 쓸모 있는 물건들로는 지게와 호미, 자연스러운 것들로는 달항아리, 원반과 찻잔, 함께 하는 일들로는 한강 둔치에서 보내는 여유로운 시간 등을 소개하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인의 일 년'은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한국인의 1년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로,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풀이되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됐다. 유령선처럼 생긴 모형 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짚으로 만들어진 배 위에는 사과 등의 과일이 올려져 있었다. 돛과 배의 앞뒤를 연결한 실에는 흰색 천으로 만든 꼬마 귀신 인형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기괴한 모습을 연출했다. 이것은 제주도에서 의례용 배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섬사람들은 해녀와 어민의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영등굿의 마지막에 제물을 실은 배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배방선'이 마을의 나쁜 기운을 먼 곳으로 가져간다고 여겼다고. '한국인의 일생' 전시관에는 조선시대에서 현대까지 한국인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게되는 주요 과정이 그려졌다. 수많은 전시물 중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쓴 편지가 가장 재밌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며느리를 위해 시아버지 이중하가 며느리 동래 정씨에게 보낸 서간에는 "순산 후에 국밥은 잘 먹고 있으며, 아이도 장수하게 생겼느냐? 섭섭해하지 마라. 어찌 번번이 아들을 낳겠느냐?"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이 적혀 있었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아들 둘을 낳으면 '목메달', 딸·아들은 '은메달', 딸 둘은 '금메달'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여아선호 사상이 강해진 것이 흥미로웠다. ◆옛 마을, 근·현대 거리 되살린 야외전시장 본관 실내 전시를 둘러본 후 야외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970~1980년대 거리를 재현한 '7080 추억의 거리'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LP판으로 벽을 장식한 뮤직 박스가 있는 찻집 '약속다방', 친구·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바로 출력해 가져갈 수 있는 체험형 사진관 '서울사장' 등이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파스텔톤의 고운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문관 형상의 무덤을 지키는 석물 '문인석'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동네 입구에 세워놓는 장승 등이 잔뜩 세워진 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며 즐거워했다. 이외에도 야외전시장에는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있던 남씨 집안의 가옥 '오촌댁', 통일신라 성덕왕릉 호석의 십이지를 본 따 만든 '12지신상' 등이 전시돼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관람 시간은 3~10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이며, 동절기에는 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연다. 관람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해야 하며, 매년 1월 1일과 설, 추석에는 휴관한다.

2024-04-16 15:23:2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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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57) 조선의 마지막 국모와 고종의 손자 잠든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동대문구에는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잠든 '영휘원'과 영친왕의 첫째 아들인 이진 원손이 묻힌 '숭인원'이 자리해 있다. 영휘원과 숭인원의 묘역 규모는 5만5015㎡이며, 지난 1991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당초 이곳에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 민씨의 능인 '홍릉'이 위치해 있었다. 명성황후의 묘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로 옮겨졌고, 영휘원과 숭인원의 주소명(동대문구 홍릉로90)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생후 8개월 만에 숨을 거둔 비운의 왕세손 지난 17일 오후 사적 제361호인 영휘원과 숭인원을 방문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서 하차해 2번 출구로 나와 국립산림과학원 방향으로 약 1km(도보 15분 소요)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1000원을 주고 표를 구매한 뒤 입장해 숭인원으로 향했다. 숭인원은 의민황태자(영친왕)와 의민황태자비 이씨(방자)의 첫째 아들인 이진의 무덤이다. 이진은 1921년 8월 18일 일본에서 태어났다. 순종은 '어떤 운명이나 역경 속에서도 밝고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를 담아 원손에게 '진(晋)'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922년 4월 부모와 귀국한 이진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인 5월 10일 밤부터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고, 다음날 세상을 떴다. 순종 황제는 생후 8개월 만에 숨진 이진의 죽음을 슬퍼하며 후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명했다. 조선시대에는 어린아이가 부모보다 먼저 사망하면 장례를 치르지 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순종의 배려로 1922년 5월 17일 장례식을 거행했다. 숭인원 역시 순종 황제의 명으로 특별히 원으로 조성됐다. 원(園)은 왕의 사친과 왕세자, 왕세자빈, 황태자, 황태자비 등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숭인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붉은 기둥의 문이다. 홍살문 앞으로는 향로가 곧게 뻗어 있었다.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향로는 제향 때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로 사용된다. 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물은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정자각이다. 정전과 배위청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모양이 '丁'자를 닮아 정자각으로 불린다. 정자각 우측엔 비각이 설치됐다. 무덤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표석엔 '원손 숭인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안타깝게도 비석 뒷면은 비문이 갈려 나가 과거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알 수 없었다. 원손의 무덤을 가운데 두고 삼면으로 담장이 둘러졌으며, 봉분 주위에는 ▲석마(말의 형상을 조각한 돌) ▲장명등(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히는 석등) ▲문석인(관복을 입고 원의 주인을 보좌하는 인물상) ▲망주석(봉분 좌·우측에 설치된 한 쌍의 기둥) ▲혼유석(혼령이 노니는 곳) ▲석호(원을 수호하기 위해 봉분 주위에 배치하는 돌로 만든 호랑이) 등이 세워졌다. ◆조선의 마지막 국모 순헌황귀비 모신 '영휘원' 숭인원을 둘러본 뒤 어정(임금에게 올릴 물을 긷는 우물)을 지나 영휘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덤의 주인은 순헌황귀비 엄씨다. 순헌황귀비는 광무 1년(1897)에 영친왕을 낳았고, 6년 뒤 황귀비로 책봉됐다. 신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 양정의숙과 진명 여학교, 숙명 여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영휘원과 숭인원은 비슷하면서도 달라 두 무덤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묘역의 규모다. 영휘원이 숭인원보다 훨씬 컸다. 숭인원에는 정자각 앞으로 향로만 나 있지만, 영휘원의 홍살문 뒤로는 향로와 어로가 함께 만들어졌다. 영휘원과 숭인원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세워졌다. 숭인원에는 영휘원 원침에 둘러진 호석(둘레돌)과 석양(무덤 앞에 세운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이 생략됐다. 영휘원 좌측에는 순헌황귀비의 재실이 마련됐다. 재실은 선대 봉사를 위해 제사 전에 모여 목욕재계하고 준비하는 의례용 건물이다. 실내화를 신고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봤다. 마루 한켠을 차지한 검박한 1단짜리 나무 책꽂이에는 '왕릉 가는 길', '광릉 산림생태 조사 연구', '우리나라 전통 무늬 나전·화각' 등의 책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그 앞에는 책 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작은 소반 하나가 놓였다. 아쉽게도 볼거리는 이게 전부였다. 재실 내부는 물건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한옥의 창호에 붙은 창호지에 구멍이 나 위에 한지를 덧바른 자국이 곳곳에 보이는 것과 누군가 벽 한 귀퉁이에 매직으로 적어 놓은 '14'라는 숫자 외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영휘원과 숭인원의 관람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일이라 문을 열지 않는다.

2024-03-19 14:41:20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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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56) 길 따라 멋 따라 걷는 공간 '성북천 산책로'

성북천은 서울 성북구 북악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청계천과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지명유래집'에 의하면, 이 물줄기는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던 탓에 '성북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과거 성북천을 따라 내려가면 편히 앉아 쉴 만한 큰 바위가 있었다. '앉일바위'라고 불렀으며, 이를 한자로 옮겨 '안암(安岩)'이라 했다. 성북천의 또 다른 이름인 '안암천'의 유래가 여기에서 비롯됐다.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서울의 하천'에 따르면, 조선시대 혜화문 밖 왼쪽 일대에 성북천이 흘러 계곡과 언덕을 끼고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복숭아를 재배해 도성에 팔며 생계를 이어 갔고, 매년 봄 성북천 일대는 복숭아꽃을 구경하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든 상춘객으로 북적였다. 계곡이 깊고 지형이 험해 도둑들이 많이 숨어 있는 장소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사람 사는 냄새나는 정겨운 마을 지난 4일 동대문구 신설동 안암2교부터 성북구 동소문동2가 분수마루광장까지 성북천 산책로 2.6km 구간을 걸었다. 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 2번 출구로 나와 대광초등학교 방면으로 543m(도보로 약 9분 소요)를 이동해 성북천 산책로에 도착했다. 이날 안암2교 다리 밑에선 백로 한 마리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성북천을 찾은 시민들은 하얀 몸통에 S자 목, 멋들어진 장식깃을 가진 백로를 핸드폰 카메라에 담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백로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우아하게 사뿐사뿐 걷다가 먹이가 몰려 있을 것 같은 돌무더기가 나오면 나뭇가지 같은 발로 틈새를 퍽퍽퍽퍽 쳐댔다. 이어 송곳처럼 날카로운 부리로 하천 바닥으로 훑은 뒤 먹이 사냥이 끝나면 물 밖으로 머리를 쑥 빼냈다. '저 지저분한 물에 뭐가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는데 놀랍게도 백로의 부리엔 새끼손가락만 한 물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하얀 새가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자 부리에 가로로 물려 있던 물고기가 목쪽으로 쏙 들어갔다. 목 안으로 고기가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눈 앞에서 생중계되자 사람들은 '와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백로의 목 안에서 살려고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물고기의 모습은 어렸을 적 동화책 '어린왕자'에서 봤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과 꼭 닮아 있었다. 성북천 산책로는 다른 하천 둘레길과 달리 조금 특별하다. 곳곳에 마을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보문1교 다리 밑은 주민자치회의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들로 꾸며졌다. 김장 나눔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김치를 담그는 새마을부녀회, 빗자루로 빗물받이를 깨끗이 청소하는 자율방재단, 집게로 쓰레기를 주워담는 바르게살기위원회 소속 주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문2교 인근 담벼락에는 동네 꼬마들이 직접 그린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아이들은 놀이터, 빵집, 아파트, 상가와 같이 매일 일상적으로 오가는 장소들뿐만 아니라, 사회복지관, 음향신호기가 설치된 시각장애인을 위한 신호등까지 마을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살펴 작품에 표현해냈다. ◆3·1 만세운동부터 4·19 혁명까지…역사의 흔적 곳곳에 성북천 산책길 담장엔 1919년 성북구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의 전개 과정도 새겨졌다. 1919년 3월 24일 성북동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이틀 뒤 오전 3~6시 신설리(현 보문동)에 살포된 '광고'라는 제목의 격문 아래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근처 여러 동리 사람들은 진정 불쌍하고 가엾도다. 너희 동리는 국가도 모르고 벙어리도 아닌 바에는 어찌 대한제국 독립 만세를 부를 줄 모르는가?" 3월 26일 밤 신설리의 안감천 일대에 군중 200여명이 만세운동을 하며 전차에 돌을 던졌다. 그 다음날인 3월 27일엔 전날의 두 배 이상인 약 500명이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철길을 가로지르는 전차의 유리창에 성난 표정으로 돌을 던지며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벼락에 그려졌다. 이날 성북천 산책로엔 3·1 만세운동과 함께 4·19 혁명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보문동에 살며 한성여중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진영숙은 1960년 4·19 혁명 당시 어머니께 편지 하나를 남기고 거리로 나갔다. 진영숙이 시위 버스에서 구호를 외치다 미아리 고개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면서 편지는 곧 유서가 됐다. 그녀가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지금 저와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중략)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2024-03-05 15:04:0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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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155) 조선시대 수도방어시설 종로구 '홍지문·탕춘대성'

조선시대 수도 방어를 위해 세운 성곽과 성문이라고 하면 한양도성과 사대문, 사소문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종로구 홍지동에 이 같은 방위 시설이 더 있다. 서울 도성의 방어 체계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대 대홍수로 무너져 반세기 넘게 방치돼왔던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1970년대 복원을 통해 되살아났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잇는 성곽, '탕춘대성'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 세운 성인 탕춘대성은 숙종 45년(1719년) 조성됐다. 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 사각지대인 지형에 맞게 두 성 사이를 이어 성벽을 만든 일종의 관문 성이다. 성곽 둘레는 약 4km 정도이며, 성 안에는 무술을 연마하는 연무장인 연융대와 함께 군량 창고 등이 갖춰졌다. 성벽에서는 크기가 고른 정방형의 돌을 반듯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의 당시 축성 기법을 엿볼 수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18일 오후 탕춘대성과 홍지문을 찾았다. 지하철 3호선 홍제역 1번 출구로 나와 '서대문08'번 마을버스를 타고 7개 정류장을 이동해 홍지문·옥천암 정거장에서 하차, 세검정삼거리 방향으로 268m(도보 4분 소요)를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북악산, 인왕산, 백련산, 북한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풍광이 빼어나다. 그래서인지 이날 홍지문 일대에서는 대포 카메라나 고프로와 같은 전문 촬영 장비를 들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탕춘'은 '봄을 즐긴다'는 의미다. 연산군은 1506년 이 일대에 탕춘대라는 누대를 세우고 연회를 즐겼다. 서울역사편찬원에 따르면, 숙종 41년(1715년)에 북한산성과 평창을 수호하기 위해 성을 쌓고 탕춘대의 이름을 따서 '탕춘대성'이라고 했다. 영조는 1751년 탕춘대에 거둥해 활쏘기로 무사를 뽑았고, 1753년 탕춘중성을 새롭게 축조했으며, 그 이듬해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군대를 훈련하던 곳)를 만들었다. 과거 종로구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위 길가에는 크기가 사방으로 9척가량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영조는 소공동에 사는 홍상서에게 '금성탕지(金城湯池)'를 이어 나가게 하려는 뜻으로 이 바위에 '연융대(鍊戎臺)' 석 자를 새겼다. 금성탕지는 쇠처럼 단단한 성곽과 끓는 못에 둘러싸인 성이란 뜻으로, 방비가 빈틈없이 견고하다는 말이다. 연융대바위는 1972년 세검정길을 넓힐 때 파괴됐고, 탕춘대는 잡풀이 우거진 야트막한 돌산 앞에 그 터만 남았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문,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과 함께 지어진 성문이다. 홍예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문루를 짓고, 그 위에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홍지문은 한성의 북쪽에 있다 해 '한북문'으로도 불렸다.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해 공식적인 명칭이 홍지문이 됐다. 홍지문 옆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인 홍예교가 설치됐다. 본래 이름은 오간대수문이다. 성문에 잇대 성벽을 연결시킨 오간수문은 홍예 5칸을 틀어 수구(물을 흘려 내보내는 곳)로 썼다. 안타깝게도 이날 오후 홍지문 문루에 올라 서울의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이뤄진 자연 병풍을 감상하거나, 홍예교와 이어진 탕춘대성의 성곽 둘레길을 거닐 순 없었다. 굳게 닫힌 철문 앞에는 '접근금지' 푯말과 함께 '적외선 탐지기 작동 중 경고음 주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지금의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1921년 대홍수로 붕괴된 것을 현대에 와서 새로 지은 것이다. 서울시는 1976년 8월 18일 문화재 복원 공사를 시작해 1977년 준공했다. 시는 총 2억6000만원을 들여 홍지문 문루와 일각문, 오간수문 석축 수문, 탕춘대성 3000m 중 200m를 복원했다. 조선시대 때 지어진 것이라 붕괴가 우려돼 안전상 문제로 조심히 다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최근 만든 복제 문화재에 일반의 접근을 막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시대 사람들과 유리돼 섬처럼 떨어진 문화재를 진정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대의 것이나 후손들은 접근 불가한 '그림의 떡'이라는 측면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요원해 보인다.

2024-02-20 15:11:50 김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