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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너 > 되살아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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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94) 터키와 우정을 상징하는 녹지 쉼터, 서울 영등포구 '자매공원(앙카라공원)'

지난 9일 한 시민이 자매공원(앙카라공원)에서 산책하고 있다./ 김현정 기자 추운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몸의 열 손실을 막기 위해 '앙고라' 소재의 니트를 입곤 한다. 앙고라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의 옛 이름이다. 서울 여의도 남서쪽에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의 이름을 딴 공원이 있다. 도시명은 기원전 2000년경 이 지역에 생긴 히타이트인의 신전 '안쿠와스'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고, 기원전 10세기경 이곳에서 닻이 발견됨에 따라 그리스어로 닻을 의미하는 '앙퀴라'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터키의 수도명은 '앙키라', '앙고라', '앙기라' 등으로 불리다가 1923년 앙카라로 바뀌었다. ◆서울에 앙카라공원이 생긴 까닭은? 9일 오후 어르신들이 자매공원(앙카라공원)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현정 기자 서울시는 1971년 8월 23일 터키 앙카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기술·경제·행정·문화 등의 분야에 걸친 교류를 갖기로 약속했다. 양 도시의 자매결연 협정에 따라 앙카라시는 터키에 '코리아 코너'라는 한국 공원을 만들고 이곳에 한국전쟁 때 전사한 터키 장병들의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터키는 6·25 때 일 년 주기로 5400명(보병 여단1)의 군인을 교대 파병, 3506명의 사상자 중 741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우방국이다. 서울시는 한국 공원 조성에 7000달러를 보태고, 터키 공원 설치를 검토하기로 했다. 이달 9일 오후 한 시민이 자매공원(앙카라공원)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김현정 기자 약 2년 뒤인 1973년 10월 29일 터키 앙카라시에 한국 공원이 개원했다. 3000평 규모의 공원엔 6·25참전 기념탑을 비롯해 녹지대 등이 만들어졌다. 이후 서울시는 1977년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1만6458㎡ 크기의 앙카라공원(자매공원)을 조성했다. 당시 시는 자매결연 도시를 상징하는 공원을 하나씩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앙카라 공원이 그 첫 사례였다고 한다. 지난 9일 오후 앙카라공원(자매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9호선 샛강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두 명의 여인이 하늘을 향해 한쪽 손을 높이 뻗고 있는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이날 공원 입구에서 조각상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던 대학생 심모(23) 씨는 "작품명(환희)만 보면 조각들이 환희에 찬 얼굴로 방실방실 웃고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가까이서 관찰하면 둘 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서 "각각 책과 두루마기 문서를 들고 있는데 '지혜를 깨우치게 돼 환희를 느끼게 됐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공원 곳곳에 조각상들이 놓여 보는 재미가 있었다"며 "코로나로 미술관 가기 힘든 시기, 이런 야외 전시로 문화 향유 기회를 넓혔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달 9일 자매공원(앙카라공원) 안에 조성된 '터키 전통포도원 주택'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김현정 기자 앙카라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터키의 전통 포도원 주택을 재현해 놓은 앙카라 하우스다. 서울시와 앙카라시는 상호 우호 증진을 도모하고자 1995년 앙카라공원 내에 터키 박물관 형식의 '앙카라 하우스'를 설치했다. 건물은 연면적 51평, 2층으로 규모로 세워졌다. 시는 터키 전통 포도원 주택 내부를 앙카라시가 기증한 민속 예술품으로 꾸몄다. 앙카라 하우스엔 전통 생활용품과 농기구, 16세기 오스만 튀르크 시대의 전통 의상, 여성용 수제 은거울 등이 전시됐다고 하는데 이날은 코로나19 확산 차단을 위한 방역 조치의 일환으로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공원을 가꾸는 '보이지 않는 손' 이달 9일 자매공원(앙카라공원)에서 인부들이 바닥 돌 틈 사이로 자라난 잡초를 뽑아내고 있다./ 김현정 기자 터키 전통 포도원 주택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쉬워 앞을 서성이다가 공원을 가꾸고 있던 사람들을 목격하게 됐다. 공원을 관리하는 인부들은 머리엔 햇빛을 차단하는 거대한 차양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목에는 땀을 닦는 손수건을 둘렀다. 이들은 허리에 칭칭 동여맨 작은 의자에 몸을 의지해 바닥 돌 틈 사이로 자라난 잡초들을 하나씩 직접 뽑아내고 있었다. 9일 오후 공원을 방문한 동네주민 김모(54) 씨는 "야행성이라 밤에만 공원에 나와 낮에 이렇게 사람들이 공원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는지 몰랐다"면서 "시민 의식이 높아져 공원에 쓰레기가 없어 깔끔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쓸고 닦고 한 결과였다. 노고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현정기자 hjk1@metroseoul.co.kr

2021-08-10 14:25:0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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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93) 허브향으로 잠자는 후각 깨우는 강동구 '허브천문공원'

서울 강동구 둔촌동 일자산 기슭에는 2만5500㎡ 규모로 조성된 '허브천문공원'이 자리해 있다. 강동구는 15억원을 투입해 길동배수지 상부에 167여종 4만1586본의 허브를 심은 공원을 만들어 지난 2006년 9월 개원했다. 어쩌다 '허브'와 '천문'이라는 이질적인 두 대상을 하나로 묶은 공원이 탄생하게 된 걸까? 구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사상인 삼재사상에서 공간개념을 가져와 우주공간(자미원, 태미원, 천시원, 별자리, 은하수)을 공원에 나타냈고, 음양오행사상에 기초해 시설물과 수목을 뒀다고 했다. 공원 동쪽에는 소나무·버드나무·복숭아나무를, 서쪽엔 느릅나무를, 남쪽에는 오동나무·매화나무·대추나무를, 북쪽엔 측백나무·벚나무·살구나무·자작나무를 식재해 풍수지리사상의 사신사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우주의 순환원리 중 상생원리에 맞는 수목배치를 통해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했다는 게 당시 구의 설명이다. ◆향기로운 허브 가득한 공원 지난 26일 오후 강동구에 위치한 허브천문공원을 방문했다. 지하철 9호선 중앙보훈병원역 3번 출구로 나와 2312번 버스를 타고 길동자연생태공원 정거장에서 내려 약 300m(6분 소요)를 걸었더니 '일자산 허브-천문 공원'이라는 은색 푯말이 보였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시각, 청각, 후각이 깨어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눈을 즐겁게 했고, 진한 허브향이 코를 자극했으며, '맴, 맴, 찌르르르' 매미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허브천문공원에서 만난 주부 이모 씨는 "코로나가 심해서 애를 데리고 어린이집에도 키즈카페에도 갈 수 없어서 사람 없는 곳을 찾다가 이곳에 오게 됐다"면서 "애가 날이 더우면 짜증을 내서 힘들었는데 오늘은 공원에 와서 신이 났는지 투정도 안 부리고 잘 놀아서 다행이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이름도 생소한 꽃들을 볼 수 있어 좋다"면서 "허브향 덕에 코로나로 둔해진 후각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이날 공원을 찾은 시민들은 허브향을 맡으며 코로나로 지친 심신을 달랬다. 허브천문공원에서는 손톱만 한 보라색 꽃이 다닥다닥 붙은 블루세이지,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합쳐놓은 듯한 에키네시아 샤이엔스피릿, 화난 복어처럼 생긴 차이브, 방패 모양의 잎사귀를 가진 나스터티움 등 각양각색의 허브가 저마다의 향을 뽐내며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뙤약볕 피할 그늘 부족 공원엔 통나무집처럼 생긴 목조건축물 티 하우스도 마련돼 있었는데 더워서인지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이곳에서는 나무가 뿜어내는 열기로 인해 찜질방에 온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도 굵은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작열하는 태양 빛은 사람도, 식물도 지치게 했다. 산미나리로 불리는 회향은 불에 그을린 듯 새카맣게 탔고, 우단담배풀은 무름병으로 썩어 잎이 누렇게 변해버렸다. 송파구 방이동에서 온 최모 씨는 "식물이 다양하게 많고 조경을 잘 해놔서 바라만 봐도 힐링된다"며 "집 근처에도 31개월짜리 아이와 함께 갈만한 이런 공원이 생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무가 우거진 그늘이 없어 땡볕이 그대로 내리쬐는데 공원에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파라솔 몇 개를 설치해놨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날 허브천문공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은 전망데크였다. 이 공간은 철제 구조물 대신 유리로 안전막을 설치해 풍경을 해치지 않도록 디자인됐다. 나무데크에서 길동 쪽을 바라보면 자연이 그려낸 녹음이 푸른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2021-07-27 14:20:5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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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92) 수돗물 저장소 위에 조성된 '대현산배수지공원'

네이버에서 '배수지'를 검색해보면 2010년 걸그룹 miss A로 데뷔한 연예인 '수지'가 뜬다. 서울 성동구 금호동1가에는 배수지 위에 만들어진 공원이 있다. '대현산배수지공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배수지'는 배수구역의 수요량에 맞춰 적절하게 급수하기 위해 정수된 깨끗한 물을 일시적으로 모아두는 저류지를 의미한다. 급수량을 조절하면서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상수도 시설 중 하나로, 정수장과 가정용 수도꼭지 사이에 있는 '수돗물 저장탱크'라고 생각하면 쉽다. 정전이나 공사로 인한 단수 사태를 막는 기능을 한다. 수돗물을 여러 지역에 안정적으로 나눠 보내기 위해 언덕과 같은 높은 지대에 설치한다. ◆배수지 위에 공원 만든 이유는? 지난 12일 개원 19년차를 맞은 대현산배수지공원을 방문했다. 공원은 5호선 신금호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약 200m(3분)를 걸으면 나온다. 초록색 우레탄길과 회색 콘크리트길 두 갈래로 길이 났는데 한방향 걷기를 유도하기 위해 모두 우측통행을 하도록 바닥에 화살표로 표시해놨다. 폭염주의보가 발령된 터라 햇볕이 따가웠는데도 이날 오후 대현산배수지 공원은 콧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동네주민 이모(70)씨는 "여기가 근처에 갈만한 곳 중 제일 시원한 데라 왔는데 사람이 많고 날도 더워 집보다 더 뜨거운 것 같다"며 "날을 영 잘못 잡았다"고 투덜댔다. 이 씨는 "그래도 집 근처에 이렇게 큰 공원이 있는 게 참 복이다. 내 친구는 가까운데 공원도 없고 해서 노인정 다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못가게 돼 요새 영 기운 없어 한다"면서 "아니 공원 둘 땅이 없으면 이렇게 배수지 위 같은데 지어놓으면 될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는 어쩌다 배수지 위에 공원을 만들게 된 걸까? 이는 종합토지세(전국의 토지를 소유자별로 합산해 누진과세하는 지방세) 시행으로 세금을 감당못해 문을 닫는 체육시설이 늘자 서울시가 생활체육시설을 확충하기 위해 짜낸 묘안이다. 1990년대 초 서울시는 생활체육시설을 늘리기 위해 상수도 배수지 상부에 운동기구를 갖춘 시민체육공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 시는 식수원의 오염을 우려해 배수지 지상을 일반에 개방하지 않아왔다. 그러나 1990년 5월 우장산 배수지 위를 공원으로 가꾸는 시범 사업을 벌인 결과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 모든 배수지 상부에 시민들을 위한 녹지 공간을 조성키로 한 것이다. 대현산배수지공원 건립이 가시화 된 것은 이로부터 7년 뒤의 일이다. 서울시는 1997년 8월 관내에 대형 배수지 4곳(▲성동구 금호동1가 대현산배수지 ▲동작구 본동 노량진저구배수지 ▲서초구 반포동 서리풀근린공원 내 반포배수지 ▲서초구 방배동 우면산 자연공원 내 방배저수지)을 새롭게 지어 54만가구에 수돗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배수지 상부엔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을 위한 휴식처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당시 시는 1908년 지어진 탓에 저수용량이 5만8500t에 불과했던 대현산배수지를 헐고 20만t 규모로 새로 만들기로 했다. 시는 1998년 5월 착공에 들어가 2002년 10월 마포·성동·성북·용산·종로·중구 6개구 27만2000가구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대현산배수지를 완공하고, 이듬해 5월 공원을 개원했다. ◆동네 사랑방 역할 톡톡히 하는 공원 지난 12일 오후 공원은 거리두기 4단계 적용 첫날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부모 품에 안긴 갓난아기부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노인들이 눈에 띄었다. 슬쩍 옆에 다가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어봤다. 꽃무늬 모자를 푹 눌러쓴 할머니는 "나는 나오면서 어제 삼계탕 못해먹은거 해먹고 나왔잖아"라고 운을 뗐다. 그 옆에 있던 선글라스 낀 노인이 "뭐 넣어 먹는데?"라고 묻자 "닭 한마리 넣어서 마늘 많이 넣고, 생강 넣고, 삼 넣고. 너무 많이 넣으면 맛없어"라고 답했다. 그러자 손부채질을 하며 이들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다른 할머니가 "아니야, 뭘 좀 넣어야 삼계탕이 맛있어져"라면서 "TV에 나온대로 녹두, 찹쌀, 밤, 대추랑 양파 한쪽, 대파를 반 뚝 잘라 넣었더니 담백하니 맛있었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서로 자신의 삼계탕 조리법이 최고라며 아웅다웅 다퉜는데 그 모습이 퍽 귀여워보였다. 공원 중앙 잔디광장에서는 어린이들이 나비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꼬마들의 얼굴은 햇볕에 시꺼멓게 탔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들의 손엔 형광색 잠자리채와 플라스틱 곤충 채집함이 들려 있었다. 아이들은 "여기 나비있다", "호랑나비는 내가 잡을 거야", "우와 잠자리다"를 외쳐대며 공원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다. 30분째 별다른 소득이 없자 아이들은 벤치에 앉아 있는 주민들에게 다가와서는 '잠자리 잡아 주세요', '노란 나비 잡아주세요'라며 어려운 부탁을 거리낌없이 해댔다. 어른들은 난처해하다가도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잠자리채를 들고 곤충 재집에 나섰다. 그늘에서 자녀들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던 한 학부모는 "그래, 아이들은 이렇게 밖에서 뛰어 놀아야지"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2021-07-13 14:27:32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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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91) 만년필 공장 부지서 강동의 센트럴파크로 재탄생한 '천호공원'

서울 강동구에는 강호동 아닌 천호동이 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펴낸 서울지명사전에 의하면 동명은 민가 수 천호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유래했다. 서울시는 1996년 8월 개발시대 논리에서 탈피해 시민 삶의 질을 제고하고자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공장 이적지 ▲난지도 매립지 ▲시립영등포병원 이적지 ▲낙산시민아파트 철거 부지 ▲압구정역 주변 부지 ▲미개설 학교용지 등을 녹지로 가꾸는 내용이 담겼다. 천호공원은 오염이 심한 준공업지역을 공원으로 되살리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당시 시는 OB맥주·파이롯트·삼익악기·전매청창고 4개공장 이전지 공원화에 2019억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천호동공원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천호동 파이롯트 공장 이전 부지를 서울시가 648억원을 주고 매입해 만든 8076평 규모의 녹색쉼터다. 1997년 10월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6월 개원했다. 서울시가 사유지인 공장 터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한 첫 사례였다. 공원 이름은 인근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선생의 호를 딴 '해공공원'이나 동명을 붙인 '천호공원' 중 지명위원회 결정에 따라 최종 확정할 예정이었으나 개장할 때에는 두 안이 모두 폐기되고 '천호동공원'으로 이름 지어졌다. 현재에 와서는 과거 후보군이었던 두 이름이 모두 사용되고 있다. 2003년 1월 공원명이 '천호동공원'에서 '천호공원'으로 바뀌었고, 공원 내 2008년 생긴 강동 구립 도서관은 '해공도서관'으로 불리게 됐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온 셈이다. ◆영유아부터 노인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원 지난 28일 오후 강동 지역 명소인 천호공원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천호역 3번 출구로 나와 약 11분(610m)을 걸었더니 공원 입구가 나왔다. 바로 앞에 한약방이 있어 당귀, 지황, 천궁 같은 약재들의 냄새가 뒤섞여 흘러나왔는데 맡기만 해도 건강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천호공원은 제주도와 비슷한 섬모양으로 생겼다. 공원 가운데 자리한 야외무대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길이 나 있다. 1시방향 맨발광장을 시작으로 분수대, 어린이숲체험마당, 지압보도, 농구장 등이 반시계방향으로 들어섰다. 진분홍색 우레탄 트랙이 깔린 푹신한 오솔길을 따라 공원 둘레를 한 바퀴 걸었다. 천호공원에서 만난 주부 이모(36) 씨는 "아줌마들끼리는 이곳을 천호의 센트럴파크라고 부른다"면서 "길에 턱이 없어 유모차 끌고 다니기 편해 엄마들이 아기들 데리고 많이 온다"며 활짝 웃었다. 이날 오후 유모차를 탄 영유아뿐만 아니라 휠체어에 탑승한 장애인과 유아 킥보드를 타고 달리는 어린이들이 천호공원 곳곳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녔다. 통, 통, 통 공 튀기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젊은이들은 공원 한켠에 마련된 농구코트에서 열정을 불태웠다. 골대 하나를 붙잡고 20번 넘게 슛 연습을 하는 중학생과 4명이서 팀을 이뤄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는 청소년들을 볼 수 있었다. 대학생 박모(25) 씨는 "천호공원에 동농(동네농구) 고수가 많아 소싯적에 그분들께 농구를 참 많이 배웠다"며 "사람들이랑 새벽까지 농구하고 그래서 제가 친구들 중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고 자랑했다. 박 씨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펜스가 사방으로 쳐져있지 않은 것"이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공에 맞을까봐 걱정되는데 왜 한쪽에만 철망을 설치해놨는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오후 5시가 되자 공원에 상투스가 울려 퍼졌다. 음악분수에서 나온 소리였다. 노인들은 분수쇼가 가장 잘 보이는 명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손뼉을 치며 음악을 감상했다. 이달 28일 공원을 방문한 김모(72) 할아버지는 "천호공원은 나 같은 늙은이들이 많아 오기 참 편하다. 마치 노천 노인정 같다"며 "삼시세끼 집에서 밥 얻어먹는 게 눈치 보여 낮에는 밖에 나와 있는데 여기만 한 데가 없다"고 털어놨다. ◆음주 후 고성방가·거리두기 무시··· 공원 에티켓 실종 공원을 돌아다니다가 잠시 쉴 겸해서 야외무대가 있는 광장 벤치에 앉았다. 휴식을 취하던 쉼터 근처에서 노인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러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동네 주민 윤모(45) 씨는 "저 할아버지처럼 술 취해 고성방가하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꼭 한명씩 있다"면서 "어르신이 많이 와서인지 진상도 대부분 노인"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윤 씨는 "뭐 와서 놀고 하는 건 좋은데 장기 둘 때 5명 이상 몰려있는 걸 자주 봤다"면서 "코로나 퍼질까 봐 걱정되는데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2021-06-29 14:30:5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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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90) 여름나기 딱 좋은 도심 하천 '불광천'

지난 7일 오후 시민들이 불광천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다./ 김현정 기자 서울 은평구에는 지하철 3·6호선이 지나는 연신내역이 있다. 역명은 과거 불광동에 있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 한국지명유래집과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인조반정 때 거사에 함께하기로 한 장단부사 이서(李曙)가 약속장소인 이곳에 늦게 도착해 '지각한 이서'라고 놀리던 것에서 비롯된 말로, 신하를 늦게 만난 개천이라는 뜻에서 연신내(연신천·延臣川)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불광천의 옛 이름이 연신내다. 삼각산 비봉에서 발원한 불광천은 은평구 불광·대조·역촌·신사동을 지나 서대문구 북가좌동을 거쳐 마포구 성산동에 이르러 홍제천에 합류, 한강으로 들어가는 약 9km 길이의 하천이다. 청계천처럼 비가 와야 물이 흐르는 건천이었던 탓에 오·폐수가 유입되면 악취가 진동했으나 2002년 우수방지시설을 구축하고 지하수를 끌어오면서 사계절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 바뀌었다. ◆청둥오리·가마우지·백로 날아들고 잉어 헤엄치는 불광천 이달 7일 오후 시민들이 불광천에서 산책하고 있다./ 김현정 기자 지난 7일 오후 생태하천으로 변모한 서울 불광천을 방문했다. 목적지에 가기 위해 지하철 6호선 새절역 2번 출구로 빠져나왔다. 살이 통통하게 찐 비둘기 떼가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했다. '비둘기가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태계에 도움이 되도록 도와달라'는 당부의 말이 적힌 플래카드를 뒤로하고 불광천 산책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은 총 4개로 구분돼 있었다. 지하철역 쪽으로는 바닥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자전거 전용로가, 하천 쪽으로는 초록색을 띤 보행자용 산책길이 양방향으로 나 있었다. 이날 불광천을 찾은 홍기수(74·이하 가명) 씨는 "은평구에 50년 넘게 살면서 이 길을 매일 같이 오갔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좋아지는 것 같다"면서 "저기에 가마우지도 막 날아다닌다"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선사시대에 살았을 법한 익룡같이 거대한 검은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창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홍 씨는 "옛날에 중국에 갔을 때 사람들이 가마우지 목에 줄을 매달고 사냥개마냥 물고기를 잡아오게 하는 걸 본 적이 있다"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이런 거 말해주면 뻥 치지 말라고들 하는데 여기 와서 가마우지를 직접 보여주면서 얘기하면 그제야 좀 믿어준다"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지난 7일 청둥오리가 새끼 2마리와 불광천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김현정 기자 가마우지가 떠난 자리에는 하얀 빛깔을 한 백로가 남아 부리로 털을 고르고 있었다. 가마우지나 백로 같은 새들이 왜 이리 많은지 궁금해 징검다리를 건너며 물속을 들여다봤다. 하천 안에서 수초 뒤에 몸을 숨긴 팔뚝만 한 잉어 여러 마리를 발견했다. 7일 오후 불광천을 찾은 시민들이 다리에서 알을 풀고 있다./ 김현정 기자 이달 7일 불광천에서 만난 백동희(38) 씨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잠깐 들렀다"면서 "청둥오리랑 백로를 서울 한복판에서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즐거워했다. 백 씨는 "다리를 철봉 삼아 알 푸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귀엽다"면서 "이따 아무도 안 볼 때 따라 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불광천에서는 활기 넘치는 50~80대를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샛노란 등산복을 입고 경보를 하는 어르신부터 싣업 머신에서 빠른 속도로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백발의 노인까지 운동에 열중한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환경 개선 필요 이달 7일 오후 불광천 풀숲에서 털양귀비를 발견한 한 어르신이 꽃 한 송이를 꺾어 손에 쥐고 있다./ 김현정 기자 불광천을 따라 은평구 응암3동에서 서대문구 북가좌2동 방향으로 내려왔다. 산책로에서 반려견이 개천 풀숲으로 내려간 주인을 보며 '왕왕' 짖어대기 시작했다. '거기는 위험해 보이니 얼른 나오라'는 소리로 들렸다. 남색 차양모자를 푹 눌러 쓴 70대 노인이 빨간색 꽃 한송이를 꺾어 손에 쥐고 나왔다. 일행 중 한 명이 "그게 이제 막 펴가지고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갔나 보다"면서 "우리 아들 집 앞에 털양귀비 많은데 좀 갖다 줘?"라고 물었다. 개천 옆 풀 무더기에서 붉은 꽃을 들고 나온 이 할머니는 "이거 하나면 충분하다"며 흡족해했다. 지난 7일 오후 잉어 여러 마리가 불광천 다리 밑에 숨어 있다./ 김현정 기자 꽃 한송이에서 행복을 발견한 어르신들을 지나쳐 증산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베레모를 쓴 노신사가 개천 다리 위에서 목욕재계하는 비둘기 한 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새들은 물속으로 고개를 푹 담갔다가 하늘로 머리를 홱 쳐들기를 반복하며 몸에 물을 뿌려댔다. 날이 더워 열을 식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달 7일 오후 비둘기들이 불광천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김현정 기자 서울 신사1동에 사는 윤학일(64) 씨는 "저 지저분한 비둘기들 좀 보라"면서 "우리 은평구 쪽은 좀 나은데 서대문구나 마포구로 내려갈수록 개천물이 점점 더러워진다. 특히 다리 밑에서 역한 냄새가 나서 스트레스가 말이 아니다"고 털어놨다. 윤 씨는 "낚시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여기 있는 잉어나 청둥오리, 백로 다 더러운 물에서도 잘만 사는 애들인데 그거 좀 나왔다고 물이 깨끗해졌다고 어쩌고저쩌고 떠드는 거 정말 웃긴다"며 코웃음 쳤다. /김현정기자 hjk1@metroseoul.co.kr

2021-06-15 13:13:0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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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9) 지우개로 벅벅 지우고 싶은 역사 기록된 중구 '남산예장공원'

학창시절에 시험을 보다가 긴장돼 아랫배가 살살 아파와 조용한 교실에서 '뿡' 소리가 안 날 줄 알고 한쪽 엉덩이를 들고 슬쩍 방귀를 뀌었는데 '뽝'하고 천둥이 쳐 창피했던 경험,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밤에 자려고 누울 때마다 머리 위로 떠올라 이불 안에서 발차기하게 만드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흑역사'라고 부른다. 사람이 아닌 남산조차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은 악몽을 갖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한양도성을 축조하라고 지시했다. 풍수지리상 안산 겸 주작에 해당하는 남산에는 태조가 봄·가을 제사와 기우제를 지냈던 국사당과 당시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설치됐다. 주작은 사신 중 하나인 남방의 수호신을, 안산은 풍수지리에서 궁궐이나 집터 등의 맞은편에 있는 산을 의미한다. 조선 개국의 성지인 남산은 누구나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이었다. 조선 왕조는 백성들이 남산의 풀 한포기, 돌 한움큼, 나무 한그루 캐갈 수 없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묫자리로도 쓰지 못하게 엄히 다스렸다.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땅인 남산은 어쩌다 잊고 싶은 과거를 간직하게 됐을까? ◆남산으로 떠나는 '암흑사 여행' 남산 예장자락은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예훈련장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예장 터를 근거지 삼아 활동했고 이 인연으로 일제강점기부터 남산 훼손이 본격화됐다. 우리의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신궁을 지으면서 이보다 높이 있는 국사당을 철거한 뒤 신당 일부를 인왕산 서쪽으로 옮겼다. 조선신궁을 건립한 일제는 남산골 일대를 일본인 거주지로 정하고 통감부를 짓는가 하면 신사와 사찰을 우후죽순 만들어내며 식민 통치에 열을 올렸다. 지난 10일 민족 수난의 역사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남산예장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로 나와 남산서울타워가 있는 방향으로 8분(412m)을 걸었더니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쭉쭉 뻗은 소나무 여러 그루와 함께 남산예장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시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남산 예장자락의 원형을 녹지공간으로 되살려 올해 첫날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예장자락 상부엔 총 1만3036㎡ 규모의 녹지 공원이 조성됐다. 남산예장공원에는 ▲소나무가 빽빽이 심어진 '예장숲' ▲조선총독부 관사 터의 기초 일부분을 보존한 '유구터'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고문실을 재현한 '메모리얼 광장' 등이 들어섰다. 서울 중구 약수동에 사는 고모(58) 씨는 "예장자락 둘레길이 산책 코스 중 하나라 자주 오는데 맨날 공사만 하고 있어서 대체 저기에 뭘 만들려고 저러나 궁금했는데 멋진 공원이 생겨 기쁘다"면서 "여기가 이완용이랑 데라우치가 경술국치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고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배경이 되기도 한 치욕의 역사적 현장인데 이런 거는 다 남겨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 씨는 "이런거 왜 남겨놓냐고 말하는 사람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다. 날조해 가르치는 건 역사가 아니"라면서 "역사는 오늘을 살 수 있는 힘이고 내일을 다르게 사는 거울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해 반드시 잊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소방재난본부가 보이는 남산예장공원 우측에는 험하게 뜯긴 콘크리트 잔해와 건물터가 남았다. 갓 구운 쿠키를 둘로 쪼갠 모양으로 설치된 조형물이 바닥에 함께 놓였는데 거기엔 '이곳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사, 광복 뒤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 6국이 있던 자리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시는 예장공원에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어두운 역사를 되새기는 공간인 '기억6'를 마련하고 이곳에 빨간색 우체통 모양의 전시공간 '메모리얼 홀'을 뒀다. 기억6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 설치된 중앙정보부 6국 자리에 세워졌다. 학원 사찰과 수사를 도맡았던 6국은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혹독한 고문과 취조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은 1995년 안기부가 중구 예장동에서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가 매입해 시청 남산2청사로 사용했다. 이후 시는 2015년 남산 예장자락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이듬해 설계 공모 당선작을 선정했다. 시는 2017년 공사를 시작해 올해 남산예장자락 재생사업을 마무리했다. 시는 "과거와 소통하자는 의미를 담아 메모리얼 홀을 빨간 우체통 모양으로 건립했다"며 "메모리얼 광장 지하엔 군사독재 시절 고문으로 악명 높은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 고문실을 재현했고 지상은 전시실로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로 관광버스 주차장은 썰렁 예장공원 하부엔 버스주차장이 마련됐다. 관광버스뿐만 아니라 서울시가 운영 중인 녹색순환버스의 주차장과 환승장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8485㎡(총 41면) 크기로 만들어졌다. 시는 그간 명동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불편과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버스주차장을 조성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10일 오후 주차장 내부에는 서울소방재난본부의 대형버스와 전기를 충전 중인 녹색순환버스가 각 1대씩 총 2대가 서 있었다. 전체 공간 중 4.8%만 사용되고 나머지는 제 기능을 못해 내부가 휑뎅그렁하게 비었다. 이날 남산예장공원에서 만난 윤모(73) 씨는 "지금 현재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없어서 그렇지 주차장을 잘 만들어놔서 좀 있으면 중국이나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 오기 시작하면 여기가 꽉 찰 것"이라며 "시간당 500원이면 거저다. 남산에 놀러 왔는데 주차 때문에 불편했던 관광객들이나 장시간 운전으로 지친 버스기사들이 공원에서 쉬었다 갈 수도 있어 참 편할 것이다. 역이랑 가까워 접근성도 높은데 홍보가 제대로 안 돼 일반시민들이 잘 모르는 게 딱 하나 아쉽다"고 말했다.

2021-05-25 13:38:0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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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8) 비운의 왕비, 정순왕후 삶의 흔적 기록된 종로구 '숭인근린공원'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는 '숭인근린공원'이 있다.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숭인동 동명은 조선시대 초 성 밖에 있던 한성부 동부 12방 중 하나인 숭인방과 인창방의 첫 글자를 합져 지었다고 한다. 조선왕조는 1394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이듬해 수도의 이름을 한양에서 한성부로 바꿨다. 태조 5년(1396년) 한성부 행정구역이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총 5부로 나뉘었고 이는 다시 52방으로 구획돼 방명표가 세워졌다. 5부 중 하나인 동부의 도성 안에는 연희방·숭교방·천달방·창선방·건덕방·덕성방·서운방·연화방·관덕방·흥성방 등 10개 방이 있었고, 성 밖에는 숭신방과 인창방 2개 방이 존재했다. 1980년 개원한 숭인공원은 위에서 바라보면 다리가 짧고 코가 긴 개, 닥스훈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지난 2일 인기리에 종영된 TV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봉태규가 들고 나온 강아지 가방(헥터백: 디자이너 톰브라운이 자신의 반려견을 본떠 만든 가방)을 떠올리면 된다. ◆정순왕후 삶 켜켜이 녹아내린 공원 이달 26일 오후 정순왕후의 그리움이 사무친 장소인 숭인근린공원을 방문했다. 지하철 1호선 동묘역 10번 출구로 나와 보문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담사를 거쳐 좁은 골목길을 따라 약 10분(535m)을 걸었다. 지봉로12가길은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돌리는 소리와 '부우우웅' 옷감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 달리는 소리로 활력 넘쳤다. 시끌벅적한 골목을 지나면 공원 진입로가 있는 조용한 숲길이 나온다. 숭인공원 가는 길을 제대로 찾았다면 돌이 산더미처럼 쌓인 돌탑과 그 옆으로 난 나무계단을 볼 수 있다. 돌탑의 크기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컸다. 성인 너댓명이 손잡고 양팔을 쫙 벌린 채 큰 원을 그려야 간신히 둘러쌀 수 있을 정도로 밑동이 두터웠다. 동망산 산신령이 이곳에 돌을 얹은 다음 소원을 빌고 간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못 본 체하고 지나칠 순 없겠다 싶었다. 이날 공원 초입에서 만난 동네주민 김모 씨는 "옛날에 우리 아들 고3 때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부처님, 예수님, 하나님께 저기 돌 올리고 빈 적이 있다"면서 "그런데 애가 공부를 하지 않아선지 신들이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김 씨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는 정순왕후가 옛날에 살았던 곳이니 그분께 소원을 빌었어야 했던 것 같다"면서 "다음에 중요한 일 있으면 외국 신 말고 우리 조상님들께 간청해봐야겠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숭인근린공원은 조선 6대왕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순왕후는 여산 송씨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됐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읜 단종은 아내인 정순왕후에 의지하며 지냈다. 숙부인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상왕이 돼 수강궁(현 창경궁)으로 물러났다.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한 사육신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고 세조는 단종의 신분을 노산군으로 낮춘 뒤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했다.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숭인공원이 자리한 동망산 기슭에 초가집(정업원: 지금의 청룡사)을 짓고 살며 매일 봉우리에 올라가 남편이 귀양을 간 동쪽(영월쪽)을 바라보며 망왕의 명복을 빌어 동망산 봉우리에 '동망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종로구는 동망봉에 팔각 정자를 건립하고 '동망정'이라 명명했다. 돌탑을 지나 동망정에 올랐다. 정자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연인 한 쌍을 만나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 단종과 정순왕후가 억겁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태어나 현생에서 또 한 번 연을 맺는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로 텅 빈 공원 동망정 외에도 숭인근린공원엔 주민들끼리 친목을 다질 수 있는 '동망봉 열린 북카페',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놀이터 '유아숲체험장',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배드민턴장' 등 놀거리가 넘쳐났지만 이날 오후 공원에는 사람보다 새가 더 많았다. 딱새, 비둘기, 까치가 나뭇가지와 덤불 위를 분주하게 오가며 '짹짹, 깍깍' 공원에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반면 사람은 3~5분 간격으로 드물게 나타나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지난 26일 숭인근린공원을 찾은 주부 박모 씨는 "길고양이 밥 주러 잠깐 왔다"며 "이 동네에 노쇠한 어르신들이 많아서 그런지 최근 코로나가 심해지고 나서는 공원에 운동 오는 사람이 확 줄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양이도 자기한테 밥 주는 사람들이 사라져서인지 그동안 저한테 다가온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 처음 가까이 왔다"면서 "너무 설레고 기분 좋은데 옛날처럼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공원도 그립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숭인공원은 종말을 앞둔 세상의 모습처럼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아숲체험장과 동망각 옆에 설치된 팔각정자에는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게 빨간색 출입금지선이 둘러쳐져 있었고 드넓은 운동장엔 '코로나19 방역조치 강화로 인해 실외 공공체육시설을 일시 폐쇄한다'는 플래카드만 덜렁 걸려 있었다. 종로구 창신동에 사는 정모 씨는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에서도 마스크만 잘 쓰고 있으면 코로나 안 걸린다고 했으면서 공원에서 배드민턴도 못 치게 하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처사다"면서 "사람들 다 집에 가둬놓고 실외 놀이시설도 이용 못 하게 하는데 정말 화가 난다. 전부 다 막는게 능사는 아니다. 그런 건 무능한 행정"이라고 일갈했다.

2021-04-27 13:51:5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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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7) 코로나로 답답한 시민들이 달려간 서초구 '잠원한강공원'

'내동생 곱슬머리 / 개구쟁이 내동생, 이름은 하나인데 / 별명은 서너 개'라는 동요 노랫말처럼 누에도 '잠(蠶), 천충(天蟲), 마두랑(馬頭娘)'이라는 세 개의 한자어 명칭을 갖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중국 주나라의 기자가 기자조선을 세울 때 우리나라에 누에를 들여왔다고 전해진다. 한서 지리지의 기록으로 미뤄봤을 때 누에를 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여년 전이다. 누에는 오랜 세월을 인간과 함께하다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게된 건 아닐까? 우리 조상들은 값비싼 비단을 만드는 명주실을 뽑아내는 누에를 귀하게 여겨 '하늘이 내린 벌레'란 뜻을 가진 천충이라고 불렀다. 예로부터 뽕나무밭이 많았던 잠원은 조선시대 당시 각 고을에 뒀던 양잠장인 잠실도회가 있었던 곳으로, 세종 때부터 잠원동 인근 '신잠실', 송파구 잠실동 '동잠실', 연희동 '서잠실' 등 3곳의 누에 사육방(잠실)이 운영됐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위치한 잠원한강공원은 영동대교 남단 중앙부터 잠수교 상류 철탑까지 길이 5.4km, 총 면적 47만4213㎡ 규모로 이뤄졌다. 둔치에는 육상경기장, 축구장, 농구장, 배구장, 수영장, 체력단련장 같은 체육시설과 자전거도로를 갖추고 있다. ◆코로나 종식 파티 열려 지난 10일 오후 강남 제일의 번화가에 자리한 잠원한강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3호선 잠원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13분(812m)을 걸었더니 공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강과 가까운 쪽에는 자전거 도로가 양방향으로 나 있었고, 잔디밭이 펼쳐진 쪽에는 옅은 분홍색의 도보길이 조성됐다. 이날 잠원한강공원을 방문한 취업준비생 조수영(28·이하 가명) 씨는 "친구들이 한강 가자고 졸라대서 오랜만에 나왔다"면서 "최근에 코로나가 너무 심해져 외출을 자제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 나만 바보같이 집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만 모르는 코로나 종식 파티가 열린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조 씨는 "5인 이상 집합금지 조치로 공원이 한산할 줄 알았는데 4명 꽉꽉 채워서 다들 재밌게 잘 노는 것처럼 보인다"며 "친구 2명 더 부르고 싶을 지경"이라고 털어놨다. 지난 토요일 잠원한강공원은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시민들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올려놓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즐겁게 담소를 나눴다. 감염병 사태를 의식해서인지 사방으로 한 팔 간격을 띄운 상태에서 자리를 깔고 누웠지만 인파가 워낙 많아 감염 확산이 우려됐다. 박솔희(32) 씨는 "쉬는 날마다 러닝크루들과 따릉이 타러 자주 공원에 온다"면서 "길가에 예쁘게 핀 꽃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 치유받고 간다. 여기에 꽃을 심어준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잠원한강공원에는 강줄기를 따라 크게 두 갈래 길이 났다.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튤립이 빽빽이 심어진 기다란 녹지띠가 인도와 자전거길을 가로질렀다. 만개한 봄꽃들이 나들이객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날 공원을 방문한 시민들은 스마트폰 카메라로 튤립을 열심히 찍어댔다. 이날 공원에서 만난 황태진(41) 씨는 "서울에서는 미세먼지 없는 날이 손에 꼽게 적어서 코로나 시국임에도 밖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놀러 나온 사람이 할 소린 아니지만 한강공원에서 취식은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무섭지 않은지 다들 뭘 먹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운 야외수영장 10일 잠원한강공원은 피크닉과 라이딩을 즐기는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직장인 송진주(32) 씨는 "친구가 생일이라 축하 파티하려고 모였다"면서 "마스크 벗어도 안심되는 곳은 한강뿐이라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송 씨는 "작년에 코로나 막겠다며 한강공원 출입 통제하고 그러던데 정말 말도 안되는 조치라고 생각한다. 막아놓은 곳 바로 옆에 사람들이 풍선효과로 몰렸다"면서 "우리 동네는 벤치 가운데 X자 스티커 붙여서 띄어 앉을 수 있도록 하던데 공원엔 그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말했다. 코로나에 걸릴까 봐 걱정돼 잔디밭이 아닌 둔치에 자리를 잡은 시민들도 몇몇 보였다. 친구 2명과 치맥을 즐기러 온 강진석(36) 씨는 "지금 저기에서 제트스키 타는 사람이 너무 부러워서 한번 타는데 얼만지 알아봤는데 치킨 2마리 값이라 참았다"며 "빨리 코로나가 끝나서 야외 수영장이나 열려서 운동 좀 실컷 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강시민공원에 야외수영장이 처음으로 생긴 건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의 일이다. 서울시는 1989년 뚝섬과 잠원 등 2개 한강고수부지 공원에 약 20억원을 들여 노천 수영장을 만들어 개장했다. 수영장 크기는 각 1500평 규모로 2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였다. 잠원-뚝섬지구 수영장이 큰 인기를 끌자 서울시는 망원지구(양화대교~성산대교), 이촌지구(동작대교~반포대교), 잠실지구(잠실대교~영동대교), 여의도지구(여의도 순복음교회 앞 주차장 인근) 총 4곳에 수영장을 추가로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물놀이 시설을 개장했다. 잠원한강지구(구 잠실한강지구) 야외수영장도 이때 탄생했다.

2021-04-13 15:41:00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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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6) 꽃피는 춘삼월 봄맞이 한창인 '종로구 와룡공원'

'와룡'(臥龍)은 누워 있는 용이란 뜻을 갖고 있어,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한국고전용어사전은 와룡의 의미를 "장차 풍운조화(바람과 구름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 바람과 비를 부리는 재주)를 일으킬 큰 영웅"으로 정의해 놨다. 14세기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에는 서서가 유비에게 제갈량을 책사로 추천하면서 "와룡인 제갈량을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묻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 촉한의 임금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軍師·군대의 우두머리)로 맞이하기 위해 그의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가 간청했고, 이 일화는 삼고초려의 유래가 됐다. 제갈량이라는 날개를 단 유비가 천하를 호령하게 되는 내용의 소설, 삼국지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세상은 오랫동안 갈라져 있으면 반드시 하나가 되고 오랫동안 합쳐져 있으면 반드시 나뉘게 된다." ◆용이 잠든 공원, 와룡공원 와룡의 흔적은 조선 초기 발간된 최초의 한글 서사시 '용비어천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9장을 보면 "한 나라의 덕이 비록 쇠퇴하나 임금의 후예가 다시 일어날 것이며 큰 귀 가진 아이를 와룡이 도우니 세상의 어지러움을 구하려고 나시어서(후략)."란 노랫말이 나온다. 여기서 '큰 귀를 가진 아이'가 조선의 초대 임금 이성계다. 이야기인즉슨, 신성한 영물인 용이 태조를 도왔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성계를 조선의 1대 왕으로 만들어준 용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을 안고 이곳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달 22일 서울 종로구에 자리한 '와룡공원'을 방문했다. 공원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1번 출구로 나와 공평유적전시관 앞에서 종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약 13분 후 성대 후문 정류장에서 내리면 나온다.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노랗게 핀 개나리 향기를 맡으며 229m가량을 걸어 올라갔더니 '와룡공원'이라고 적힌 하얀색 푯말이 등장했다. 이날 와룡공원에 온 가회동 주민 박모(42) 씨는 "코로나가 활개친 이후 매일 집에서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운동도 못하고 우울했는데 요새 애들이 다시 학교에 가서 짬이 생겨 공원을 찾았다"며 "삼청공원도 집과 가깝지만 여기만큼 운동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 와룡공원만 주구장창(주야장천) 오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와룡공원에서는 평일 오후임에도 운동하는 시민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자동차 운전대처럼 생긴 운동기구 '숄더 스트레치'에 양손을 올려놓고 시계방향으로 휙휙 돌리며 어깨 근육을 풀었고, 선캡을 푹 눌러쓴 아주머니는 지압봉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아라베스크, 그랑바뜨망 같은 발레 동작을 연습했다. ◆뽑을 사람 없어 고민 '용이 누워있다'는 공원 이름 때문이었을까. 한때 대권 잠룡으로 꼽혔던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도 와룡공원 일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박 전 시장은 작년 7월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실종 7시간 만에 종로구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CCTV에 찍힌 박 시장의 마지막 행적인 와룡공원 일대를 수색해 숙정문과 삼청각 사이 성곽길 인근 산속에서 그의 시신을 찾아냈다. 박 시장이 사망하면서 서울시는 시장 궐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약 10개월간 비어있던 서울시장 자리는 다음달 7일 치러지는 보궐선거에서 선출된 새 인물이 메우게 된다. 지난 22일 오후 와룡공원 앞 정자에서는 철쭉 색 점퍼를 입은 할머니 두분이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명륜동에 사는 김모(82) 할머니는 "마을 어귀에서 친구 기다렸다가 매일 함께 산책 오는데 집에서 와룡공원까지 딱 30분 걸린다"며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들은 아프다고 집에만 있으면 치매 걸리니까 자꾸 밖에 나와서 운동도 하고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봄이면 날씨가 따뜻해져 와룡공원 여기저기에 매화, 벚꽃, 산수유, 진달래가 피어난다"면서 "요즘은 이 꽃 보는 재미에 산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옆에 앉은 이모(80) 할머니에게 '다음 시장은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우리 같은 노인네에게 그런 건 왜 묻느냐"면서 손사래를 치며 즉답을 피했다. 이후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연 이 할머니는 "다음번 시장은 잘못을 저질러 제 손으로 죽거나 감방에 안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와룡공원 #삼국지연의 #나관중 #조조 #유비 #되살아난_서울

2021-03-30 11:44:0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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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5) 도심 속 비밀의 정원·· 조선 시대 별서(別墅) 자리한 '백사실계곡'

별서조경(別墅造景)은 세속의 벼슬이나 당파 싸움에 뛰어들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가 산속 깊숙한 곳에 따로 집을 세우고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며 정원을 꾸미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별서는 한적한 장소에 외따로 만든 집을 뜻한다. 유희를 목적으로 지어진 별장과 달리 별서에선 농사를 짓는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115번지 일대에 위치한 백석동천(白石洞天)은 조선 시대 도성 인근에 조성된 별서 관련 유적으로 사랑채, 안채 같은 건물지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천(洞天)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을 의미한다. 주변에 흰 돌이 많고 풍광이 아름답다고 해 백석동천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유적'은 2005년 사적 제462호로 등록됐다. 이후 2008년 사적에서 해제되고 명승 제36호로 지정됐다. ◆별서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난 8일 백석동천이 있는 백사실계곡을 방문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로 빠져나와 1711번 버스를 타고 8개 정류장을 이동해 세검정초등학교에서 내렸다. 현통사 방향으로 6분(도보 430m)을 걸었더니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럭바위 위에 우뚝 솟은 자그마한 절 옆으로 난 물줄기를 따라 야트막한 산길로 들어서서 5분가량을 더 걸었더니 교과서에서만 봤던 '진경산수화'가 눈 앞에 펼쳐졌다. 휴면기를 끝낸 식물들은 칙칙한 갈색옷을 벗고 상큼한 초록 빛깔 새옷을 갈아입고 있는 중이었다. 산을 덮은 흰 눈은 계곡으로 흘러들어 잠에서 덜 깬 물방울들이 웅덩이에 고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줄기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쉼 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날 백사실계곡을 찾은 구로구 주민 김모 씨는 "이 동네 사는 친구가 집 근처에 끝내주는 계곡이 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길래 궁금해서 한번 와봤다"면서 "'서울에 뭔 계곡이 있냐'고 핀잔을 줬는데 진짜 도심 한복판에 계곡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 이어 "서울에 30년 넘게 살면서 여기에 이제 처음 와본 게 한이 된다"면서 "그 옛날에 여기 경치가 빼어난 것을 알고 집 짓고 살던 사람들이 새삼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백사실계곡의 명칭은 과거 이곳에 별서를 짓고 살았던 조선 중기 문신 이항복(1556~1618)의 호인 '백사'(白沙)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이항복은 오성과 한음에 관한 설화로 잘 알려진 16세기 인물이다. '오성'은 오성부원군 이항복이고, '한음'은 한원부원군 이덕형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당시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조선 중기 명신들로, 5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둘에 대한 일화가 오늘날 '오성과 한음 설화'로 내려오고 있다. ◆겨울잠 깬 개구리 소리 들리는 언택트 관광지 '드르르르륵, 드르르르륵' 차가운 계곡물을 맞고 깊은 겨울잠에서 깬 옴개구리 우는 소리가 드넓은 숲에 울려 퍼졌다.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회색 바위가 위용을 뽐내며 관광객들을 맞이했다. 백석동천(5만861㎡)에는 남북을 중심으로 육각정자와 연못이 있다. 약 3.78m의 높은 대지 위엔 사랑채와 안채가 나뉘어 자리해 있다. 현재 사랑채와 정자 등은 건물터 기초만 남아 있고, 담장과 석축은 일부만 존재한다. 문화재청은 "백석동천은 사랑채 같은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가 잘 남아 있고 마을과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 등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춘 격조 높은 조원(造園)의 면모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달 8일 오후 백석동천에서 만난 대학생 윤모 씨는 "서울시내 언택트 관광지를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다"면서 "사람이 별로 없어 산을 오르다가 숨이 찰 때 마스크를 잠깐 벗고 쉴 수 있어서 좋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 오면 맨날 경복궁, 명동 이런 데만 데려갔는데 다음번엔 꼭 백사실계곡으로 안내할 것"이라며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광지"라고 말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12년 11월 백석동천 별서 유적이 한때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소유였음을 입증하는 문헌자료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석동천은 과거 백석정, 백석실, 백사실 등으로 불렸다. 조선 말기 박규수의 '환재집'에 수록된 시에는 '백석정'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추사의 '완당전집 권9'(阮堂全集 券九)에 "선인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는 내용과 주석에서 "나의 북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같은 기록 등을 통해 추사가 터만 남은 백석정 부지를 매입해 건물을 새로 건립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2021-03-09 15:56:46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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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4) 서울·경기 14개 지방자치단체를 물줄기로 잇는 '안양천'

한강의 지류인 안양천은 경기도 의왕시 백운산 서쪽에서 발원해 안양시를 관통, 서울을 가로지른다. 안양천은 서울 관악·구로·금천·동작·영등포·양천·강서구와 경기도 과천·광명·군포·부천·시흥·안양·의왕시 총 14개 지방자치단체를 물줄기로 이으며, 총 길이는 35.1km에 달한다. 이는 서울 중구 봉래동2가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수원 화성까지의 거리와 맞먹는 규모로, 전 구간을 걸으면 9시간 20분정도 소요된다. ◆안양천 이름 바꿔야 지난 22일 오후 서울과 경기도를 훑는 하천인 안양천을 찾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도림천역 2번 출구로 나와 신정교 사거리 방향으로 1분(90m)을 걸었더니 하천변으로 진입하는 돌계단이 나왔다. 이 계단을 내려갔더니 안양천 체육공원과 함께 하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안양천에서는 각종 레저활동을 즐기는 시민들을 곳곳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었다. 조깅을 하는 어르신들부터 연날리기하는 어린이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농구하는 학생들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저마다의 취미 생활을 만끽했다. 영등포구 문래동에 사는 박모 씨는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해 주말마다 양평 두물머리까지 라이딩을 했다"면서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는 멀리 가는 게 좀 부담스러워 집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안양천도 두물머리 못지않게 경치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됐다"며 "그동안 괜히 멀리까지 가느라 고생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미세먼지 농도가 '좋음' 수준을 나타낸 22일 오후 안양천의 물빛은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르렀다. 투명한 물에 맑은 하늘이 비춰 사파이어 빛을 띠는 것처럼 보였다. 안양천에 조깅하러 나온 직장인 윤모 씨는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 중인데 활동량이 급격히 줄어 살이 6kg나 쪄서 안양천에 나와 운동하기 시작했다"면서 "여기가 도보랑 자전거길이 분리가 잘 돼 있어서 저처럼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며 엄지를 추어올렸다. 그는 "그런데 이 하천이 양천구, 구로구, 금천구 등 서울 곳곳에 퍼져 있는데 왜 전부 다 안양천이라고 싸잡아서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안양천이 경기도 안양시에만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누구는 서울엔 청계천 아니면 안양천밖에 없냐고 놀린다"며 답답해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지명유래집에 의하면 이 하천은 안양 시가지 앞을 지난다는 의미에서 '안양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편에는 "대천(大川)이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며, 과천현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 양천현의 철곶포로 흘러들어간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현재와 달리 하천 구간마다 이름이 각기 달랐다. 안양사와 안양교 부근만을 안양천(安陽川)으로 명명했고, 금천현 구간은 대천으로 양천현 구간은 철곶포라고 불렀다. 이 이름들은 일제강점기 때 '안양천'으로 통합돼 현재까지 하나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깨끗해진 안양천 이달 22일 오후 안양천을 방문한 동네 주민 김모 씨는 "옛날에는 서울에 있는 공장들의 오폐수가 다 안양천에서 만나 오염이 심각했다"며 "지금은 공장도 없고 구청 같은데서 관리도 잘해서 그때보다 100배는 깨끗해졌다"며 기뻐했다. 안양천 인근의 지자체들은 1990년대부터 힘을 모아 '안양천 살리기' 운동을 진행해왔다. 1999년 안양천 유역에 있는 서울시와 경기도의 11개 지자체는 '안양천 수질개선 대책 협의회'를 만들고 생태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공동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안양천 하류에는 하수처리장이 설치돼 서울 관악·영등포구와 경기 광명시에서 하루 평균 170만t씩 발생하는 하수를 정화했는데 안양시 외에는 하수처리시설을 갖춘 곳이 거의 없어 하천에 오염물질이 흘러넘치곤 했다. 때문에 하천이 아닌 하수 운반통로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인근 자치단체들은 안양천 생태계 회복을 골자로 하는 주민 참여 프로그램 등을 공동 운영했다. 이를 통해 2000년 6등급이었던 수질을 2013년 3등급까지 끌어올렸다. 지난달 안양천 명소화 사업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서울 서남권 4개 자치구(양천, 구로, 금천, 영등포)는 오는 2030년까지 자연친화적인 생태복원 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2021-02-23 16:25:58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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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3) 강남구 역사 문화 명소 '서울 선릉과 정릉'

지난 7일 서울 선릉과 정릉을 찾은 한 가족이 정현왕후 능 앞을 지나가고 있다./ 김현정 기자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과 삼성역 사이에는 선릉역이 있다. 이 역의 이름은 원래 '삼릉'이었다. 조선시대 9대 왕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이 잠든 3개 능이 자리한 삼릉공원이 근처에 있어 개통 전 이 같이 명명됐다. 1982년 서울시는 수도권 내 의정부~수색간 교외선에 삼릉역이 이미 존재해 시민들이 같은 역명으로 인해 혼란을 겪을까봐 지하철 2호선 2단계 개통 구간에 있는 삼릉역 역명을 선릉역으로 고쳤다. 선릉과 정릉을 포함한 조선 왕릉 40기는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코로나로 시민 발길 잦아진 왕릉 이달 7일 선·정릉을 방문한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김현정 기자 지난 7일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서울 선릉과 정릉'을 찾았다. 선릉로와 봉은사로로 둘러싸인 이곳은 하늘에서 보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원래는 선릉·정릉으로 불리다가 2011년 7월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고시에 따라 한글맞춤법(띄어쓰기)을 적용, '서울 선릉과 정릉'(이하 선·정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입구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후 내부로 들어가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솟을대문이 인상적인 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 이곳은 제관들이 제례를 지내기 전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종9품 참봉 등의 관리가 재실에 상주하며 능과 그 주변을 돌봤다. 재실은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 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제사 때 쓰는 그릇 및 관련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등으로 구성됐다. 서울 구로구에서 온 이모 씨는 "코로나 때문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져 심심해하다가 최근에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면서 "조선시대 왕들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와봤는데 왕릉이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 입장료를 깎아줘서 빈정 상했다"며 입을 삐죽였다. 선릉관리소에 따르면 강남구민과 조선왕릉 각 지역의 기초자치단체 주민은 입장료를 50%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강남구를 포함해 노원구(태릉), 구리시(동구릉), 서초구(헌릉) 주민들은 500원(성인 기준)만 내면 선·정릉을 마음껏 둘러볼 수 있다. 이달 7일 선릉과 정릉 역사문화관은 공사로 인해 휴관 중이었다./ 김현정 기자 재실을 지나 역사문화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모녀가 입구 앞에서 서성이며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직장인 박모 씨는 "모처럼 휴일이라 엄마와 함께 데이트 나왔다"면서 "역사문화관에서 선·정릉에 대한 사전 지식을 충분히 쌓고 한바퀴 둘러보려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화재청이 발주한 조선왕릉 8개 전시관 개편 공사는 작년 10월 23일부터 올해 1월 20일까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이날까지 완료되지 않았다. 역사문화관 앞에는 공사로 인해 휴관한다는 안내문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수모 겪은 선·정릉 지난 7일 선·정릉에 온 시민들이 정자각을 둘러보고 있다./ 김현정 기자 성종과 세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인 선릉은 선정릉역 사거리 쪽에 자리했다. 홍살문 안쪽 정중앙에는 향로가, 오른쪽에 어로가 있다. 향로는 제향을 지낼 때 혼령을 위한 향이 지나가는 길이다. 관람객들은 향로가 아닌 그 옆에 낮게 난 어로(제향을 지내러 온 임금이 걷는 길)를 통해 정자각을 둘러보고 선릉으로 향했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봤을 때 왼쪽 언덕에 성종의 무덤이, 오른쪽 둔덕에 정현왕후의 능이 위치해 있다. 이달 7일 자녀와 선·정릉을 방문한 김모 씨는 "왕릉에 온 기념으로 능 앞에서 아이와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는데 들어갈 수 없어 아쉽다"면서 "시력이 안 좋아서 이 거리에선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털어놨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이 세워졌고, 그안에는 동물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이 새겨졌다. 난간석은 12칸이며 양석·호석·망주석·문석인 등의 석물이 있다. 비릉은 병풍석이 없는 것만 빼고는 나머지 석물은 왕릉과 같이 배치됐다. 이달 7일 서울 선릉과 정릉을 찾은 한 어르신이 성종대왕릉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현정 기자 가장 눈에 띄는 건 사람의 형상을 한 입석상이었다. 갑옷과 투구로 완전 무장한 무석인은 칼을 뽑아 지팡이처럼 쥐고 서 있었다. 송충이 같은 눈썹과 주먹만한 코를 가진 무석인은 입술을 앙 다문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퍽 믿음직해 보였다. 선릉에서 동쪽 방향으로 걸었더니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나왔다. 정릉은 원래 두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세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빼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라고 한다. 정릉 앞에 세워진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컸는데 코 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어 임진왜란 당시 왕릉의 수난을 떠올리게 했다. 정릉과 선릉은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파헤쳐져 재궁이 불타는 치욕을 겪었다. /김현정기자 hjk1@metroseoul.co.kr

2021-02-09 15:31:0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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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2) 그리움이 사무치는 공원, 서울 서초구 '양재 시민의 숲'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 준비가 한창이었던 1980년대, 서울에는 공원 조성 열풍이 불었다. 도심재개발 사업에 열을 올리던 서울시는 1984년 대지면적의 30% 이상을 조경 공간으로 만들도록 의무화했고, 크고 작은 공원 500여개가 새롭게 탄생했다. 서울의 1인당 공원면적은 1979년 4㎡에서 1991년 8㎡로 2배 늘었다. 서울대공원(1984년), 보라매공원(1986년), 올림픽공원(1988년)이 차례로 개원했고, 양재 시민의 숲도 이때 생겨났다. 1983년 개포지구 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부지를 확보한 서울시는 도심의 관문인 양재 톨게이트 일대 미관을 개선하고 시민들에게 쾌적한 휴식 공간을 제공하고자 공원 조성 공사에 들어가 1986년 11월 시민의 숲을 일반에 개방했다. 공원은 양재동 경부고속도로 양편에 7만8500여평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사업비로 총 25억5000만원이 투입됐다. ◆왁자지껄한 공원이 보고픈 시민들 지난 25일 올해 개원 35주년을 맞이하는 양재 시민의 숲을 방문했다. 공원은 신분당선 양재 시민의 숲역 5번 출구로 나와 매헌로 방향으로 2분(185m)을 걸으면 나온다. 양재 시민의 숲은 피자 조각 모양처럼 생겼다. 세 면은 각각 경부고속도로, 강남대로, 양재천으로 둘러싸였다. 매헌로를 기준으로 공원 북측엔 윤봉길의사 동상과 기념관, 야외무대, 지식서재, 테니스장, 연못, 체육시설이 설치됐고 남쪽에는 백마부대 충혼탑, 대한항공기 피폭 희생자 위령탑, 삼풍 참사 위령탑,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졌다. 양재 시민의 숲은 국내 최초로 숲 개념이 도입된 공원으로 조성 당시 단풍나무, 소나무, 느티나무를 포함 약 23만4600그루의 관목·교목이 심어졌다. 공원에는 한자리에서 30년 넘게 쑥쑥 자란 나무들이 큰 키를 뽐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는데 건물 4~5층 높이는 족히 돼 보였다. 하늘로 고개를 한껏 쳐들어도 나무의 키가 워낙 커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중년 여성 두명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벤치 양 끝에 1m 넘게 떨어져 앉아 마스크를 낀 채 서로의 얼굴이 아닌 정면을 바라보고 담소를 나누다 금방 자리를 떴다. 이날 양재 시민의 숲을 찾은 주부 이모(35) 씨는 "아이가 심심하다고 노래를 불러서 코로나 터지고 오랜만에 공원에 나와봤다"면서 "여기저기 못 보던 출입금지선이 쳐져 있고 사람도 너무 없어서 정말 깜짝 놀랐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는 "애가 또래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풀이 죽었다"며 "다음에 왔을 땐 코로나가 잠잠해져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공원 정자와 어린이 놀이터에는 '위험 안전제일'이라는 문구가 적힌 빨간색 테이프와 함께 "코로나19로 시설물을 전면 폐쇄하오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는 안내문이 붙었고 바비큐장으로 들어가는 문도 굳게 잠겨 시민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동네 주민 이모(57) 씨는 "예전에는 공원에 예식장도 있고 행사다 뭐다 주말마다 시끄럽게 굴어서 구청에 민원 넣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런 게 싹 없어졌다"면서 "암만 그래도 코로나 전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떠나간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하는 공간 시민들이 체력 단련 장소로 주로 이용하는 공원 북측을 둘러본 후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계 최고 높이의 건축물인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를 두개로 쪼개놓은 것처럼 보이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살펴보니 '삼풍참사 위령탑'이었다. 조형물 옆에는 뽀얀 먼지가 쌓인 하얀색, 노란색 국화와 시들어 갈색으로 변한 생화 꽃다발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꽃이 빽빽이 꽂힌 화분들에는 "사랑하는 사위 ㅇㅇ, 딸 ㅇㅇ아…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어라. 너희들을 항상 사랑하는 양가 엄마, 아빠로부터", "보고 싶은 ㅇㅇ이, 사랑하는 가족이" 등 '사랑한다'와 '보고싶다'는 말이 잔뜩 적힌 편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횃불탑'이라고 불리는 이 조형물은 1995년 6월 29일 서초구 서초동에 소재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502위의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화여자대학교 김봉구 교수가 조각했다. 건립 취지에 따르면 위령탑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형상, 대지에서 새싹이 움터서 우주공간을 향해 어둠을 밝혀주는 형상, 봉황이 두 나래(날개)를 펴고 하늘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형상, 넓은 대지 위에 둥근 태양과 햇살을 상징한다. 앞으로 이런 참사가 없고 햇빛처럼 밝은 세상이 되도록 하자는 내용을 담아 만들었다고 한다. 삼풍백화점 희생자 위령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우면산 산사태 희생자 추모비도 보는 이의 마음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이 조형물은 흰색의 대리석 기둥 12개가 가차 없이 뜯겨나간 모양을 하고 있었다. 2011년 7월 27일 우면산, 청계산, 구룡산 등 서울시 일대 81곳에서 산사태가 나 16명의 고귀한 생명을 잃은 사실을 반성하며 이런 피해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성찰해 재난안전의 교훈으로 삼고자 여기에 비를 세웠다고 시는 설명했다. 우면산 산사태 피해로 아들을 잃은 시인 임방춘 씨는 이 자리에 "고운 산에 오르면/그 해 7월 빗속에서 떠난 임/눈에 삼삼/목이 메이고//심장이 파열된 채/내 가슴이 부서져/이제는/한 줄기 바람으로 돌아와/야윈 볼에 감긴다"는 시를 남겼다.

2021-01-26 15:42:5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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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1) 드림랜드 사라진 자리에 생긴 녹색 쉼터 '북서울 꿈의숲'

서울의 대형 공원으로는 월드컵공원(276만㎡), 올림픽공원(145만㎡), 서울숲(120만㎡)이 있다. 북서울 꿈의숲도 그 중 하나다. 공원 규모는 총 66만2627㎡이며, 강북·도봉·노원·중랑·동대문·성북 6개 자치구로 둘러싸여 있다. 서울시는 강남·북 균형발전 정책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267만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강북 6개구의 심장부에 초대형 공원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2008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 10월 북서울 꿈의숲을 개원했다. 사업비로 3339억원이 투입됐다. ◆조선시대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공간 지난 11일 북서울 꿈의숲을 방문했다.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 2번 출구에서 미아동 방향으로 1.5km(22분)를 걸었더니 'I·SEOUL·U' 조형물이 설치된 공원 입구가 보였다. 동문 오른쪽에는 다홍색으로 칠해진 방문자센터가 들어섰는데, 이 건물 위로 '천만시민 긴급 멈춤 기간'과 함께 연말연시 5대 행동수칙(2시간마다 환기, 송년모임 자제, 밀폐장소 오래 있지 않기, 의심되면 즉시 검사, 마스크 착용과 손소독 철저)을 알리는 대형 배너가 걸려 있었다. 정겨운 시골 냄새를 따라 방문자센터 뒤로 올라갔더니 사슴방사장이 나왔다. 방사장 앞에서 한 꼬마가 철책 너머로 어미 젖을 먹는 어린 사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북서울 꿈의숲에서 만난 주부 김모(40) 씨는 "코로나 때문에 애들 데리고 갈만한 데가 정말 없는데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한가해서 좋다"면서 "사슴방사장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문화재, 전망대 등 볼거리가 풍부해서 마음에 든다"며 활짝 웃었다. 사슴방사장 옆에는 아담한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창녕위궁재사가 위치해 있다. 이곳은 조선의 23대 왕인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와 부마 창녕위 김병주가 살던 곳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전통 건축 양식의 단층 목조 기와집으로 높은 장대식 기단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조반정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신경진의 별장이었다가 이후 재실로 사용된 창녕위궁재사는 1910년 국권침탈에 분개한 독립운동가 김석진이 일본의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 순국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왼쪽의 재사는 180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오른쪽의 사랑채는 원형 그대로 보존됐고, 정면의 안채는 8·15광복 후 개축했다가 6·25전쟁 때 파괴돼 재건축했다. 창녕위궁재사는 수도권 코로나19 재확산 우려에 따른 다중이용시설(문화재) 관람 제한으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 순 없었지만 담이 1m 정도로 낮아 밖에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드림랜드에서 꿈의숲으로 이달 11일 북서울 꿈의숲을 찾은 시민 윤모(36) 씨는 "부모님 손잡고 드림랜드에 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 참 빨리도 간다"면서 "옛날엔 롤러코스터, 바이킹 같은 놀이기구도 많고 재밌었는데 공원으로 바뀌고 나서는 좀 심심해졌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윤 씨는 "그때는 '애 반, 어른 반'이었는데 지금은 '사람 반, 개 반'이다"며 "뉴스에서 '출산율 0명대를 기록했다'고 떠들 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저출산 국가인 게 실감난다"고 말했다. 북서울 꿈의숲은 당시 동북부 랜드마크였던 놀이동산 드림랜드를 철거하고 만든 공원이다. 드림랜드는 도봉구 번동 산28 일대 월계로변에 10만5000평 규모로 조성된 종합위락시설이다. 1987년 문을 열었다. 자전거로 공중 레일을 달리는 '사이클모노레일'부터 공중에서 후진·전진 360도로 회전하는 '아토믹 코스타', 코스 길이가 1100m에 달하는 '제트코스타'까지 스릴 만점의 오락시설 21종이 설치됐는데 이중 13개가 국내에 처음 들여온 놀이기구였다. 개장 첫날에만 100만명 이상이 다녀갔고 주말엔 하루 3만여명, 평일엔 5000여명이 이용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시간이 흘러 서울에 대형 놀이공원이 속속 들어서면서 드림랜드는 경쟁력을 잃었고 재정난으로 시설 노후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2008년 폐장했다. 서울시는 슬럼화가 진행된 드림랜드 부지를 사들여 놀이공원을 철거하고 2009년 10월 17일 북서울 꿈의숲을 만들어 시민에게 개방했다. 명칭은 공원 위치를 표시하는 '북서울'과 시민들의 추억이 서린 '드림랜드'를 우리말로 표현한 '꿈의숲'을 합쳐 지었다. 당시 서울시는 강북대형공원의 이름을 정하기 위한 시민 공모를 벌여 2214건의 응모작 중 전문가 심사를 거쳐 9건의 후보 명칭을 선정, 선호도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서울드림파크'가 선호도 1위를 나타냈는데 영문이라는 약점과 인천수도권매립지 공원화 사업에 기사용되고 있어 '북서울 꿈의숲'이 최종 명칭으로 결정됐다. 수명을 다한 놀이공원이 역사 속으로 퇴장한 자리에 생겨난 북서울 꿈의숲은 강북권 주민의 녹색 쉼터로 거듭났다. 현재 북서울 꿈의숲에는 ▲7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있는 연못 '칠폭지' ▲북한산·수락산·도봉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49.7m 높이의 '전망대' ▲수준 높은 문화예술 공연이 일년 내내 열리는 '아트센터' ▲완만한 경사의 풀밭이 미술관을 배경으로 펼쳐진 잔디광장 '청운답원' ▲전통정원에서 달을 비춰볼 수 있는 연못 '월영지' 등이 조성돼 시민들에게 다양한 휴식·산책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2021-01-12 15:28:41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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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80) 백로·청둥오리 노니는 도심 속 생태 보고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지표를 흐르는 물줄기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유로가 변하면 하천에 퇴적물이 쌓이고 그 한가운데 섬이 생기는데 이를 '하중도'라고 한다. 한강의 하중도로는 밤섬, 노들섬, 선유도 등이 있고, 여의도도 그중 하나다. 홍수가 나면 섬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양말산'만 빼꼼히 드러나고 나머지는 물에 잠기는 탓에 사람들이 "너나 가지라"는 뜻에서 '너의 섬', '나의 섬'이라고 말장난하던 것을 한자화해 '여의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다. 여의도는 3개의 대형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포대교 쪽으로는 '여의도한강공원'이, 신도림역쪽으로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 위치해 있고, 섬 한가운데를 '여의도공원'이 가로지른다. 생태공원은 여의도샛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 당시 여의교와 서울교 사이 1.2km 구간에 5만5000여평 규모로 조성됐다. '생태계 되살리기'에 초점을 맞춰 만든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으로, 공사비로 33억원이 투입됐다. 오랜 세월 물흐름이 없어 파괴된 생테계를 회복시키고자 샛강을 폭 15m, 깊이 30cm로 정비하고, 한강과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서 나오는 하루 2500t의 지하수를 끌어들여 계단식 폭포와 인공연못을 만들었다. 연못 주변 늪지에는 부처꽃, 골풀 같은 습지식물 40종 6만포기와 개망초, 명아주, 개똥쑥, 갯버들, 조팝나무 등 자생식물 1100그루를 식재했다. ◆도심서 시골 정취 만끽 흰 눈이 소복이 내린 지난 13일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을 찾았다. 지하철 1호선 신길역 2번 출구로 빠져나와 문화다리를 통해 공원으로 내려왔더니 눈앞에 드넓은 녹지가 펼쳐졌다. 생태공원은 2008~2010년 수변 생태공간 확장 공사를 통해 규모가 기존 18만2000㎡에서 75만8000㎡로 4배 이상 넓어졌다. 사업비로 총 478억8000만원이 들어갔다. 한겨울에도 시원한 푸른 빛을 자랑하는 샛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엔 울긋불긋한 나뭇잎이 남아 있는 나무들로 숲이 우거졌다. 이날 공원을 찾은 주부 김모(45) 씨는 "코로나 때문에 연말 모임이 다 취소돼 갈 데가 없어서 왔다"면서 "여행도 못 가고 우울했는데 산책하니 좀 나아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정말 오랜만에 1만보는 걸은 것 같다"며 "오늘 살 1kg은 꼭 빼서 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같은날 생태공원에서 만난 대학생 이슬기(22) 씨는 "심심하다고 하니까 친구가 자기네 집 근처에 가볼만한 곳이 있다고 해서 나왔다"면서 "새 신발에 흙이 묻어서 처음엔 조금 짜증 났는데 계속 걷다 보니 적응도 되고 시골 할머니네 놀러 온 것처럼 정겹다"며 밝게 미소지었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폭 130m, 총연장 4.6km 구간을 ▲여의상류 부분은 '여의경관구역' ▲63빌딩에서 여의교 구간은 '수질정화 습지 구역' ▲여의교에서 서울교까지는 '생태체험 학습구역' ▲서울교에서 파천교까지는 '버들문화구역' ▲파천교에서 국회의사당까지는 '생태보존구역' ▲여의하류 부분은 '둔치경관 탐방구역' 총 6개 테마로 구성했다. 여의경관구역은 한강과 여의도샛강이 만나는 유입부로 잔디마당과 파크골프장, 산책로가 마련됐다. 수질정화습지구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습지가 가꿔졌다. 샛강의 수질을 개선하고 수생동식물이 자라날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생태체험 학습구역에는 생태수로와 버들숲을 만들어 시민들이 생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버들문화구역은 여의도공원과 연계해 시민들에게 여가문화를 제공하고자 버들광장과 창포원, 물억새 군락을 두었다. 또 생태적 자연성이 우수한 폐쇄형 습지를 지키기 위해 생태보존구역을 보존지구로 설정하고 통행로를 우회해 설치했다. 둔치경관 탐방구역은 한강과 밤섬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도록 언덕형태로 만들었다.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동물이 숨 쉬는 곳 이달 13일 가족들과 생태공원에 온 윤모(39) 씨는 "애들이 밖에 나가자고 염불을 외워서 하는 수 없이 공원에 나왔다"며 "집에서 쿵쿵 뛰어다녀 더 있으면 층간소음으로 신고 당했을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생태공원이라고 하길래 '서울에서 생태계가 보존되면 얼마나 되겠어' 하는 마음으로 왔는데 청둥오리도 있고 백로도 있어서 깜짝 놀랐다"면서 "아이들 교육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생태공원에는 여의못과 생태연못 총 2개의 인공연못이 있다. 이날 연못에서는 노란색 부리로 몸의 털을 가다듬는 백로와 유유자적 물 위를 떠다니는 청둥오리를 만나볼 수 있었다. 여의못은 여의도역에서 배출되는 물을 가져다 조성한 못이다. 윤중로 사면지의 경사를 활용해 계류폭포를 만들어 물을 유입시킴으로써 시원한 물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했다는 게 서울시의 설명이다. 특히 이 물은 강준치, 동자개, 모래무지가 살 수 있는 1급수 맑은 물로 연중 수온이 11도로 유지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해 어류와 조류 서식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생태공원은 자연생태를 보존하고 동식물이 휴식할 수 있도록 가로등은 물론 매점과 벤치도 두지 않았다. 동물 산란기에는 일부 구간의 출입이 제한될 정도로 철저히 관리돼 왔으나 현재는 안전을 위해 일반 가로등보다 키가 2배가량 크고 조도가 낮은 가로등 몇 개가 설치된 상태다. 작년에는 천연기념물 제324-2호로 지정된 수리부엉이가, 올해에는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관심대상(Least Concern·LC)인 두꺼비가 생태공원을 찾았다. 이외에도 그간 생태공원에서는 멸종위기야생동물 2급 '새호리기', 멸종위기야생동물 2급이자 천연기념물 323-4호인 '새매', 천연기념물 324-3호 '솔부엉이', 천연기념물 324-7호 '큰소쩍새', 천연기념물 323-8호 '황조롱이'를 포함해 총 59종의 야생조류가 발견됐다. 시는 여의샛강의 생태계가 완전히 복원될 수 있도록 내년 11월까지 생태공원 버들광장에 남아있는 콘크리트 포장을 걷어내고 한강 물을 유지용수로 활용한 실개천을 만드는 '하천환경 개선공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2020-12-29 14:56:45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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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79) 시대의 요구로 이름이 두 번 바뀐 '여의도공원'

여의도공원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두 번 이름이 바뀌었다. 가장 처음엔 5.16광장이었고, 그 다음에는 여의도광장,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불린다. 서울시는 1971년 2월 20일 공사를 시작해 7개월 만에 준공, 같은해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는 10월 1일 5·16광장을 시민에게 공개했다. 5공화국 등장으로 명칭이 여의도광장으로 변경됐다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 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여의도공원으로 탈바꿈해 1999년 1월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연 많은 공원 지난달 30일과 이달 5일 푸른 녹지로 변신한 여의도공원을 방문했다. 공원은 ▲생태연못과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생태의 숲' ▲광장과 농구장을 갖춘 '문화의 마당' ▲산책로가 조성된 '잔디마당' ▲팔각정이 있는 '한국전통의 숲'으로 구성됐다. 여의도공원 면적은 총 22만9539㎡다. 지난달 30일 여의도공원을 찾은 김모(72) 씨는 "여기가 옛날에는 광장이어서 광화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집회랑 행사가 많아 정말 시끄러운 동네였다"면서 "지금은 공원 된 지 한참 지나서 좀 안정되고 조용해졌다"며 기뻐했다. 약 반세기 전 서울시는 이 광장의 이름으로 5·16광장, 민족의 광장, 통일의 광장, 서울대광장, 여의도대광장 총 5개를 검토했는데 청와대의 재가를 얻어 첫번째 안으로 결정했다. 당시 5·16광장의 크기는 여의도 전체 면적인 87만평의 14%인 12만평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55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게 자랑거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6차선의 차도를 갖춘 광장과 향나무, 화양목 등 관상수 9200그루가 심어진 녹지대, 보도, 분수대가 조성됐다. 대규모 행사나 집회·시위가 열릴 때는 광장으로 사용되고 그 외에는 서울 도심과 영등포를 잇는 간선도로 기능을 했다. 현재는 대규모 군중집회 1번지로 광화문광장이 꼽히지만 과거에는 여의도광장이 이 역할을 했다. 1978년 10월 31일 5·16광장에 "때려잡자 김일성"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휴전선 비무장지대 남쪽으로 제1, 제2 땅굴에 이어 제3 땅굴이 발견됐고, 이날 광장에서는 시민 사회단체, 종교인, 학생대표 등 200만명이 참석한 '북괴 남침 땅굴 규탄 서울시민 궐기대회'가 개최됐다. 행사에서는 김일성의 호전성을 규탄하는 경고문 낭독과 김일성 허수아비 화형식이 진행됐다. 1980년대 들어서며 새로운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광장명은 여의도광장으로 개칭됐다. 1984년과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했을 때는 약 100만명이 운집해 주변 도로까지 사람들로 붐볐고, 1987년 대통령선거 유세와 부활절 연합예배 때도 5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갈곳 없는 사람들 모이는 공원 관제 집회가 열리던 국가권력의 상징 '여의도광장'은 1995년 서울 민선시장이 부임하며 공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시는 1997년 4월부터 아스팔트를 걷어내기 시작해 1999년 1월 여의도공원을 개장했다. 공원에는 총 12개의 출입구가 만들어졌다. 이중 1번 출입구로 진입하면 거대한 태극기 게양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신한금융투자타워, IFC몰, 파크원 현대백화점 같은 초고층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오른편으로는 KDB산업은행, 중소기업중앙회, 수출입은행 등 키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달 5일 여의도공원을 찾은 이모(34) 씨는 "근처에서 여자친구와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는데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안에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왔다"면서 "여기에 공원이 없었으면 커피 들고 정처 없이 떠돌뻔 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씨는 "기대를 별로 안 했는데 조경도 잘해놨고 비행기 모형도 있어 볼거리가 많은 것 같다"면서 "광장은 휑하니 넓은데 비행기가 한대 밖에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여의도공원에 전시된 C-47 항공기는 1945년 11월 23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 15명이 탑승해 귀국한 비행기와 동일 기종으로, 대한민국 공군이 최초로 보유한 수송기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비행기가 내렸던 이곳 여의도 활주로(지금 여의도공원)에 그 기록을 남기고자 C-47 비행기 전시관을 세웠다. 전시를 기획한 서해성 예술감독은 "C-47 수송기가 여의도 광장에 내려앉는 건 헌법 전문 첫 줄이 착륙하는 일과 같다"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 맨머리에 명문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임시정부의 활동이 망명지 중국일 수밖에 없어 정작 우리나라에는 임정의 기념공간이나 기념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라며 "C-47 수송기를 전시하는 일은 비행기를 통해 생동하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만나는 일이다"고 덧붙였다. 여의도공원에는 비행기 전시물 외에 서울정원박람회 때 조성된 아기자기한 녹색 쉼터도 마련돼 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윤모(29) 씨는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운동 좀 하려고 왔다. 코로나 때문에 수영장이 문을 닫아 답답했는데 공원에라도 올 수 있어 다행"이라면서 "다른 데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정원이 많던데 각각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볼만했다"고 말했다. 공원에는 다채로움으로 이뤄진 세상을 은유하는 정원인 '다채원', 타인과 관계 유지에 필요한 포용과 이해에 초점을 맞춰 계획된 정원인 '너를 담다' 등이 가꿔져 있다. 정원에서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생긴 황금용버들, 알 굵은 밤송이 같은 자엽중산국수, 까치집과 비슷한 은사초 등 다양한 식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2020-12-15 14:00:3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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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78) 600여년 역사의 흔적 켜켜이 쌓인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울긋불긋 단풍이 고운 색을 뽐내는 남산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한양도성이 온전히 보존된 노천 박물관이 생겼다. 한 세기 넘게 땅속에 파묻혀 사라진 줄 알았던 회현자락 한양도성 유적이 옛 모습 그대로 시민들의 앞에 나타났다. 서울시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에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조성해 지난 12일 시민에게 공개했다. 시는 남산 중앙광장 일대 성곽을 발굴 상태 그대로 정비해 4만3630.7㎡ 규모의 박물관을 만들었다. 전시관에서는 조선시대 한양도성 축성부터 일제강점기 훼손과 수난, 해방 이후 도시화까지 수백년에 걸친 역사의 흔적을 손끝으로 더듬어볼 수 있다. ◆옛 추억 새록새록 떠오르는 장소 지난 16일 개관 5일 차를 맞은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찾았다. 지하철 4호선 서울역 10번 출구로 나와 남산서울타워 방향으로 약 18분을 걸으면 형형색색 가을옷을 입은 남산과 함께 거대한 회색빛 삼각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은 태양광 패널 여러 개를 붙여 놓은 것처럼 생긴 지붕과 기둥으로만 이뤄졌다. 노천 박물관에는 ▲한양도성 유적 ▲조선신궁 배전 터 ▲분수대 ▲방공호 ▲각자성석이 전시됐다. 이날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에서 만난 시민 김모(54) 씨는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있길래 한번 들러봤다"면서 "고풍스러운 건물을 기대했는데 기둥하고 지붕만 덜렁 있어 축사처럼 보인다. 주변 자연 경관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시는 "유적 보호시설(보호각)은 외벽 없이 기둥과 반투명 경량 재질의 지붕 재료를 사용해 유적을 온전히 보호하면서도 남산 경관 훼손을 최소화했다"면서 "특히 유적 보호각은 국내 최대 규모의 건설재료 시험기관인 KCL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에서 지붕재에 대한 성능 및 내풍압 시험을 실시, 안전성을 검증했다"고 덧붙였다. 먹구름색의 유적 보호시설은 2013~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성벽을 감싸고 있다. 1396년 조선 태조 이성계는 전국에서 약 20만명을 동원해 한양을 둘러싼 4개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의 능선과 그 사이 평지를 이어 성을 지었다. 현재는 전체 18.6km 중 70%인 13km 정도만 남아 있다. 전시관이 위치한 서울 중구 회현동1가 100-267 일대에서는 남서쪽 구간의 한양도성 유적 189m가 발굴됐다. 이곳에서는 5세기에 걸친 조선 왕조 축성 기술의 발전 단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성벽 맨 아래에 놓인 대형 기초석은 14세기 태조 때 쌓은 성돌이다. 위쪽 왼편에는 작고 납작한 성돌이, 오른쪽에는 40~45cm 크기의 성돌이 올려졌는데 각각 15세기(세종), 18세기(숙종)에 쌓은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면 성돌의 크기가 60cm로 커진다. 해방촌에서 온 김선복(58) 씨는 "이 동네 살아서 자주 오는데 맨날 공사하는 것만 보고 전시관은 오늘이 처음"이라면서 "우리 애가 지금 36살인데, 80년대에 아이들 여름방학 과제로 남산식물원에 왔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활짝 웃었다. 김 씨는 "처음에는 공사를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뭘 하는데 저렇게 오래 걸리나 했는데 다 완성된 걸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전했다. 시는 지난 10여년간 '남산 회현자락 정비사업'을 3단계로 나눠 진행해왔다. 그동안 시는 힐튼호텔 앞 아동광장 일대 성곽 34m를 발굴한 1단계 사업(2009년), 백범광장 인근 성곽 42.4m를 복원한 2단계 사업(2012년), 중앙광장 주변 성곽 189.3m를 정비한 3단계 사업(2014년)을 완료했다.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은 이 중 3단계 사업으로 되찾은 광장 일대 성벽을 시민에게 공개한 공간이다. ◆궁금한 게 많은 시민들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을 전후해 나라의 운명과 함께 한양도성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남산 회현자락엔 1925년 일본의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거대한 조선신궁이 들어섰다. 전시관에서는 성벽 발굴조사 때 함께 발견된 배전(방문객이 절하며 참배하는 곳)의 기초 구조물도 볼 수 있다. 조선신궁 건물 15개동 중 하나인 배전은 가로 18.9m, 세로 14.9m 크기로 지어졌다. 콘크리트 기초 위에 16개 기둥이 세워진 건물인데 지금은 터만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적군의 공중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설치된 방공호도 시민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937년 11월 17일 일본칙령 제661호 방공법 조선시행령에 따라 서울 곳곳에 생긴 방공호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곳이다. 시민 윤모(35) 씨는 "돌에 깔려 죽어도 좋으니 방공호 한번만 구경 좀 해봤으면 좋겠다"며 "다크 투어리즘 관광 상품을 개발하면 인기가 많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앞둔 일본은 경성(현재 서울)에 1만개의 방공호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건설을 추진했다. 입구 계단을 내려가면 약 33㎡ 크기의 방과 긴 통로가 있다고 하는데 중간 지점부터 내부가 붕괴돼 안전을 위해 폐쇄한 상태다. 성벽 끝쪽엔 조선시대 축성과 관련된 글을 새긴 돌 '각자성석'도 있다. 여기에는 천자문 순서로 표시된 축성 구간 명칭(14세기), 축성 담당 지방(15세기), 공사 관계자 이름(17세기 이후)이 남아있다. 시는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내자육백척'(柰字六百尺) 각자성석은 14세기 것으로 이 구간의 명칭이 천자문의 60번째 글자인 '내(柰)자' 였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북촌에 사는 조미선(65) 씨는 "이런 유적들을 통해 선조들의 흔적을 볼 수 있어 좋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한양도성 남산구간이 어떤 경위로 발굴됐는지를 알려주는 안내문이 없다는 것"이라면서 "양치기가 양이 도망가 돌을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사해사본이 나왔다는 이야기처럼, 발굴 과정을 상세히 소개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편 시는 내년 11월 전시안내 센터(실내시설) 공사가 끝나면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정식 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2020-11-17 16:09:34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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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77) 삼국시대 무덤 볼 수 있는 '송파구 방이동 고분군'

천문학자들이 별의 스펙트럼을 분석해 항성의 온도, 질량, 구성원소를 유추해내듯 역사학자들은 유적을 조사해 옛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엿본다. 특히 고대에 만들어진 무덤은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해 당대 정치·사회적 특성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방이동 고분군도 그 중 하나다. 이 지역 고분은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사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이후 1981년 제5공화국이 들어서고 강남지역 신도시 개발이 한창 진행되면서 서울은 백제유적과 본격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온조왕이 세운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공주로 천도할 때까지 이 일대가 수도 기능을 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서울의 역사는 조선 시대에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한성백제 시대까지를 아우르게 된다. 600년 수도에서 2000년 수도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8기만 남은 삼국시대 무덤 지난달 26일 방이동 고분군을 찾았다. 지하철 9호선 송파나루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오금사거리 방향으로 10분(608m)을 걸으면 방이동 고분군이 모습을 드러낸다. 푸른 초원에 무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어린 시절 TV에서 본 텔레토비 동산 같다. 가락동에서 온 이모(54) 씨는 "운동하러 자주 찾는 곳인데 한성백제 시대 유적치고는 좀 소박한 것 같다"면서 "제대로 된 볼거리 하나 없지만 조용해서 좋다"고 말했다. 과거 방이동 고분군엔 삼국시대 무덤이 얕은 능선을 따라 즐비했지만 현재 8기만 남아있다. '서울 백제고분의 보존과 발굴' 논문에 따르면, 1976년 6기(1~6호분)가 발굴 조사됐다. 방이동 고분의 외형은 석실봉토분이다. 1·4호분은 궁륭형의 천정을 하고 있고, 6호 고분은 주실과 부곽이 겸비된 터널형의 횡혈식 석실묘로 만들어졌다. 방이동 고분군에서 가장 높은 해발 50m에 위치한 5호분은 장방형의 석곽으로 축조됐다. 당시 전문가 16명으로 구성된 잠실지구유적발굴조사단은 서울시장에 보내는 건의서에서 "방이동 지구의 5기의 석실분 이외 지구는 파괴석실분과 기타 유적들이 있으나 그 훼손된 정도로 보아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채토, 削山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1985년 정부의 '서울 백제고도 문화유적 종합복원계획'이 발표된 이후 6호분 남쪽에서 약 100m 사이에 길을 두고 분리됐던 7·8호분을 추가로 발굴하면서 이 부근에서 2기(9·10호)의 고분이 새로 발견됐다. 이형구 선문대 석좌교수는 "몇 기 남지 않은 서울 백제 고분이 전문가 집단의 오판으로 인해 무참하게 멸실됐다"면서 "이것이 당시 서울 백제유적 보존의 실상"이라고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관계당국은 이미 도로와 택지 조성으로 묘역이 단절됐던 지역을 재매입하고 두 구역 사이의 공간을 연결했다. 보호구역은 원래 면적보다 6배 커진 9000여평으로 넓어졌고, 1988년 9월 13일 사적 제270호 방이동 고분군이 복원 정비 공사를 마치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유네스코 등재는 언제쯤? 이날 방이동 고분군에서 만난 직장인 윤모(35) 씨는 "부동산에 관심이 많아 좀 알아봤는데 여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안 된다' 말이 많다"면서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시는 지난해 서울 소재 백제 한성시기 도성 관련 유적을 대상으로 '서울 백제역사유적 활용 기본계획 수립 연구' 용역을 시행했다. 용역 내용은 ▲서울 백제역사유적과 인접지 실태 조사, 문제점 분석 ▲유산 내 거주하는 주민들의 자긍심 고취 및 홍보 방안 ▲경주 등 고대 역사유적지구 활용 현황 ▲지역의 직·간접적인 경제효과 창출 및 연계방안 등이다. 연구 결과는 세계유산 등재 신청시 학술적 근거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2020-11-03 14:13:43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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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76) 초기 백제 비밀 밝혀줄 '한국의 폼페이'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을축년(1925년) 한강 대홍수 때 서쪽벽이 허물어지면서 발견된 중국 동진제 청동초두 2점에 의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우리나라에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된 1963년 풍납토성 내부면적 22만여평을 제외한 외곽 성벽 2.3km 정도가 사적 제 11호로 지정됐다. 이듬해 서울대학교에서 시굴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한 시기 읍성 정도로만 여겨졌고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서울 곳곳에서 개발 붐이 일던 1997년 풍납 현대아파트 재건축 공사 현장에서 백제토기편이 출토되면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진행됐다. 결론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3년전 지하 4m 깊이에서 툭 튀어나온 백제의 토기조각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한성백제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가 됐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백제를 건국하며 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고고학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초기 도읍지 하남위례성의 위치가 어디냐는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아왔다. 1980년대 송파구 올림픽공원 조성 과정에서 몽촌토성에서 백제 토기와 함께 중국제 도자기, 금동제 과대 금구 등이 확인되면서 이곳이 하남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풍납토성 성벽과 내부 건물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축조 연대가 몽촌토성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단서들이 발견됐다. 제례를 목적으로 한 신전건물 자리인 경당지구와 왕궁 우물로 보이는 어정, 창고, 도로 유구가 잇따라 확인되면서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는 견해가 학계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개발이냐 보존이냐 지난 5일 오후 '한국의 폼페이' 풍납토성을 방문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10번 출구로 나오면 갈색 몸통에 파리채처럼 생긴 흰색 날개바퀴 4개가 달린 풍차와 함께 풍납토성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풍차 조형물은 마을에 바람드리성인 풍납리 토성이 있어 풍납동으로 불리게 된 지명의 유래를 알리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날 풍납토성을 찾은 회사원 김민성(53) 씨는 "서울 한복판에서 백제 사람들이 만든 토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행운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냥 평범한 언덕배기처럼 보인다"면서 "20년 넘게 발굴했다던데 별 진척이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풍납토성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한 건 개발과 보존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발굴조사 작업은 초기부터 진통을 겪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풍납토성 조사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1월 선문대학교 이형구 교수의 제보로 풍납토성 내 아파트 재건축부지에서 터파기 공사 중 백제시대 토기편 등 유물이 출토된 사실이 알려지게 됐다. 발굴 지점은 풍납동 231-3번지 외 39필지 3200여평(이하 가지구)의 면적에 기존 연립주택을 허물고 아파트를 재건축하기 위한 풍납현대연합주택조합부지였다. 가지구는 사적으로 지정 보호되는 풍납토성 동벽에서 약 100m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터파기 공사 구간의 토층 단면으로 볼 때 지표하 2m 남짓 되는 깊이에서 백제시대 유물포함층과 주거지, 수혈로 추정되는 유구의 단면들이 확인됐다. 문화재관리국은 당시 발굴분과 문화재위원장이었던 한병삼 선생을 단장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서울대학교, 한신대학교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꾸려 긴급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풍납토성 내부에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3중의 환호유구와 백제시대 가옥 구조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 자료가 될 20평이 넘는 대형의 6각형 주거지 등이 발굴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당시 발굴조사 과정에서는 영광보다 훨씬 더한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면서 "오로지 새집을 빠른 시일 내에 짓고자 하는 주택조합원들과의 끊임없는 마찰 속에서 실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박한 심정으로 조사를 진행해야 했으며 매일매일 시공사인 현대건설과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고 밝혔다. 이어 "1월 중순부터 시작된 조사였기에 영하 10도를 훨씬 밑도는 혹독한 추위에도 현장 조사를 벌여야 했고 꽁꽁 언 손과 발을 모닥불에 녹여가며 실측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어떤 날은 눈과 비를 맞아가며 땅을 파야 하는 강행군도 불사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역사에 첫선을 보이는 풍납토성의 발굴조사에서 단 한점의 자료라도 더 찾고자 했던 조사원들의 열정과 발굴조사로 애를 태우는 주민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했던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사수하기 위한 고군분투는 현재진행형이다. 풍납토성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는 송파구는 지난달 해당 부지에 대한 강제수용이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에도 땅을 무단 점유하고 있는 삼표산업을 상대로 공유재산 인도소송을 냈다. 구는 "복원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하기 위해 지난 15년간 법 절차에 따라 사업인정고시, 소유권 이전, 사용허가 불허 처분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이번 소송 외에도 공유재산 무단점유에 대한 변상금을 부과하는 등 공장 이전을 위한 조치를 가속화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 복원, 어디까지 왔나? 이달 5일 오후 풍납토성에서 만난 송파구 주민 박모(34) 씨는 "풍납토성이 속히 복원돼 우리 아이들이 교과서 속 역사를 실물로 체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 2015년 풍납토성 복원 사업에 속도를 내기 위해 2020년까지 총 5137억원을 투입해 토지보상을 조기에 끝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시는 작년까지 47필지(1만2891㎡)의 소유권 취득을 완료(삼표공장 5필지 포함)했다. 구체적으로 소규모주택 보상 대상 46필지(5957㎡) 가운데 42필지(5381㎡)에 대한 협의를 마쳤다. ㈜삼표 풍납공장 잔여필지 5필지는 수용 재결 인용에 따른 소유권 이전을 완료했다고 시는 전했다. 시는 풍납토성의 역사성 규명을 위해 올해 1360억원을 들여 보상을 지속 추진할 예정이다.

2020-10-13 15:54:39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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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서울] (75) 대한민국 100년 근현대사 기록된 다리 '한강대교'

이달 21일 오후 시민들이 한강대교에서 산책을 즐기고 있다./ 김현정 기자 한강대교는 서울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본동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1917년 준공됐다. 다리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며 우리 민족이 겪은 격동의 물굽이를 모두 지켜본 한국 근현대사의 말 없는 증인이다. 최초로 가설된 인도교는 노들섬과 노량진간의 '대교'와 노들섬과 한강로간의 '소교'로 나뉘어져 있었다. 강폭이 좁은 용산에서 노들섬 구간은 일반다리 형태로,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노들섬에서 노량진까지의 구간은 선박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교각 간격을 넓힌 트러스 형태로 지어졌다. 소교는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돼 5년 후 확장 재건했다. 이후 1936년 '전차궤도 부설 계획'에 따라 폭이 협소한 노량진 쪽 트러스교 상류 측에 아치교를 건설하기 시작해 이듬해 10월 완공했다. ◆애환과 낭만을 간직한 명물 다리 지난 21일 우리 민족의 숨결과 애환이 서린 한강대교를 방문했다. 일제시대 청년들은 이 다리를 건너 만주와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6·25전쟁 중 다리가 끊겨 피란민 4000여명 중 약 800명이 참변을 당했다. 강북으로 진입하는 주요 길목이어서 5·16 군사정변 때는 도강 수단으로 이용됐는데 이곳에서 혁명군과 혁명 저지군이 처음 조우했다. 동작구 노량진동에 사는 윤모(33) 씨는 "다니던 헬스클럽이 문을 닫아서 운동할 겸 해서 한강대교를 거쳐 이촌한강공원까지 자주 걷고 있다"면서 "돈 안 드는 취미가 생겨 참 기쁘다"며 활짝 웃었다. 이어 "이 다리가 한강에서 제일 오래된 것도 몰랐고 생긴지 100년이 넘은 것도 오늘 처음 알게 됐다"며 "살아있는 박물관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 10일 한국전쟁 당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한강대교를 시 등록문화재로 선정했다. 서울시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유산 중에서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이 지나고 서울의 역사·문화·생활·경제·종교 등 각 분야에서 보존하고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돼 등록된 문화재다. 한강대교는 6·25전쟁 때 부분적으로 폭파 붕괴돼 사용되지 않다가 1958년 복구됐다. 시는 "수해와 전란으로 인해 1917년 당시 모습은 사라지고 변형됐지만 한강대교는 조선시대 정조가 화성에 행차할 때 배다리를 놓았던 곳에 설치됐다"면서 "서울의 남북을 잇는 역할을 지속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흔적이 녹아있는 상징적인 다리로 보존·활용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21일 한강대교에 설치된 SOS생명의전화 옆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김현정 기자 이날 한강대교를 찾은 취업준비생 신모(29) 씨는 "코로나 때문에 카페 알바도 잘리고 취업도 안 돼 우울했는데 여기 와서 바람을 쐬니 기분이 좀 풀린다"면서 "노을도 아름답고 제트스키 타는 사람 구경하는 것도 재밌다"며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자살 예방 문구도 그렇고 SOS전화도 그렇고 안 보이는 곳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새삼 깨닫고 간다"고 덧붙였다. 한강대교 난간에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화려하고 멋진 주인공이라도 힘든 갈등을 겪고 이겨내야 드라마가 완성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갈등이 있어 드라마가 삶이 되고 삶이 드라마가 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나는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 다시 희망으로 걸어봅시다' 등의 자살 예방 문구가 쓰여 있었다. 다리 중간 즈음엔 '지금 힘드신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라는 다정한 말이 적힌 생명의 전화가 달려 있었다. 그 옆엔 사고 발생 시 물에 빠진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구명조끼, 구명환(튜브 형태의 부표), 로프가 든 '인명구조장비 보관함'이 설치됐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에 따르면 지난 2011년부터 올해 6월까지 생명의 전화를 통해 이뤄진 자살 위기 상담은 8113건으로 집계됐다. 이중 투신 직전의 고위험자 1595명을 구조했다고 재단은 전했다. 상담전화 이용자가 가장 많았던 곳은 마포대교로 전체의 65%(5242건)였다. 한강대교 622건(8%), 양화대교 358건(4%), 잠실대교 234건(2.8%)이 뒤를 이었다. ◆공포의 전동 킥보드 지난 21일 오후 한 시민이 한강대교에서 전동킥보드를 타고 있다./ 김현정 기자 이달 21일 한강대교에서는 전기자전거, 전동킥보드 같은 개인형 이동장치(PM·퍼스널 모빌리티)를 탄 시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들은 빠른 속도로 보행자 옆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한강대교는 붉은색으로 표시된 자전거길과 회색 콘크리트로 된 보행길로 구분돼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스피드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직장인 박모(37) 씨는 "퇴근 시간에 차가 너무 막혀서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다닌다"면서 "요새 부쩍 전동킥보드 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너무 쌩쌩 달려 부딪혀 다칠까 봐 무섭다"며 울상을 지었다. 박 씨는 "코로나 때문에 답답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빨리 달리고 싶으면 사람 다니는 인도 말고 바로 옆에 차도를 이용해 줬으면 한다"며 "시내 공원들은 전동킥보드 이용을 금지해놨던데 한강대교에서도 시민 안전을 위해 못 타게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21일 오후 한강대교 북단에 위치한 노들견우카페 근처에서 한 시민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현정 기자 한강대교 북단엔 등대처럼 생긴 노들 견우카페와 직녀카페가 상류와 하류에 각각 위치해 있었다. 노들 견우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은 "매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식은 핫도그랑 닭다리"라면서 "그런데 코로나 사태 이후 이용객이 30% 줄었다"고 말했다. /김현정기자 hjk1@metroseoul.co.kr

2020-09-22 14:54:28 김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