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기획코너 > 다시 기업가 정신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위기속 도전 '승부사'…'한국판 록히드마틴' 체계 구축

"함께 보람 있는 삶,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세계 속으로 뻗어나갑시다"(1981년 9월, 김승연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아버지 김종희 창업주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29살의 젊은 나이에 총수 자리에 올랐지만 위축되지 않고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며 회사를 키운 '승부사'다. 이를 통해 한화그룹의 자산 규모는 1981년 7548억원에서 2024년 112조9000억원으로 약 150배 가까이 성장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2015년 3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재계 2~3세의 승계 이후 자산증가율에서 김 회장은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 이어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지난 8월 1일 취임 43주년을 맞은 김승연 회장의 결단과 추진력을 통한 성장 스토리를 짚어봤다. ◆위기 속 도전 '승부사 김승연' 창업주 김종희 선대회장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김 회장은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한화그룹의 미래를 그려나갔다. 한화그룹은 항공우주 사업을 주도하며 '뉴 스페이스 시대'를 열었고, 태양광 등 에너지·소재 사업은 전 세계에 불어온 탄소중립과 친환경 바람을 이끌어 가고 있다. 바로 김 회장의 통찰력과 뚝심을 바탕으로 추진해온 M&A가 핵심이다. 김 회장은 80년대 취임 직후, 제2차 석유파동의 불황 속에서 한양화학과 한국다우케미칼 인수로 대한민국 석유화학을 수출 효자산업으로 키웠다. IMF 금융위기 직후인 2002년엔 적자를 지속하던 대한생명을 인수해 자산 127조원의 우량 보험사로 키웠고, 2012년 파산했던 독일의 큐셀을 인수해 글로벌 태양광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5년엔 한화에어로스페이스·한화시스템·한화임팩트(삼성테크윈·삼성탈레스·삼성종합화학·삼성토탈)도 인수 과정을 거쳐 성장했다. 사업 고도화와 시너지 제고를 통해 방산 부문은 명실상부 국내 1위로 도약했고, 석유화학은 매출 20조원을 초과하며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한화는 재계 7위의 그룹으로 도약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약진 역시 그룹 성장의 또 다른 핵심이다. 1981년 당시 7개에 불과했던 해외거점은 470여개로 증가했고 미미했던 해외 매출은 2020년 기준 16조7000억원까지 확대되어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직원들을 독려하는 과정에서는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는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본능을 배우라"는 명언을 낳기도 했다. 세계시장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도 지속적으로 키워내고 있다. 방위 사업에서는 K-9 자주포와 레드백 장갑차 등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해외 수출에 나서고 있고, 에너지 사업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 태양광 시장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지난해 5월 한화오션(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수에 실패한 뒤 14년 만에 재도전으로 품에 안은 것이다. 이로써 육해공 삼박자를 갖춰 '한국판 록히드마틴'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신용과 의리' 사람 중심의 경영 철학 김 회장의 경영활동 전반에 녹아 있는 경영 철학은 '신용과 의리'다. 급격히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임직원과 고객은 물론 더 나아가 인류를 아끼고 중시하는 '신용과 의리'의 경영 철학은 지난 43년간 한화를 더 높이 도약하게 한 핵심 정신으로 자리매김해왔다. 한화그룹은 그동안 수 많은 M&A 속에서도 별다른 불협화음 없이 항상 더 큰 도약을 이뤄냈다. 피인수사 직원들에 대한 차별 없는 대우에 더해 상대의 장점까지 배우는 열린 태도가 배경이다. 이 역시 김 회장의 사람 중심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해 특별한 감사를 표했다. 김 회장은 천안함 희생자에 최대의 예우를 직접 고민해 유가족의 채용을 결정한 바 있으며, 로버트 김을 남몰래 지원한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IMF 당시 매각 대금을 줄여서라도 직원들의 고용 보장을 최우선했던 일화나 이라크 건설 현장 직원들을 위한 광어회 공수, 플라자호텔 리모델링 시 전 직원 유급휴가 등은 김 회장의 '신용과 의리'를 대표하는 사례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 확진으로 치료 중인 임직원에게 쾌유를 기원하는 난과 메시지를 남몰래 보내온 일이 알려지기도 했다. 특히 김 회장의 사람 중심 경영은 글로벌 인맥을 통한 민간 외교 활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 회장은 2000년 6월 한미 협력을 위한 민간 채널로 출범한 한미교류협회 초대 의장으로 추대되어 한미 관계의 증진을 위한 민간 사절 역할을 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김 회장은 부시와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 공화당 인사까지 폭넓은 미국 인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이며 파워엘리트 집단인 헤리티지 재단의 에드윈 퓰너 창립자와는 40년에 가까운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00년 기업 한화를 위한 '새로운 도약' 김 회장은 43년의 도약을 발판 삼아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한화그룹은 모태 사업인 방산과 태양광 등 친환경 재생에너지 부문을 강화하면서 항공 우주, 미래 모빌리티와 로봇 부문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김 회장은 우주 사업 등 신사업들이 대규모 장기 투자가 필요한 어려운 길임에도 누군가는 해야한다는 사명감으로 과감한 도전에 나서고 있다. 특히 한화오션 출범을 계기로 육해공 통합 방산 시스템을 갖춘 상태이고, 한화에어로의 차세대 발사체 사업 단독협상자 선정으로 '뉴 스페이스' 시대를 견인할 주도권을 잡았다. 한때 건강이상설이 제기될 만큼 두문불출했던 김 회장은 한화에어로 대전 연구개발 캠퍼스를 깜짝 방문하며 건재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5년 3개월이란 긴 공백을 끝내고 모습을 드러낸 첫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김 회장은 한화에어로 대전 캠퍼스(3월 29일), 한화로보틱스 판교 본사(4월 7일), 한화생명 여의도 본사(4월 25일), 한화생명금융서비스 연도대상 시상식(5월 17일), 한화에어로 창원사업장(5월 20일)을 차례로 방문한데 이어 대전 소재의 한화 이글스 홈구장을 찾아 직관하며 활발하게 현장 경영에 나서고 있다. 그린수소 에너지 분야는 효율을 높인 수전해 기술 개발, 수소 운반을 위한 탱크 제작 기술 확보 등 다가올 수소 사회에 가장 앞서 준비하고 있다. 또 수소 혼소 가스터빈 개조회사를 인수해 친환경 민자발전사업까지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금융계열사들은 앞다퉈 디지털 금융으로의 전환에 나서고 있다. 최초의 디지털손해보험사인 캐롯손해보험을 비롯해 다양한 디지털 솔루션을 기반으로 금융 생활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지난 4월 한화에어로 대전 R&D 캠퍼스 방문 당시 김 회장이 방명록에 "한화의 우주를 향한 도전,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입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스스로 혁신하여 글로벌 챔피언이 됩시다"라는 글을 남긴 만큼 미래에 대한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2024-08-06 10:31:51 양성운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불꽃처럼 나비처럼'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

'화약 없이 근대화를 이룩한 나라는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개발하고...' 화약을 개발해 국가 경제성장의 발판을 다지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 육해공 글로벌 통합 방산기업으로 성장한 한화그룹을 만든 창업자 고(故) 김종희 회장(1922~1981)이 살아온 길이다. 1981년 7월23일 세상을 떠난 김종희 회장은 화약보국이라는 정신 아래 그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워 올린 불꽃은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밑거름이 돼 현재까지 많은 기업인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 "형사처벌은 물론 사재를 털어서라도 보상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배움에 대한 뜨거운 열정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김 회장은 배움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김 회장은 부대리의 북일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 학교는 1912년 부대리 성공회가 설립한 4년제 신명학교다. 교실 2개, 재학생 40~50명인 소규모 학교였으나 김 회장이 성공회의 독실한 신자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부친의 쌀 장사가 어려줘지면서 북일사립학교를 중퇴했다. 1년 여간 학업을 중단했지만 1931년 직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해 배움을 이어갔다. 당시 직산공립보통학교는 충남 지역 최고의 명문학교였다. 김 회장은 성환공립심상학교 고등과 1년을 수료하고, 1937년에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경기공립상업학교(현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경기상고는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드는 국내 최고의 실업계 학교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에 성공했지만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천안 상덕리에서 경기상고까지 통학했다. 매일 새벽 5시30분에 집을 나서 천안역과 서울역, 효자동까지 이동했다. 지금처럼 대중교통이 편리하지 않았지만 김 회장은 2년 내내 결석없이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김 회장은 1940년 11월 경기상고 4학년을 중퇴한 직후 함남 원산의 원산공립상업학교로 전학을 갔다. 김 회장은 1941년 12월에 원산상고를 졸업한 뒤 1942년 1월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했다. 조선화약공판은 1941년 12월 1일에 설립된 신설기업이었다. ◆갓 21세 화학과 첫 인연을 맺어 1942년 스물한 살 김 회장은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하며 화약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성실하게 근무하면서도 끊임없이 화약에 대한 공부를 이어나갔다. 조선이 자주독립하고 발전하기 위해선 산업을 일으켜야 하고 이때 화약이 필요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떠난 뒤 김 회장은 조선화약공판의 지배인으로 임명됐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회사가 어려움을 겪자 미군을 찾아가 화약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군으로부터 사업 진정성을 인정받고 거래를 확대해 외화를 벌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6·25 전쟁 이후 생필품 수요가 급증하면서 관련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김 회장은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거요"라며 화약을 고집했다. 인천상륙 작전을 지휘했던 맥아더 장군은 "한국은 100년이 지나야 회복 가능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김 회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선 화학을 놓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전쟁으로 무너진 건물과 도로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화약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1952년 김 회장은 적산기업이었던 조선화약공판 불하에 참여해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5년 인천화약공장을 신축하고 다이너마이트 전 단계인 폭약 생산에 성공한다. 이후 끊임없는 연구 개발 끝에 다이너마이트의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을 개발하고 다이너마이트 국산화를 이뤄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은 두 번째 쾌거였다. 당시 김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경부 고속도로 공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화약을 전략 공급했다. 김 회장의 예상대로 화약 수요가 폭증하면서 한국화약은 승승장구했다. 1956년 3억8811만환이던 매출액이 1958년에는 8억4707만환으로 급증했다. 1970년 4월부터는 수출을 시작했다. 김 회장은 화약으로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기계, 석유화학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64년 신한베어링을 인수해 한화기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엔 한화솔루션의 전신인 한국화성공업을 설립했다. 이후 보험, 식품, 증권, 호텔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위기에 빛난 진정한 리더십 남다른 열정과 노력으로 김 회장은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바로 1977년 전북 이리(익산) 역에서 화물열차가 다이너마이트 등 대량의 화약을 실은 상태에서 폭발한다. 당시 이리역에는 직경 30m, 깊이 15m에 이르는 큰 웅덩이가 생겼다. 사고로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이재민 약 1만 명 등 80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해다. 특히 당시 폭발이 얼마나 컸던지 이리시 사람들은 전쟁이 난 것으로 착각했을 정도다. 진정한 리더십은 위기에서 빛났다. 김 회장은 주요 일간지에 사과문을 발표하고 최규하 당시 총리를 찾아 형사책임은 물론 사재를 털어서라도 보상하겠다고 밝힌 뒤 약속을 지켰다. 그는 자신의 재산 90억원을 피해보상금으로 내놨다. 기업인으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강조해온 김 회장은 "돈은 정말 필요한 곳에 쓰일 때 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살아갔다. 의리와 외강내유의 사나이 김종희 회장은 젊은 나이 당뇨병과 신부전증으로 1981년 7월 23일에 향년 59세로 타계했다. 사업을 통해 국가에 보답한다는 '사업보국'의 정신은 29세 이른 시기에 회장의 자리에 오른 김승연 현 한화그룹 회장에게 이어져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대한민국 산업계에 남아 있다.

2024-07-30 11:36:46 양성운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신동빈 회장, 현장경영에 '혁신'과 '진취성' 더해 재계 5위 'NEW 롯데' 이끌다

"어떠한 상황에도 지속성장 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실행력이 중요하다. 새로운 시대의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롯데그룹이 될 수 있도록 강력한 실행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최근 경기 불황으로 인해 소비 심리가 위축됐다. 혼란한 국제 정세 등 예측 불가능한 요인들까지 겹치면서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대응할 것인지 기업들의 고민이 짙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불확실한 요인 속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강한 실행력을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경험 많은 기업인의 태동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1955년 2월 14일 신격호 전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977년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신 회장은 학위 취득 후 다양한 기업 환경 경험을 통해 역량을 쌓아올렸다. 1988년까지 약 7년 간 일본 노무라 증권 런던 지점에서 근무를 시작으로 일본 롯데상사를 거쳐 호남석유화학에 상무로 취임했다. 이후 1995년 롯데그룹 기획조정실 부사장을 지내다 2년만에 롯데그룹 부회장에 오르면서 사실상 신격호 전 명예회장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 정책본부장을 겸임하면서 케이피케미칼, 한화마트, 우리홈쇼핑, 하이마트 등을 인수하며 롯데그룹의 덩치를 키웠다. ◆강력한 추진력으로 회사 성장에 박차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에는 언론 앞에 나서지 않아 조용한 성격으로 평가받아 왔다. 실제 재계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에 대해 "조용하고 치밀한 '컨설턴트' 타입의 경영자"라며 "주로 직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고, 많은 말을 하기보다 수치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경영전략을 짠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잔잔한 성품 속에는 사업 성공을 위한 열정과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신 회장은 거침없는 추진력으로 회사 성장을 이끌었다. 신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은 롯데그룹의 적극적인 인수합병 과정의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업 성장 가능성을 본 분야라면 주저하지 않은 것. 특히 신 회장은 2010년 수십 차례 인수합병을 진행해 롯데그룹을 재계서열 5위로 성장시켰다. 2021년에는 롯데쇼핑이 사모펀드 IMM프라이빗에쿼티와 공동으로 국내 홈인테리어 업계 1위 기업인 한샘을 인수했다. 롯데쇼핑이 이 사모펀드에 출자한 금액은 약 3000억원이다. 이후 2022년에는 국내 얇은 구리 소재인 동박을 생산하는 1위 기업 일진머티리얼즈 지분의 53.3%를 약 2조7000억원에 인수했다. 롯데케미칼이 전기차 소재 관련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뒤 처음으로 나온 파격적인 인수합병 행보였다. 그동안 롯데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바이오 산업 분야에도 거침없이 도전했다. 2022년 5월에 바이오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미국 제약회사 브리스톨마이어스큅의 미국 뉴욕주 시러큐스 생산공장을 2000억 원에 인수했다. ◆'직접 보고 확인한다'…아버지에게 이어받은 현장 경영 정신 "아버지(고 신격호 명예회장)로부터 '현장에 가서 자기 눈으로 보라', '보고만 듣고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신 회장이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격호 명예회장에게 물려받은 '현장경영 정신'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 신동빈 회장은 지난 19일 2024 하반기 'VCM(옛 사장단 회의)'에서 경영 목표 달성에 대한 의지를 밝히며 직접 현장 경영에 나서기도 했다. 또 롯데바이오로직스 송도 캠퍼스 착공식, EVSIS 스마트팩토리 청주 신공장 방문, 베트남 롯데몰 웨스트레이크 하노이 그랜드 오픈행사 등에 참석한 바있다. ◆신동빈 회장, 강력한 실행력에 '혁신'을 더하다 신동빈 회장은 롯데의 지속가능성장을 통한 기업가치 높이기에도 속력을 낸다. 신 회장은 그 비법으로 혁신을 강조했다. '2024 하반기 롯데 VCM(옛 사장단회의)'에서도 신 회장은 구체적으로 ▲기존사업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 ▲글로벌 사업에서의 안정적 수익 창출 ▲미래성장을 위한 고부가 사업 확대 ▲재무 건전성 관리 강화 등을 제시했다. 이어 신 회장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의 저서 '혁신자의 딜레마'를 인용하며 "미래를 위해 혁신하지 않는 기업은 결국 선도 지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기존 사업에서 본원적 경쟁력을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신 회장이 제시하는 혁신은 신성장 동력의 발굴 노력과 맞닿아 있다. 신성장 동력의 일환 중 하나로 주목되는 것은 스타트업계 지원이다. 롯데그룹은 스타트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2024 롯데 인베스트먼트 쇼케이스'를 마련했다. 해당 쇼케이스는 롯데 경영진이 유망 스타트업 기술을 직접 체험하고 이들과 신규 사업을 도모하고 투자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준비한 행사다. 해당 행사에는 인공지능(AI) 기반 콘텐츠 제작, 사물인터넷(IoT) 기반 초소형 점포, 자율주행 로봇, 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의 유망 스타트업 16곳이 참여했다. 신 회장은 "유망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발굴하는 것은 새로운 성장의 씨앗을 확보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신 회장은 신성장 동력을 위한 행보로 인공지능 분야에도 집중하고 있다. 계열사 최고경영진과 함께 인공지능 전략을 논의하며 창의, 혁신을 위한 의지를 밝힌 것. 실제 신 회장은 지난 3월7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AI(인공지능)+X 시대를 준비하는 롯데'를 주제로 열린 '2024 롯데 CEO AI컨퍼런스'에 참석했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AI+X는 커머스와 디자인, 제품 개발, 의료,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신 회장의 이같은 진취적인 경영활동은 신격호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으로부터 이어 왔다는 평가다. 신 명예회장의 혁신과 현장 경영에 이어 신 회장의 강력한 실행력이 지금의 '大'롯데가 국내 기업 중 산업분야의 선두주자로 우뚝 설 수 있는 이유다.

2024-07-24 16:46:34 최빛나 기자 2024-07-24 16:46:34 안재선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외유내강' 韓유통산업 발전 이끈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현장·혁신경영'에서 해답 찾았다

"과감한 혁신과 현장중심경영으로 기존 사업의 내실화에 만전을 기해 달라."(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범(汎)롯데가를 창업한 고(故)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서울 잠실에 세계적인 초고층 빌딩인 롯데월드타워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현장의 중요함과 경영의 혁신을 강조했던 신격호 명예회장은 껌장사로 시작해 롯데그룹을 삼성, 현대자동차, SK, LG에 이어 재계 5위 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최근 고금리·고물가 등 글로벌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을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현재 대한민국의 유통산업 발전에 큰 이바지를 했다. 유통뿐 아니라 관광산업까지 성장시키며 사실상 대한민국 '문화'분야를 새롭게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껌장사로 시작해 국내 최대 식품회사로 자리잡기까지 신격호 명예회장은 1944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서 껌 장사를 시작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껌 사업이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롯데 시대가 열린다. 신 명예회장은 1948년 주식회사 롯데를 설립한다. 롯데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를 담아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인 '샤롯데'의 애칭인 '롯데'에서 따왔다. 이후 신격호가 확장한 사업이 성공궤도에 오르면서 1959년 롯데상사, 1961년 롯데부동산, 1967년 롯데아도, 1968년 롯데물산 등 유통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혀간다. 이후 1968년부터 1980년까지 롯데그룹의 식품역량을 키우는 데 속력을 낸다.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한 뒤 롯데칠성음료, 롯데삼강, 롯데리아 등을 잇달아 출범시켰다. 뿐만 아니라 1973년 호텔롯데·롯데전자·롯데기공, 1974년 롯데산업·롯데상사·롯데칠성음료, 1975년 롯데자이언츠, 1978년 롯데삼강, 롯데건설, 롯데햄, 롯데우유, 1979년 롯데쇼핑, 1980년 한국후지필름, 1982년 롯데캐논·대홍기획 등까지 설립하며 유통을 넘어 문화관광으로까지 사업영역을 넓혀 나간다. 이 시기에 롯데그룹이 한국의 '문화'를 새롭게 세우는 데 기여했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롯데그룹은 특히 1997년부터 2008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해 글로벌 기업으로서 위상을 갖추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기에 롯데그룹은 동남아와 중국, 미국 등으로 영토를 넓히는 데도 속도를 냈다. 2006년 롯데쇼핑이 한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상장하기도 했다. ◆혁신, 현장 강조한 신격호 명예회장…안전지향적 경영사고 "망하더라도 제일 늦게 망해야 한다." 롯데는 신격호 명예회장이 자수성가로 이뤄낸 기업이다. 신철호 전 롯데 사장,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등 형제들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데에는 신 명예회장이 매번 강조한 혁신 경영을 비결로 꼽는다. 신 명예회장은 안전지향적 경영을 최우선시하면서도,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외유내강 경영인'으로 알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신 명예회장이 '짠물경영', '현찰경영'으로 유명한 만큼, 확신하는 분야에는 과감히 투자하고 아이디어를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반면 모르는 사업에는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신 명예회장의 이같은 선택과집중 경영이 국내 식품, 유통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다. ◆신격호의 숙원사업 '롯데타워' "서울에 세계 최고 높이의 제2롯데월드를 짓는 것이 여생의 꿈이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서울 잠실에 롯데월드 타워 완공을 평생의 숙원사업으로 삼았다. 롯데월드 개관 직후인 1990년대 초반부터 제2롯데월드를 구상, 잠실 일대에 글로벌 관광 복합단지 조성을 목표로 했다. 롯데월드타워는 전세계 최고층 순위 5위로, 8만6000㎡ 부지에 약 4조200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1987년 사업지 선정 후 2010년 11월 착공해 연 인원 500만명 이상이 투입돼 준공까지 만 6년 3개월, 2280일이 걸렸다. 롯데월드타워가 30여 년이란 오랜 기간에 거쳐 완공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안전성, 항공 운항 영향 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신격호 명예회장이 지반 안정성과 활주로 각도 변경 등을 관련 부처와 완만히 합의하면서 사업을 진행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롯데월드타워는 지하 6층, 지상 123층에 555m에 달하는 빌딩이다. 타워 무게는 75만톤에 달한다. 총 연면적인 8만6000㎡ 부지는 축구 경기장 115개를 합친 크기다. 현재 롯데월드타워는 롯데그룹의 한국 본사로 사용되고 있다. 오피스 공간에는 롯데지주, 롯데케미칼, 롯데쇼핑 등 계열사들이 입주해 있다. 롯데 에비뉴엘에는 롯데마트, 하이마트, 시네마 사업장이 입주해 있고 호텔롯데과 호텔(시그니엘)에는 면세점이 쇼핑몰에는 공실 없이 270여개 업체가 입점해 있다. 2019년을 기준으로 방문자수는 5000만명에 달할 정도로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신격호 정신' 뭐길래 "나에겐 늘 극복해야 할 일들이 있다. 돈을 버는 것만이 내가 추구하는 전부가 아니고 극복할 일들이 있다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낀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한국 경제 발전과 함께 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지난해 말 신격호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연구한 결과가 일본에서 발표돼 이목이 쏠렸다. 현장에서는 재일교포 사업가로 일본에서 사업을 먼저 일군 후 다시 고국인 한국에 재투자해 이를 제조·유통·화학 분야까지 넓힌 과정에서 신 회장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했던 행동 원칙을 높게 평가했다. 또 국가, 조직, 산업 분야 등에서 '스스로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펼쳤던 혁신적 사고'가 신 회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롯데그룹은 정신적 지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의 철학과 신념을 계승하는데 뜻을 함께 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공익사업을 위해 롯데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롯데재단에는 장학재단·삼동복지재단·복지재단이 있다. 해당 재단은 1983년 신격호 명예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된 재단이다. 해당 재단에서는 소외계층, 장애인, 청년기업가 등을 지원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롯데장학재단은 '제1회 샤롯데문학상'을 개최했다. '제 1회 신격호 샤롯데문학상'은 롯데그룹 창립자인 신격호 명예회장의 한국문학과 문화에 대한 열정을 재조명하고,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샤롯데'에서 영감을 받아 그룹명 '롯데'를 세운 신격호 회장의 이름을 샤롯데문학상에 담아 못다 한 소설가의 꿈을 기리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격호 명예회장의 고향인 울산에서의 사회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지난달 초 롯데케미칼, 정밀화학, 이네오스화학, 백화점, 마트, 호텔, 시티호텔, 자이언츠, 건설, 컬처웍스 등 롯데그룹 14개 계열사를 대표하는 임직원 30명은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에서 환경정화 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울산 지역 소외계층과 청년들의 안정적인 학업 활동을 돕고 인재양성을 목표로 한 '신격호 롯데 울산 장학금' 전달식도 매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중고교생 50명과 울산 예체능 학생 30명에게 총 80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울산 지역별로 8000만원씩, 총 4억원을 지원하는 맞춤형 물품지원사업으로, 기존 지원했던 지역인 울산 울주군, 중구, 남구에 이어 북구, 동구 지역을 추가해 사회공헌 활동 범위를 확대했다. 또한 기증식 행사에 참여한 울산 지역 구·군 지자체장과 만남을 통해 물품지원에 관한 자문을 구하고 이후 지원사업에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롯데그룹의 지주회사는 롯데지주㈜다. 롯데그룹은 2019년 9월 말 기준으로 국내에 총 93개의 계열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이중 상장사는 10개사, 비상장사는 83개사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롯데그룹을 설립한 1967년부터 약 57년이 지났음에도 둘째 아들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여전히 신격호 명예회장의 경영 철학을 이어오고 있다. 여기에 신동빈 회장의 장남인 신유열 전무가 최근 경영선에 뛰어든 가운데 3대가 신격호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이어갈 것으로 전해지면서, 공동체와 함께 하겠다는 '신격호 정신'이 빛을 내고 있다.

2024-07-22 13:33:07 최빛나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젊은 총수 구광모 손에 재탄생한 '뉴LG'

"실용주의 조직문화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회장보다 대표라고 불러주세요" 올해로 취임 6주년을 맞은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젊은 총수 답게 과감한 혁신으로 조직을 뿌리채 바꿨다는 평을 받는다. 구 회장은 형식보다는 실용주의를 추구하며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구 회장은 다른 대기업 총수들과 달리 '회장'이라는 직위가 아닌, '대표'라는 직책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이는 그 역할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였다. ◆4대 그룹 중 가장 젊은 총수 '조직문화 변화' 주력 1978년생인 구 회장은 서울 영동고와 미국 로체스터 인스티튜트 공과대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한 해인 2006년 LG전자 재경부 대리로 입사했으며, ㈜LG와 LG전자를 오가며 경영 수업을 받고 단숨에 회장직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대 그룹 총수 중 가장 젊은 만 40세였다. 다만, 그가 어린 나이에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것은 LG그룹의 장자 승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큰 아버지인 구본무 전 회장의 장남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구 회장을 양자로 들이면서 LG그룹 총수의 장남으로 올라서게 된 것. 2018년 6월 구 회장은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직후 가장 먼저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조직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지주회사 대표로서의 역할에 집중했다. 이를 위해 구 히장은 지주회사 대표와 계열사 CEO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전체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상하고 사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집중한 반면, CEO는 구체적인 사업 전략을 짜고 실행해 나가도록 했다. 실제 그는 계열사 현장을 방문하면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어떤 부분이 필요한지,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되는지 가감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라는 말을 매번 거듭했다. 사업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기는 것은 계열사 CEO의 몫이지만, 구 회장은 계열사 CEO들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셈이다. 구 회장은 특히 격식차원에서 진행됐던 그룹 회의도 실용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꿨다. 회장 취임 후 가장 먼저 그룹 차원의 회의체나 모임을 형식보다는 실용에 집중하는 형태로 바꾸고 보고와 회의 문화를 개선했다. 실제 LG의 최고경영진 회의 풍경은 완전히 뒤바꼈다. 그간 임원들의 보고를 전달받는 방식에서 탈피해, 회의 때마다 상황에 맞는 주제를 정하고 토론 중심의 회의가 진행된다. 400명 이상의 임원이 분기마다 모였던 임원세미나도 없애고 필요에 따라서는 외부의 전문가의 강연을 듣기도 한다. 특히 사내 분위기도 진취적인 분위기로 대폭 전환시켰다. 완전 자율 복장 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2020년부터는 시무식도 디지털로 전환했다. 무엇보다그는 대내외 행사에 적극 참여해 조직 내 리더로서 입지를 견고히했다. 프로야구 LG트윈스 구단주인 그는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자 환호성을 지른 데 이어 선수단 회식 자리까지 동행했다. 이후 통합우승 행사에서는 고 구본무 전 회장이 1995년에 직접 마련한 오키나와산 아와모리 소주로 함께 축배를 들며 '광모형'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아울러 그는 LG의 우승을 축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종 이벤트를 실시하도록 한다. ◆미래성장 동력 마련하고 체질개선 구 회장의 실용주의는 곧바로 혁신경영으로 거듭난다. 그는 '고객가치'를 강조하며 비핵심·부진 사업을 줄이고, 배터리·자동차 전장 등 성장동력을 강화했다. 실제 부진 사업인 모바일 사업을 종료하고 ▲LX 계열 분리 ▲LG에너지솔루션 기업공개(IPO) ▲LG 인공지능(AI) 연구원 설립 등을 추진하며 체질개선에 성공한다. 무엇보다 구 회장은 미래 먹거리로 정한 'A·B·C'(인공지능·바이오·클린테크)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5년간 100조원을 쏟아붓는 동시에 절반 이상을 경쟁력의 원천인 연구개발(R&D)에 투자해 미래 성장 동력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이다. 구 회장은 지난 ㈜LG 주주총회에서 "AI, 바이오, 클린테크 등 새로운 성장축을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강화해 10년, 15년 뒤를 대비한 미래 기반 확보에 더욱 힘쓰겠다"며 사업 본격화의 의지를 드러냈다. 특히 그는 AI에 주력하고 있다. 지난 2020년 LG AI연구원을 설립해 초거대 멀티모달 AI를 공개하고 글로벌 파트너사들과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초거대 AI '엑사원'을 앞세우고 미시간대(미국)-서울대(한국)-토론토대(캐나다) 등과 공동 연구 진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 회장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인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고 매해 북미 시장을 찾아 현장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또 미 테네시의 LG전자 생산법인 등을 방문하고,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 투자 허브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찾아 미래준비를 위한 전략을 강구했다. ◆젊은 리더 발굴…역대급 실적 달성 구 회장은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재 발굴에도 진심이다. 지난해까지 외부에서 영입한 임원급 인재만 110여명에 달할 정도다 . 실제 2018년 3M의 해외사업을 이끌던 신학철 부회장을 LG화학의 CEO로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LG글로벌전략개발원장 윤창렬 부사장 등 15명 등이 LG에 합류했다. 무엇보다 구 회장은 잠재력과 전문성을 갖춘 젊은 인재들을 과감하게 기용하고 있다. 6년 동안 여성 임원도 두 배 이상으로 확대한 데 이어 지난해 인사서는 100여명 이상의 신임 상무 발탁해 젊은 리더층 두텁게 만들었다. 실제 100여명의 신임 상무들 중 50% 이상이 40대의 젊은 인재들이었다. 이같은 혁신경영은 양적·질적 성과로 이어졌다. LG전자는 올해 2분기(4~6월)에 시장 기대치를 뛰어넘는 역대급 실적을 달성했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61.2% 올라 2분기 기준 1조 원을 처음으로 돌파했다. 매출액도 전년 동기 대비 8.5% 올랐다. 또 계열사인 LG화학의 생명과학본부는 지난해 사상 최초로 연 매출이 1조2000억원을 넘어섰다. 이에 구 대표는 젊은 총수에 대한 일각의 우려를 해소시키고 리더십을 재평가받았다. 한편, 구 회장은 해마다 신년사를 통해 혁신을 바탕으로 한 구체화된 고객가치 경영 철학을 구성원들에게 적극 알리고 있다. 그는 "대체 불가능한 LG만의 가치를 제공하는데 달려 있다는 믿음으로 올 한 해 '차별적 고객 가치'와 '사업의 본원적 경쟁력 강화'에 더욱 매진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2024-07-17 10:41:06 구남영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어려워도 사람 우선" 뚝심의 표본 구본무 LG그룹 회장

"경영여건이 어려워질수록 경쟁력 확보의 핵심이 되는 우수인재 확보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는 더욱 과감히 집중해 나가야 합니다" 무려 20년간 실무 경험을 쌓고 제 3대 회장에 올라선 구본무 전 회장은 지금의 LG그룹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LG의 비장의 무기인 배터리 사업을 탄생시킨 인물이다. 구 전 회장은 50대의 늦은 나이에 취임한 만큼,'뚝심경영'을 발휘하며 영속기업 LG의 기반을 탄탄히 마련할 수 있었다. 구 회장은 1975년 럭키(현 LG화학) 심사과 과장으로 입사해 첫 근무를 시작했으며 이후 ▲영업 ▲심사 ▲수출 ▲기획 업무 등을 거쳐 20여 년간 차곡차곡 실무경험을 쌓았다. ◆20년간 실무경험 쌓아 LG브랜드 탄생시켜 구 회장은 1995년 2월 22일 그의 나이 50세에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은퇴하며 LG의 제 3대 회장으로 취임 하게된다. 특히 이날 취임식은 구자경 2대 회장의 이임식과 함께 진행했는데, 재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구 회장이 LG그룹의 경영문화를 충실히 습득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구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사업구조 재편으로 '초우량 LG'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하며 그의 경영철학인 '뚝심'을 공공히했다. 구 회장의 경영철학은 지금의 LG가 탄생하는 데서 부터 비롯됐다. 그는 취임 직전 '럭키금성'을 LG로 기업 이미지(CI)를 바꾸고 LG 브랜드를 탄생시키는 데 주도한 인물이다. 당시 사명 변경을 두고 많은 반대가 있었는데, 막대한 비용이 예상되는 데다 '럭키'와 '골드스타'의 입지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부회장이 었던 구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을 위해 사명 변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CI 변경을 추진한다. 이후 1995년 1월 1일 럭키금성을 'LG 브랜드'로 대내외에 알리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게 된다. ◆불모지 배터리 사업 개척…캐시카우 창출 특히 구 회장은 현재 LG의 캐시카우(현금창출원)인 배터리 사업을 도입했다. 구 회장은 1990년 대 초 당시 영국에서 충전식 2차 배터리를 접한 뒤 불모지나 다름 없던 배터리 사업에 도전했다. 그는 2차 전지 샘플을 직접 가져와서 럭키금속에 배터리 연구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기반 사업이나 지식이 없어 굉장히 어려웠음에도 구 회장은 뚝심있게 사업을 밀어붙였다. LG에 따르면 배터리 사업은 2000년 대 초에도 2000억원 가까이 적자를 기록해 내부에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자 구 전 회장이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자. 꼭 성공한다는 확신을 갖고 다시 시작하자. 여기에 우리 미래가 있다"고 임직원들을 다독였다고 한다. 이후 구 회장은 경제불황 속에서도 연구개발(R&D)에 적극 나섰고, 그 결과 전기차 배터리 등 중대형 2차전지 분야에서 LG는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현재의 LG화학은 이를 발판 삼아 탄생한 주요 계열사로 꼽힌다. 실제 이방수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은 지난 7월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LG 이차전지 산업 경쟁력 확보와 오너 경영의 역할' 세미나에서 "1992년도에 이차전지를 시작해 수십 년이 지난 현재 한 산업을 이끌어가는 씨앗이 됐다"며 "이같은 산업은 배터리, 반도체, 자동차 등이 있는데 모두 오너들이 긴 안목을 갖고 투자하고 뚝심 있게 이끌어간 결과"라고 평가했다. 이에 구 회장은 회장 취임 당시 매출액 30조원 규모에서 2017년 쯤은 사상 최대 실적인 160조원을 달성했다. 특히 이는 GS, LS 등을 계열분리한 이후 다섯 배 이상 성장시킨 것으로 비약적으로 신장시킨 셈이다. ◆3대 핵심 사업군 육성 집중 '인재 발굴' 강조 특히 구 전회장은 취임 후 경영철학으로 '신뢰와 뚝심'을 연이어 강조했다. 경영환경이 어려울 수록 선제적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미래 성장에 대항 대비를 철저히 해야한다는 지론이다. 이에 구 회장은 제 2의 경영혁신을 강도 높게 추진한다. '전자, 화학, 통신서비스' 3대 핵심 사업군을 집중 육성해 LG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것.특히 가전, 전자 등 주력사업을 목표로 선제적인 투자를 집중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사업으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구 회장은 LG가의 경영이념인 사업보국,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실천하게 된다. 핵심 기술을 개발하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면서 국가 경제 발전에도 기여한 것. 실제 구 회장도 LG가 영속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인재 육성과 R&D를 꼽았다. 구 회장은 공식 석상에서 신뢰와 인재 관련 발언을 빠트리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07년 신년사와 2008년 컨센서스 미팅을 통해 각각 "경영환경이 어렵다고 사람을 안 뽑거나 함부로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시련 극복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인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인간존중 경영의 참 뜻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며 인재 육성에 대한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특히 구 회장은 2011년 LG인재개발대회에서 최고경영진들에게 "좋은 인재가 있다면 회장이라도 직접 찾아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후 구 회장은 2012년 R&D 인재 확보 차원에서 시작한 'LG 테크노 컨퍼런스'에 매년 빠짐없이 참석했다, 불참한 시기는 건강 악화로 병상에 누워있던 2017~2018년 뿐이었다.

2024-07-15 11:32:33 구남영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원칙을 지킨 경영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45년 동안 '원칙'을 지킨 경영인이 있다. 바로 '참 경영인'으로 불리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초기인 1950년, 스물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한 후 45년 동안 경영 일선에서 동분서주했다. 그는 첫 입사 때부터 '원칙 중심의 합리적 경영'을 지켰으며, 1969년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의 타계 후 2대 회장에 오른 후에도, 은퇴할 때까지 흔들림 없이 그 원칙을 고수했다. 구 명예회장의 원칙 중심 경영은 스스로 만든 신념이 바탕이 됐다. 그는 사람을 중시하는 '인화'(人和)의 경영 철학을 가지고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으로 기술 입국을 도모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어록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1988년 인화원 개원식에서의 개원사가 있다. "기업은 인재의 힘으로 경쟁하고 인재와 함께 성장합니다. 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의 번영과 복지도 인재의 빛나는 창의와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어요. 인재 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입니다." 사람을 중요시하는 만큼 구 명예회장은 인재 육성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부친인 구인회 창업주의 사업을 돕기 전, 그는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며 교사로 근무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인재 육성에 대한 관심과 원칙은 확고했다. 2012년에는 "인재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시간이 지난다고 자연히 육성되는 것도 아니다"라며 "많은 노력을 들여 체계적으로 육성해야 인재가 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원칙을 중심으로 한 경영,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경영이 어떤 결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의 회장 재임 동안 LG그룹은 매출이 260억 원에서 30조 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고, 임직원 수는 2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증가했다. 주력 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 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 계열화를 이루며 지금의 LG그룹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인화와 함께 '강토소국 기술대국'의 신념을 이루는 데에 골몰했다.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할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보자는 절실한 마음과 함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아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LG화학의 토대가 된 '럭키크림'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직접 플라스틱 뚜껑 등을 연구했던 만큼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같은 세대의 많은 경영인들이 사업보국을 외칠 때,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회장 재임 중 '연구개발의 해', '기술 선진', '연구개발 체제 강화', '선진 수준 기술개발' 등을 경영 지표로 제시하며 기술개발과 연구 활동에 아낌없이 지원했다. 1970년대 중반 문을 연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은 공장 가동 전 연구실이 만들어질 정도로 연구개발에 집중했다. 최초의 국내 민간기업 전사적 중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에 이르렀고, 각 공장별 소규모 형태로 운영 중이던 연구실을 통합하고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를 설치했다. 국내외 우수 연구진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고, 파격적인 투자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연구소는 계속 추가됐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켜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하여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가 조성되는 등 회장 재임 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도 구 명예회장이 설립했다. '백색가전은 LG'라는 말은 기술 수준의 대단함과 함께 인테리어 오브제와 같은 아름다운 디자인을 함께 담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의 영역 중 하나로 산업 디자인 분야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1974년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키고, 전문가 육성을 위해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했다. 수치 중심으로 개선과 개발을 계량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만, 산업 디자인 또한 기술 역량 확보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 명예회장의 이 같은 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신념 뒤에는 우리 기술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과 기업의 수준을 한층 선진화해야겠다는 비장한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산기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마음에 품어온 생각은 우리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며,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첨단 산업 분야에서 제품 국산화를 통해 산업 고도화를 선도할 것이며,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해 기업 활동의 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4-07-09 16:26:43 김서현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사람이 먼저다" 창시자 LG구인회…볼모의 땅에 산업강국 구축

"남이 안 하는 일 가운데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어디까지나 국민경제에 유익하고 소비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차체 빼고 다 만든다는 LG가 탄생하기 까지는 '인화단결'을 외친 구인회 창업회장의 정신에서 비롯됐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1940년대 당시 수차례 전쟁을 거치며 볼모지나 다름 없던 우리나라에 '기술입국(技術立國)'을 시키며 피폐해진 국민들의 생활상을 바꾸었다. LG전자의 매출은 지난해 84조 2278억원으로 3년 새 20조원 넘게 늘었다. 영업이익도 같은 기간 3조 1950억원에서 3조 5491억원으로 개선됐다. 주력 사업인 특히 전장 사업은 연 매출 10조원을 돌파하며 LG전자는 4대 그룹 위상을 견고히 하고있다. 이같은 전자 산업강국이 탄생하기까지는 구인회 창업회장의 '개척정신'과 '인화정신'이 밑거름이 됐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당장의 이익보다는 '인화(人和)'를 우선시했다. 이는 구 창업회장이 창업 당시 친인척간 소규모 회사를 운영하면서 서로 신뢰하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자는 정신에서 비롯됐다. 특히 LG는 다른 그룹과 달리 창립 이후 몇 십년 간 잡음이 없었던 회사로 유명한데, 이는 창업자의 경영이념인 '인화단결'을 중심으로 회사가 운영되면서 안정적인 성장을 이뤄왔다. ◆일제강점기, 가족과 '상업' 도전…인화정신 구축 구 창업회장의 경영이념은 일제강점기 시절 원대한 꿈을 품은 그의 청년 시절로부터 구축됐다. 구 창업회장은 끝없는 도전으로 포목상, 청과·어물전, 운수업 등 숱한 시행착오를 겪은 뒤 47년 럭키크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업인생을 걸었다. 1930년 대 당시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인해 플라스틱 칫솔 하나 만들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하지만 구 창업회장은 집안을 설득해 옷감을 떼다 파는 포목점을 개업하며 전자 산업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구 창업회장 집안은 조부가 조선시대에 높은 벼슬에 올랐을 만큼 뿌리 깊은 유교 집안으로, 상업은 비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구 창업회장은1931년에 진주에서 첫째 동생 구철회와 함께 구인회상점을 설립해 포목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둘째 구정회씨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청 토목과에 잠시 근무하다 형의 사업을 도왔다. 이후 구 창업회장은 광복 직후인 1947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화학공장 건물 일부를 사들여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화장품 크림을 만들었다. 락희화학경영도 대부분 가족이나 사돈(허씨)들이 도맡아 했다. 47년 락희화학 설립당시 생산담당이었던 김준환씨를 제외하면 구 회장, 둘째동생 구정회,영업담당 허준구(첫째 동생 철회씨 사위)씨 등으로 사실상 '가족기업'이었다. 이에 구 창업회장은 ▲인화단결 ▲개척정신 ▲연구개발 등을 중심으로 회사를 경영했으며 현재도 그의 정신이 이어져오고 있다. 인화정신을 바탕으로 구 창업회장은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내 최초로 사출성형기를 도입하여 플라스틱 사업을 시작했다. 전쟁 등 어수선한 시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는 대부분의 락희화학 임원들의 만류에도 구인회 창업회장은 플라스틱 연구 개발을 시작한 것, 구 창업 회장은 "세상살이란 눈을 크게 뜨고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살아야 하는 법이다. 눈 앞의 이익만 살피거나, 어려운 일을 피하고 요령 부리며 산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또 한 번 도전해 보자" 며 임직원들을 다독이며 인화와 동시에 '개척정신'을 발휘했다. 이후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 산업시설의 45% 이상이 파괴된 가운데서도 편리한 플라스틱용품을 공급받아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된다. 구 창업회장은 이때 쌓은 제조 기술을 발판으로 구 회장은 1959년 주식회사 금성사(지금의 LG)를 세우며 재벌을 형성했다. 이후 구 창업회장은 라디오, TV 등 전자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며 산업 볼모지에 '기술입국(技術立國)'을 성공했다. 이에 다. 이에 국내 생산과 고용을 끌어올리며 국민 생활 수준을 크게 개선시킨다. ◆개척정신, 한국경제 도약 기틀 'AI기업 전환' 구 창업회장의 인화정신과 개척정신은 한국경제가 도약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하게된다. 구 창업회장의 경영철학 중 하나인 '연구개발'은 그의 개척정신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생산업자가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이 만들어 대는 일도 애국하는 길이다. 군인들이 일선에서 싸우듯이 우리도 새로운 사업을 착실히 추진해서 반시 성공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구 창업회장은 나라의 문화 발전에도 힘쓴다. 그는 생전 가족들에게 "돈을 벌기만 했는데 사회에 기여하려면 무슨 방면에 쓰면 좋을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LG는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에 문화재단의 설립 계획서와 함께 허가원을 제출했고 당시 정부는 크게 환영하면서 문화재단 설립을 승인했다고 한다. 이에 탄생한 것이 우리나라 기업 최초의 공익 재단인 연암문화재단이다. 구 창업회장의 개척정신을 이어 LG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LG전자는 전 세계 가정을 LG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방침이다. 이에 최근 1000여 개 브랜드의 5만여 종, 수십억 대의 전자기기를 한 번에 관리할 수 있는 '스마트홈' 플랫폼 앳홈(Athom)을 인수했다. 특히 LG의 AI연구원은 지난 2021년 초거대 AI '엑사원'을 선보였다. 지난해 멀티모달(언어와 이미지 양방향 생성) 모델로 진화한 '엑사원 2.0'을 공개했다. LG생명과학 본부는 지난해 연 매출 1조원을 넘겼다. 이어 최근에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신약(신장암 치료제·포티브다)을 보유한 아베오 파마슈티컬스를 인수해 미국 시장의 신약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이다. 실제 LG화학은 최근 연구개발(R&D) 지원을 늘리고 있다. 신약 개발을 위한 R&D 예산을 2020년 1740억원에서 지난해 약 4000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2024-07-04 16:31:33 구남영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할아버지 도전정신 이어받은 정의선 회장…글로벌 톱3 안착

범(汎)현대가를 창업한 고(故) 정주영 선대회장과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빅5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시킨 정몽구 명예회장 그리고 현재 현대차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의선 회장은 전통 자동차기업을 넘어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전환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정주영·정몽구·정의선 회장으로 3대째 이어진 경영 스타일은 기술과 품질에 대한 열정이라는 DNA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정의선 회장은 도전 정신을 바탕으로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톱 3로 도약함과 동시에 친환경차 시대에 리딩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글로벌 톱3 자동차 회사로 성장 2020년 현대차그룹 회장직에 오른 정의선 회장은 고급화와 전동화, 세계화에 집중하며 지휘봉은 잡은지 불과 2년만에 글로벌 차량 판매 세계 3위라는 실적을 이뤄냈다. 고급 승용 부문은 제네시스로, 전기차는 현대차 아이오닉 시리즈, 기아 EV 시리즈로 세계 시장에 안착시켰다. 특히 신흥시장은 물론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생산 공장을 구축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점유율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이같은 성과를 이끌어 내기까지 정 회장은 묵묵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경영을 보고 배웠다. 그는 1999년 현대차 구매실장으로 입사해 현장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후 영업지원사업부장(상무), 국내영업본부장(전무), 현대차·기아 기획실장(부사장), 기아 해외담당 사장 등을 거쳐 2009년에 현대차그룹 부회장직에 오르며 본격적인 경영권을 잡았다. 이같은 경영 수업을 받으면서 정 회장은 튀거나 도발적이기보다 '안정적이고 차분함'을 유지했다. 제네시스 EQ900 출시 행사에도 정몽구 명예회장의 한걸음 뒤에서 묵묵히 경영을 배웠다. 이후 2020년 정 명예회장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현대차그룹 회장에 오른다. 정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열정은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대차그룹 회장 취임 1년여만인 2021년 정 회장은 영국 자동차전문지 오토카가 주관하는 '2021 오토카 어워즈에서 이고니시스 트로피를 수상했다. 이시고니스 트로피는 오토카 어워즈 중 최고 영예의 상으로 오토카 측은 "지난 10년 현대차그룹은 현재 세계 굴지의 자동차 그룹으로 성장했으며, 정의선 회장이 이러한 변혁의 원동력이었다"며 "10년 전만 해도 현대차·기아는 흥미로운 브랜드가 아니었지만 정의선 회장 리더십으로 주요 선두 업체들과 대등하게 경쟁하며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밝혔다. 뿐만아니라 정 회장의 최대 업적은 취임 3년 만에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토요타와 폭스바겐그룹에 이어 글로벌 톱3 완성차 업체로 성장한다. 수익성도 역대 최대를 기록하며 현대차·기아의 2년 연속 역대 영업이익을 이끌었다. 이같은 성장세는 2023년으로 이어졌다. 지난해는 전년도보다 6.7% 성장한 730만2451대를 판매하며 톱3 체제를 공고히 유지했다. 높은 판매실적을 바탕으로 현대차·기아의 영업이익도 역대 최고치를 잇달아 경신하고 있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합산 26조7348억으로 약 30조 시대를 눈앞에 뒀다. 이는 현대차·기아가 2011년 합산 영업이익 11조5279억원으로 처음 10조 원을 돌파한 뒤 12년 만에 20조 원의 벽을 돌파한 것이다. 이에 따른 평가도 이어지고 있다. 정 회장은 미국 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모터트렌드가 선정한 '2024 자동차 업계 인물 50인'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미래 모빌리티 리딩 기업으로 도약 "전기차 시대에는 모든 업체가 같은 출발선상에 서 있다. 전기차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한다. 시장과 산업을 리드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개선하고 변화하자." 정 회장이 현대차그룹을 세계 톱3 자동차 회사로 역대급 실적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술의 진화와 전동화, 미래 모빌리티가 자리하고 있다. 정 회장은 제네시스 브랜드를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과 세계 무대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오랜기간 고성능 브랜드 'N'의 기술 역량을 강화하며 현대차그룹의 브랜드 이미지를 한단계 높였다. 특히 제네시스 브랜드는 국내는 물론 북미와 유럽지역에서의 프리미엄 차량으로 안착했다. 또 N은 현대차그룹의 고성능차에 대한 갈증을 완벽하게 해결했다. 현대차 고성능 N브랜드는 최근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에서 클래스 우승과 함께 9년 연속 완주에 성공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또 정 회장은 전기차를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는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서도 적극적인 투자를 진행하며 세계 시장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다. 1990년대부터 전기차를 연구해왔던 현대차는 전기차시장이 개화하자 대규모 투자를 배팅해 '아이오닉' 시리즈를 내놓았다. 기아도 EV 라인업을 확대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전동화 전환에 적극 대응하며 토요타를 따돌리고 앞선 기술력을 확보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 회장은 전기차시장이 캐즘(일시적 수요정체)구간에 진입했음에도 생산라인과 신공장 건설 계획을 유지하기로 결단했다. 그러면서도 빠르게 증가하는 하이브리드차 수요에도 신차 출시 등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결과 캐즘의 한파에도 올해 1분기 역대 최대실적을 기록했다. 정 회장은 친환경차를 넘어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도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부터 29년만의 새 공장인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을 짓고 있다. 정 회장은 이곳을 전기차 생산 허브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또 현대차그룹은 미국 전기차 전용공장 건설도 애초 2025년에서 2024년 10월로 앞당겼다. 연간 30만대 규모의 공장은 올 하반기부터 양산에 들어간다. 특히 미국 전기차 공장에서는 전기차·하이브리드차 생산과 함께 수소 생태계의 중요한 축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미래차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세계 전기차시장에서 '퍼스트 무버' 지위를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이다. 여기에 현대차는 현재 서울시 강남구에 짓고있는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는 105층이 아닌 55층으로 낮춰 짓기로 최종 결정했다. 2014년 한전 부지를 사들여 그룹의 초고층 통합사옥을 세우겠다는 결정을 10년 만에 바꾼 것이다. 이는 보여주기보다 회사에 맞는 내실 다지기로 보인다. 송파구 롯데타워(123층)가 이미 '국내 최고' 타이틀을 선점한 만큼 초고층을 고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막대한 투자금을 건축비용에 사용하기 보다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고도 성장을 이끌기 위한 투자를 확대헤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미래 모빌리티 시장의 '퍼스트 무버' 지위를 공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2024-07-01 16:07:55 양성운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불도저' 정몽구 명예회장, 현대차그룹 글로벌 위상↑

'품질·현장 경영'으로 글로벌 시장의 신뢰를 확보한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차그룹의 브랜드 위상을 한단계 도약할 수 있는 성장동력을 마련했다. 바로 자동차의 핵심 부품인 철을 생산하는 제철 사업부터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를 탄생시킨다. 정주영 선대회장이 포니로 현대차를 알렸다면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차의 제네시스 브랜드를 프리미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국내 완성차 브랜드 가운데 최초로 프리엄 브랜드 출시를 알린 것이다. ◆아버지 꿈…그리고 과감한 배팅 정 명예회장은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불도저 식으로 일을 시작하고 보는 정 명예회장의 엄청난 추진력과 결단력에서 나온것이다. 이같은 정 명예회장의 능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빠른 시간 내에 '글로벌 자동차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아버지 정주영 선대회장의 못다 이룬 꿈인 제철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2004년 현대차그룹에서 한보 철강 당진 제철소를 인수 한 것이다. 제철소 건립을 위해 10조원 가까운 투자를 단행한 정 명예회장의 결단력 덕분에 현대차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수 있었다. 당시 무리한 투자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 명예회장은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자동차를 생산하는데 고품질의 철강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단순히 철강재를 확보하는것을 넘어 다양한 종류의 철강재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든것이다. 특히 자동차의 기계적인 성능을 비롯해 경량화는 물론 디자인적인 요소까지 좌우하는 것이 철강재다. 자동차 생산에 가장 필요한 제철소까지 확보함에 따라 현대차는 독보적인 그룹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 정 명예회장은 2014년 그룹 운영의 효율성을 높기이 위해 '통큰 배팅'을 한다. 바로 한전 부지에 10조원을 과감하게 배팅한 것이다. 당시 낙찰가는 10조 5500억원에 달했다. 정 명예회장은 한전 부지를 활용해 그룹 내 빠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부품사와 계열사를 한 곳으로 모아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도 당시 글로벌 5위 완성차 제조사 위상에 걸맞는 브랜드 이미지, 사업공간 확보 등을 위한 과감한 투자였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현대차의 격을 높이다 정 명예회장은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고급차 수요를 분석하고 제네시스 브랜드를 현대차 내 프리미엄 브랜드로 만들어냈다. 실제 지난 2016년 1월 4일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그룹 임직원들이 참석하 가운데 진행한 시무식에서 정 명예회장은 "최고의 품질과 제품 경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신차를 고객에게 제공해 브랜드 가치를 획기적으로 제고해야 한다"며 "'제네시스'브랜드를 세계 시장에 조기 안착시키고 브랜드 차별화를 위한 전사적 노력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차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시 '제네시스'브랜드의 첫 차인 EQ900(해외명 G90)와 제네시스 G80도 해외 고급차 시장에 출시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또 정 명예회장은 2017년 대내외 불확실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경영 방침으로 '내실강화, 책임경영'을 제시했다. 새로운 미래 성장을 적극 추진하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은 자율적이고 책임감 있는 조직 문화를 구축해 임직원들의 역량을 집중, 대내외 불확실한 환경을 극복해 나가고, 미래 성장을 위한 토대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특히 "연구개발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자율주행 등 핵심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 변화를 선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의 적극적인 투자 결정으로 현대차그룹은 미래 모빌리티 기술 선점을 위한 국내 및 글로벌 연구소뿐 아니라 스타트업 등과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의 협업을 통해 미래 기술 연구 역량을 강화했다. ◆세계가 인정한 경영 철학·통찰력 정 명예회장은 2021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 자동차산업 최고 권위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측은 정 명예회장을 '2020년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선정하며 "현대자동차그룹을 성공의 반열에 올린 글로벌 업계의 리더"라고 평하고 "기아차의 성공적 회생, 글로벌 생산기지 확대, 고효율 사업구조 구축 등 정몽구 명예회장의 수많은 성과는 자동차산업의 전설적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2001년 '자동차 명예의 전당'으로부터 '자동차산업 공헌상'을 수상했으며, 2020년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으로 또다시 세계 자동차산업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2004년 '비즈니스 위크' 최고 경영자상 ▲ 2005년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 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09년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 밴 플리트상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상 등을 수상했다. 이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아버님은 현대차그룹을 존재감이 없던 자동차 회사에서 세계적 자동차 기업으로 성장시키셨다"며 "탁월한 품질과 성능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은 현대차그룹의 제품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토대가 되었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이어 "정 명예회장은 자동차를 사랑하는 분이셨으며, 지금도 정 명예회장의 경험과 철학, 통찰은 현대차그룹이 더 위대한 기업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며 "기존의 틀을 과감히 탈피하고, '인류를 위한 진보'라는 사명을 실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 명예회장은 자동차를 넘어 사회공헌 에도 앞장섰다. 정 명예회장은 대표적으로 사재 8500억원을 출연해 미래인재 육성, 소외계층 지원, 문화예술 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익사업을 펼치는 '현대차 정몽구 재단'을 2007년 설립했다.'현대차 정몽구 재단'은 지난해까지 13년간 사회공헌 사업에 총 2219억원을 집행했으며, 직간접 수혜 인원만 해도 83만여명에 달하는 등 사회 곳곳에서 희망의 사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차의 외형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혁신을 일으켰으며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발전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 마련에 힘을 쏟은 주역이다.

2024-06-26 13:44:17 양성운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세계 車 시장 흔든 정몽구 회장의 '품질·현장 경영'

정주영 선대회장이 쌀가게부터 시작해 자동차, 건설, 조선산업에 이르기까지 국내 굴지의 기업인 '현대'를 구축했다. 큰 틀에서 현대자동차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보면된다. 정 선대회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1990~2010년까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며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는 핵심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특히 1997년 한국 경제를 강타한 'IMF 사태'에도 기아(당시 기아자동차)를 흡수 합병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회사로 성장시켰다. '품질·현장 경영'의 대명사인 정몽구 명예회장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세계적인 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제 2세대 기업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품질 경영' 전 세계 車 업계 주목 현대차그룹을 세계 자동차 역사상 유례없는 짧은 기간에 글로벌 톱 5로 올려놓은 정몽구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재계를 대표하는 경영인으로서, 대한민국 경제와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그의 기업가 정신은 아직도 현대차그룹의 DNA로 작용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의 '품질경영'은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현대차·기아는 1990년대 후반만 해도 미국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형편없는 품질로 조롱을 받곤 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품질경영에 총력을 기울여 불과 10년 사이에 이런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차 경영을 맡은 1999년 수출현장 점검차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현대차는 품질문제로 미국 소비자의 리콜요청이 쇄도했다. 충격에 빠진 정 명예회장은 귀국하자마자 글로벌 자동차 품질조사 기관 J.D파워에 품질 컨설팅을 받도록 지시하며 품질 개선에 역량을 집중했다. 특히 1999년 현대·기아차의 '품질경영'은 '그레이스 슬라이딩 도어 사건'의 영향이 컸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당시 울산 공장을 갑자기 방문해 조립이 끝난 승합차 그레이스의 슬라이딩 도어를 20여 차례 힘껏 여닫고, 결국 문이 슬라이딩 레일에서 이탈하자 "처음부터 다시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후 현대·기아차는 품질에 문제가 있으면 곧바로 생산라인을 세웠고, 신차 출시도 품질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일정을 연기했다. 이후 정 명예회장은 파격 마케팅을 통해 세계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에서 품질을 인정받게 된다. 바로 '10년 10만 마일 워런티(보증수리)'다. '2년 2만4000마일 워런티'가 일반적이던 시절이어서 현대차의 마케팅은 파격적이었다. 시행 초기 토요타·혼다 같은 일본 경쟁사들은 '미친 행동'이라며 현대차를 비웃지만 그 결과는 대성공했다. 일본차들도 현대차를 따라 품질보증 수위를 높이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2004년에는 '쏘나타'가 미국 J.D파워 품질조사에서 일본 토요타를 제치는 쾌거를 이뤘다. ◆'현장 경영'으로 세계 시장으로 영토 확장 제품의 품질에 자신감을 얻은 정 명예회장은 전 세계로 영토 확장에 속도를 높였다. 현대차그룹의 글로벌화하는데 정 명예회장은 선두에서 임직원을 이끌었다. 정 명예회장은 '현장 경영'을 통해 안정적인 글로벌 생산 포트폴리오를 수립하고 수많은 자동차산업 위기에도 현대차그룹이 생존하고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정 명예회장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해외공장 건설에 대한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결단으로 미국, 유럽, 중국, 러시아, 브라질, 멕시코 등 아프리카를 제외한 전 대륙에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해 고도 성장과 위기에 강인한 체계를 창출했다. 전 세계 균일한 고품질의 생산공장을 적기에 건설할 수 있는 표준공장 건설 시스템도 확립하고, 전 세계를 발로 뛰며 현장에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현장경영을 펼쳤다. 특히 현대차그룹이 미국과 유러브 중국 등 주요 시장은 물론 신흥 시장까지 빠른 속도로 생산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 명예회장 체제 하에서 개발한 표준공장 건설 시스템이 꼽한다. 전세계 공장에서 균일한 고품질의 생산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시장이 필요로 하는 시점에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세계 곳곳을 발로 뛰며 현대·기아차 거점의 생산품질과 시장 상황을 점검하는 '현장경영' 역시 정몽구 리더십의 특징 중 하나였다. 2011년 유럽 재정위기에 따른 글로벌 자동차시장 위축 당시 여러 차례 유럽을 찾아 "위기의 진원지인 유럽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유럽에서 길을 찾으면 글로벌 시장의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다"며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일본 업체들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반격에 나서 2012년에는 미국을 찾아 "경쟁업체들의 물량공세나 할인공세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까지 현대차·기아가 지속해온 '제값 받기' 정책을 통한 경영 내실화 강화로 대응하라"고 주문했다. 2016년에는 러시아, 슬로바키아, 체코, 미국, 중국 등 한 달여 사이에 5개국을 오가는 강행군을 펼치며 왕성한 열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당시 정 명예회장이 3개월 간 현장 경영을 위해 이동한 거리만 4만4000㎞에 달했다. ◆글로벌 인재 영입 '승부수' 현대차그룹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순혈주의' 전통이 강했지만 정 명예회장은 이같은 인사 정책을 과감하게 버렸다. 2000년대 초반 전 세계 시장에 기술력을 입증하며 회사 브랜드를 끌어올린 정 명예회장은 발빠르게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미래 먹거리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정 명예회장이 현대차·기아를 이끈 이후 최초로 글로벌 인재를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는 전 세계 소비자들이 자동차를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닌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을 미리 감지하고 디자인 강화에 나선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BMW의 크리스 뱅글, 아우디의 월터 드 실바와 함께 유럽 3대 자동차 디자이너에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2006년 기아차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예감은 적중했다. 기아차는 2006년 피터 슈라이어의 영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아차는 제대로 된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구축하지 못했으나 피터 슈라이어는 이른바 '호랑이 코 그릴'을 통해 패밀리룩을 탄생시켰다. ▲깔끔한 외관이 돋보이는 K3 ▲수입차를 연상케하는 K5 ▲강인한 외관이 인상적인 K7 등이다. 그의 부임 후 기아차는 '레드닷 디자인상'을 5년 안에 무려 10개의 차종에서 수상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벤틀리 전 수석 디자이너 출신의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루크 동커볼케 현대디자인센터 수장(전무급)으로 영입했다. 그는 내년 상반기부터 일하게 된다. 벨기에 출신인 동커볼케는 23년간 자동차 업계에서 일해왔다. 최근에는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독일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3회, '올해의 유럽 디자이너상' 15회 등을 수상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동커볼케는 내년 상반기 현대차에 합류해 제네시스 및 현대차 디자인을 이끌게 된다. 현대차그룹은 정 명예회장이 지휘봉을 잡을 당시 계열사 10개, 자산 34조원을 보유했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이 이끌면서 현대차그룹은 2020년 계열사 54개, 자산 248조원을 보유한 글로벌 자동차 회사로 성장했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차그룹의 역사를 이끈 주역이다.

2024-06-24 15:52:27 양성운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정주영, 한국 산업 발전의 신화를 쓰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될 수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정주영 명예회장) '도전과 성실'의 아이콘인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된 한국이 고도의 성장을 이뤄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다. 특히 글로벌 경기 침체 장기화와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위기에 빠진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끄는 기업인들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그의 경영 철학을 되짚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견해다. 정주영 회장은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불어넣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재 제일주의'를 중심으로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이 있다면 정주영 회장은 생산 혁신을 끌어내며 우리나라의 자동차와 건설, 조선산업 등의 고도화를 이뤄냈다. ◆도전과 성실함으로 일궈낸 기적 정주영 회장은 현대를 '그룹'으로 키우기까지 유난히 위기를 많이 겪었다. 하지만 성실함과 도전, 섬세함으로 보란 듯이 극복했다. 정주영 회장은 일본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시절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고향인 강원도 통천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농부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매일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농부가 되는 걸 포기하고 가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부친에게 붙잡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돈을 훔쳐 학원에 가기도 하는 등 그는 모두 네 차례에 걸친 가출을 단행한 끝에 마침내 서울에 정착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공사장의 막노동, 공장에서 직공 등을 하며 하루하루 버티던 그는 2년여 만에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의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그는 배달 뿐만 아니라 경리까지 같이 하면서도 일을 잘해 사장으로부터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쌀가게 주인은 정주영의 성실함을 믿고 가게를 물려줬다. 청년 정주영은 서울 중구 신당동의 길가에 사글세로 가게를 얻어 서울에서 제일가는 쌀가게를 만든다는 포부로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의 나이 23살이었다. 젊은 나이에 자신의 첫 사업인 쌀가게 경일상회를 성공시키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고 실제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불과 2년여 만에 위기가 찾아왔다. 1937년 여름 만주의 노구교에서 총격전을 주고받은 사건이 발단이 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조선총독부가 전 시체 제령을 내리고 미곡 통제와 함께 쌀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전국의 쌀가게는 일제히 문을 닫아야만 했다. ◆첫 사업 실패…현대 시작을 알리다 하루아침에 가게 문을 닫은 정주영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현대자동차의 모태인 '아도 서비스'다. 첫 시작은 여의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사업장이 불타버리면서 빚더미에 앉았다. 당시 외제 차 4대와 수리하고 있던 차 2대까지 불에 타면서 물어줘야 할 돈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정 회장은 쌀가게를 운영할 때 알게 된 삼창정미소의 주인 오윤근을 삼고초려 한 끝에 3500원을 빌렸다. 아무런 담보도 없이 오로지 신용만을 걸고서 융통한 돈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그돈으로 빚을 갚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아도서비스'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한 무허가 수리 공장이긴 했지만 돈을 조금씩 벌기 시작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통치는 젊은 그를 또 한 번 위기로 밀어넣었다. 일본은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데 이어, 그 이듬해 5월에는 기업정비령을 내렸다. 이때 '아도서비스'는 일진공작소에 강제 합병된다. 이후 그는 운송업에 뛰어들어 광석을 운송하는 하청일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정주영 회장은 일본으로부터 압수한 기업의 땅 일부를 미군정청에서 얻어내 서울 중구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이게 바로 '현대'라는 상호의 시작이다. 초창기 '현대자동차공업사'는 미국 병기창의 하청을 받아 일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엔진을 교체하는 작업도 했다. 해방 이후엔 늘어난 교통량 덕분에 '현대자동차공업사'가 성장가도를 달렸다. 일감이 많아지면서 직원 수도 1년여 만에 8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 중 미군부대에서 건설업자의 계약을 보고 차량 수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금액이 거래되는 것을 체감했다. 젊은 정주영은 자동차를 넘어 건설까지 사업을 넓혔다. 현대건설의 모태가 된 '현대토건사'다. ◆혁신의 아이콘 자동차·건설·조선까지 그의 과감한 도전은 현대차의 첫 자동차 독자 모델 개발이라는 혁신으로 이어진다. 그는 한국의 국가대표로 활약할 고유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1975년 12월 포니를 탄생시켰다. 포니는 후륜구동의 4도어 세단으로, 현대차의 첫번째 독자 생산모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다. 이후 포니는 한국의 대표 공산품으로써 1986년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했고, 이듬해 수입 소형차 부문 판매 1위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현대차는 포니를 시작으로 쏘나타, 그랜저 등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대표 모델을 차례로 선보였다. 자동차가 달리기 위해선 반드시 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주영 회장은 1970년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나의 관심사는 이 나라를 보다 균형 있게 발전시켜 보다 충실하고 질 높은 번영으로 이끌어 영광스러운 국가,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만드는 것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가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그의 염원대로 한국 경제 고속 성장의 동력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정주영 명예회장은 해외 사회간접시설 건설까지 수주하며 현대건설의 경쟁력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인 주베일 지역의 산업시설을 위한 신항만 공사다. 이는 세계 건설업계에서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손꼽히는 거대 프로젝트로 세계적인 건설사들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현대건설에게 무모하다는 평가가 이어졌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치며 경쟁력을 증명했다. 창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정주영 회장의 혁신은 조선으로 이어졌다. 정주영 회장이 현대중공업을 탄생시키는 과정(1970~72년)에서 만들어진 일화도 있다. 조선소를 만드는데 필요한 돈을 빌리러 영국의 바클리은행을 찾았는데 은행 측에서 거절하자 은행의 담당 인원에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보이면서 한국의 조선 기술을 설명해 임원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1974년 울산조선소를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 건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조선소로 만들기도 했다. 이는 전 세계 유일무이한 것으로 조선사에 기록을 남겼다. 도크가 일부 완성되면 바로 그 위에서 선박을 제작해 나가는 방식이다. 정주영 회장은 한국 경제 발전과 함께 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신념 하에 자신의 호인 '아산'을 딴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교육, 의료 등의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아산병원으로 대표되는 의료를 비롯해 장학, 복지, 학술 연구 등의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주영 회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과 개척 정신으로 자동차 뿐만 아니라 건설, 철강, 조선 등의 산업을 일으키며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이끌었다. 현대차그룹은 정신적 지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철학과 신념을 계승해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정신과 통찰력은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지금의 시대까지 관통하고 있다.

2024-06-20 17:32:30 양성운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과감하게, 그러나 사람과 함께' 최태원 SK그룹 회장

18일 SK하이닉스가 23만 원에 도달하며 신고가를 기록했다. 뉴욕 증시에서 인공지능(AI) 관련 주들이 관심을 받으면서 1년 내 신고가 갱신에 성공했다. SK그룹의 복덩이 중 복덩이로 불리는 SK하이닉스의 승승장구는 어찌보면 당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불과 10여 년 전, SK가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기 전만 해도 반도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닌 '계륵' 취급을 받았다.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해도 시장 선도가 어렵고 급변하는 기술 세태 속에서 이익을 내기 쉽지 않아서다. 많은 기업이 인수를 포기하던 때,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인수를 결심한다. 그의 '과감성'과 '인재경영'이라는 기업가 정신이 바로 오늘의 SK하이닉스를 있게 했다. 지난 2012년,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던 당시 최 회장은 여느 때 보다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기준 하이닉스반도체는 시가총액 16조 3000억원에 연간 매출 10조3960억원, 영업이익 3250억원을 기록했다. 연간 매출로는 흑자를 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기 적자는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반도체 시장 업황이 나쁜 탓도 있었지만, 최첨단 기술을 쏟아부어 시장을 선점해야만 하는 특성상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고도 이익률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효성, 현대중공업, STX는 하이닉스 인수를 중도 포기했다. 최 회장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이닉스를 인수한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책임경영'을 선언 후 공동 대표를 맡았다. 그의 과감성과 인재경영은 이때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인수 후 회사 인근 대형 호프집을 빌려 SK하이닉스 직원들과 교류에 나서는 등 그는 직원 사기 진작에까지 신경 쓰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자 했다. 업황 부진으로 반도체 시장이 얼어붙어 투자가 10% 이상 줄어들던 때 오히려 투자도 대폭 늘렸다. 2012년 전년 대비 4000억 원 늘린 3조 9000억원을 투자했고 2018년에는 사상 최대 규모인 17조원을 투자하기에 이르렀다. 반도체 신규 공장도 증설했다. 최 회장의 판단은 옳았다.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업황 반등이 본격화 하기 시작한 지난해 4분기, SK하이닉스는 흑자 전환에 성공한 데 이어 지난 1분기 어닝서프라이즈(깜짝 실적)을 알렸다. 1분기 SK하이닉스는 연결기준 매출 12조 4296억원, 영업이익 2조 8860억원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는 그동안 천문학적인 기술 연구 투자를 통해 세계 최초로 5세대 고대역폭 메모리 HBM3E 12단 개발과 대량 양산에 성공했다. HBM3E는 인공지능(AI)용 핵심 반도체로, CPU 대신 GPU가 그래픽 병렬 연산이 가능해 AI 칩으로 급부상했다. "재계 맏형, ESG 전도사, 경영 혁신의 마법사, 행복 경영의 달인, 승부사, 뚝심." 최 회장을 표현하는 다양한 수식어다. 최 회장은 고려대와 시카고대에서 공부한 후 1992년 선경 경영기획실 부장으로 경영에 처음 참여했다. 1998년 8월 최종현 선대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그해 9월 38세 어린 나이에 그룹 수장으로 경영 최일선에 나섰다. 이때는 외환위기 사태로 수십 년간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대기업들마저 흔들리고 무너지던 시기였다. 경영자로서 첫 과제는 생존 위기의 그룹을 구조하는 일이었다. 젊은 청년 최회장은 약 2만 5000명의 구성원과 함께 어려운 시기를 버티고, SK를 글로벌 초대형 그룹으로 도약을 이끌 수 있었던 원천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다'는 경영 철학에 있었다. 그는 위기에도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고, 안정적일 때도 서든 데스할 수 있다는 위기를 강조하며, 그룹 전체가 역동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 회장은 2003년 소버린발(發) 경영권 위협,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2년 유럽 디폴트, 2020년 코로나 확산 등 대규모 위기 속에서 되레 전 직원들에게 변화와 혁신을 독려하며, 그룹 사업 구조를 과감하게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SK그룹은 정유, 통신 중심에서 반도체, 소재, 그린, 디지털, 바이오 등 다각화된 포트폴리오를 갖추며 재계 2위로 도약했다. 최 회장의 과감성에는 특징이 있다. 매번 확신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다. 여기에는 선대 회장의 흔적이 엿보인다. 반도체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인재경영은 최종현 선대회장의 꿈과 기업가 정신이었다. 최 선대회장은 1978년 미래 산업의 중심을 반도체로 예상하고 선경반도체를 설립했으나 2차 오일쇼크로 안타깝게 접어야 했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도 선대회장의 입버릇이었다. 최 회장은 선대회장의 가르침을 귀중히 받아들어 어록집 발간사 등에서 존경을 표했다. 최 회장은 '최종건ㆍ최종현 경영철학 어록집'을 발간하며 발간사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SK그룹을 있게 한 최종건 창업회장과 최종현 선대회장의 삶과 경영철학이 단지 기업의 발전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라며 "두 분은 평생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고,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 양성에 온 힘을 다했다"고 밝혔다. 인재경영의 유지를 이은 최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갖고 ESG 경영에 특히 열성적이다. 지난달 SK그룹은 지난해 약 16.8조원의 사회적가치를 창출했다고 발표했다. 첫 측정을 시작한 2018년부터 현재까지 누적액은 약 93조원에 이른다. SK그룹은 경제적가치(EV, Economic Value)와 사회적가치를 동시에 실현하는 '더블보텀라인(DBL)' 경영을 추구하며 과거 정성적 요소로만 평가되던 사회적가치 창출 성과를 매년 화폐 단위로 측정해 발표하고 있다.

2024-06-18 17:44:35 김서현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실패를 다시 거론하지 말라!" 애국적 인재경영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

"우리는 사회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기업의 이익은 처음부터 사회의 것이었다." SK그룹을 전 세계가 집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생성형 인공지능(AI) 개발을 위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AI칩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메모리(HBM) 때문이다. HBM은 연산속도를 크게 향상시키고 전력 소모 비용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SK는 HBM 기술에서 최고 수준을 확보한 1등 강자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으로 전체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2위는 삼성전자(38%), 3위는 마이크론(9%)으로 SK하이닉스와 큰 격차를 보인다. SK를 최첨단 기술 선단에 설 수 있도록 근간를 만든 것은 최종현 회장이다. SK그룹의 2대 회장을 맡은 최종현 회장은 사업과 기술로 나라에 보답하고 자원을 확보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그의 절실한 애국심은 곧 지속가능한 성장과 혁신을 위한 교육 및 인재 양성에 대한 투자로 나타났다. 그 결과 현재 전세계를 호령하는 SK가 탄생했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기업경영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 위주의 경영이다. " 1962년 11월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경영에 합류한 후 1973년 선경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최 회장은 항상 "사람이 먼저다."라고 말했다. 그가 큰 손해를 끼친 프로젝트 브리핑을 듣고 말한 일화는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주며 전해진다. 프로젝트 실패로 잔뜩 주눅이 든 책임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엇다. 이때 최 회장은 실수를 나무라는 대신 따뜻한 격려를 건냈다. "돈을 죽여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사람이 중요한 거야."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써 치명적인 프로젝트 실패를 따뜻하게 품은 일화는 최 회장이 직원을 '돈'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며 대한 일화의 하나로 유명해졌다. 사람을 중요시한 최 회장은 취임 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하는 등 인재양성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업적과 일화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 중에는 독특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장학퀴즈 후원'이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있는 장학퀴즈는 1973년부터 1996년까지 MBC에서 진행한 TV프로그램으로, 현 지상판 최장수 퀴즈프로그램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고등학생들간의 순수 교양퀴즈 프로그램인 장학퀴즈는 최 회장의 강력한 의지로 수십년에 걸쳐 이어진 인재양성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최 회장은 50대 기업에도 간신히 들던 시절 프로그램 제작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형태로 장학퀴즈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매년 두차례 그룹 본사 건물로 장원을 한 학생들을 초청해 식사하며 이야길 나눴다. 훌륭한 인재를 미리 스카웃하려는 것일까 다들 생각했지만 정작 최 회장은 어느날 식사 중 학생들에게 "너희는 졸업하고 선경에 오면 안 돼. 오지마."라고 말했다. 세계 곳곳으로 나아가 공부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해달라는 이야기였다. "한두 번 실패를 했다고 중단하면 아무 성과가 없다.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실패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 따뜻한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기업가로서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시각이 무디지도 않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섬유 기업이었던 SK그룹의 다각화와 글로벌화로 꼽힌다. 그는 1975년 신년사를 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천명했다. 직물에서 시작한 선경을 에너지·종합화학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세운 목표를 상황이 나쁘다고 해서 바꾸지도 않았다. 그 결과 SK는 정유, 화학, 통신, 반도체 등 다양한 분야로 다각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본 최 회장은 에너지 자립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980년 대한 석유공사의 경영권을 획득한 후 그는 사업 비전을 석유정제업에서 '종합에너지기업'으로 설정하고 1983년에는 무자원산유국에 도전했다. 미국 코노코(Conoco)사와 공동으로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 석유개발에 투자했고, 우리나라 첫 자원개발 1호 기업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석유개발에 들어가던 때, 주변에서는 우려가 쏟아졌다. 수 년에 걸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지만 성공률은 너무나 낮았다. 계속 되는 실패에 관계자들이 포기해야 한다는 고언을 쏟아냈지만 그는 "우리는 장사꾼이 아니라 인더스트리얼스트(Industrialst)"라며 유전 개발을 추진했다. 그의 고집은 곧 1984년 예멘 마리브 광구에서의 원유 발견으로 이어졌다. 최 회장의 도전은 계속 됐다. 그는 정보통신사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이때 또 한 번 그의 놀라운 결정이 내려졌다. 선경텔레콤은 1991년 4월 설립되어 선경의 정보통신 사업 진출기반의 한 축을 구축했다. 1992년 6월 10일 대한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에 참여한다. 당시 총 20만 페이지에 달하는 사업계획서를 체신부에 제출해 압도적인 차이로 최고 점수를 획득, 제2이동통신사업 최종 허가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큰 장벽에 부딪쳤다. "현직 대통령의 인척기업에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을 허가한 것은 잘못"이라는 여론때문. 이에 당시 대한텔레콤 손길승 사장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을 천명했다. 최회장은 다시 한번 대승적 차원의 결단을 내렸다. 1994년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그는 제2 이동통신 사업을 포기한 대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한국 이동통신을 인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전경련 회장을 겸하는 이상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경쟁이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우리는 미래를 사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한국 이동통신 입찰에 참여해 경영권을 확보했다. 현재의 SK를 있게 한 최 회장은 죽음의 앞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선진 일등국가를 고민한 최 회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서서히 침체 되던 1993년, 전경련 회장에 취임했다. IMF 직전 폐암 투병 상황에서도 산소통과 산소호흡기를 달고 2차례 청와대에 방문해 대통령 독대와 경제회생 방안 진언에 나서기까지 했다. 1998년 8월, 병상에 누운 채 미래를 걱정하며 정리한 유고집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인생, 그의 기업가 정신은 인간, 그리고 나라였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4-06-13 16:51:19 김서현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무에서 유를 창조한 최종건 회장…재계 2위 밑그림 그리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경쟁이 안된다."(최종건 창업회장)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매출 200조원 등 자산구모 기준 재계 2위 그룹으로 성장한 SK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산업 성장사를 보여주는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SK는 창업주인 고(故) 최종건 회장이 지난 1953년 4월8일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 수원시 권선구 평동 4번지를 매입해 선경직물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특히 선경직물 공장은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이 종업원 몇명과 자신의 마차를 이용해 5㎞ 떨어진 광교천에서 돌과 자갈을 날라 만든 것으로 SK그룹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최종건 회장이 이끌던 SK는 1962년 11월 10여 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친 고(故) 최종현 회장이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패기(최종건)와 지성(최종현)의 쌍두마차 체제를 갖추게 되면서 가파른 성장을 일궈냈다. ◆열정과 패기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최종건 회장은 우리나라 재벌 기업 창업주 가운데 가장 짧은 생애를 살면서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룩한 기업가로 꼽힌다. 최종건 회장이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 공장에 견습기사로 입사한 것은 해방을 얼마 앞두지 않은 1944년 4월이었다. 졸업과 함께 3급 기계정비사 자격을 획득하며 일자리를 갖게된다. 그러나 최종건 회장은 자신이 직접 사업에 도전하겠다는 패기를 앞세워 1949년 선경직물 공장을 떠난다. 하지만 6·25 전쟁 중 잿더미로 변한 선경직물 공장을 외면할 수 없어 1953년 3월 전쟁으로 불탄 100여 대 직기의 부속들을 수습, 재조립하며 공장 건물을 복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해 8월 정부 귀속 재산이던 선경 직물주식회사를 인수하면서 창업의 꿈을 이루게 된다. 특히 불에 탄 부품을 모아 직기 4를 재조립하고 선경직물을 재건한것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최종건 회장이기에 가능했다. 창업 초창기 헌 직기를 사다 설비를 증설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종건 회장은 신제품 개발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였다. 직기 4대로 출범한 선경직물은 불과 5년 사이에 보유 직기 1000대를 돌파했다. 최종건 회장의 품질제일주의가 빛을 본 것은 해방 10주년 기념 전국 산업박람회에서 '닭표(영문명:Rooster)' 안감이 부통령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부통령상 수상업체에 지원된 300만 환의 융자는 선경직물이 주식회사로 도약하는 귀중한 재원이 됐다. 1950년대 후반에는 국내 최초로 합성 직물인 나일론과 테토론을 생산한 데 이어 1960년대에는 크레폰·앙고라·깔깔이· 카이론 등 각종 직물을 개발·생산해 국민의 의류생활 개선에 기여했다. 선경이 국내 유수의 재벌 기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몇년 동안 노력 끝에 최종건 회장이 아세테이트 원사와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SK케미칼)을 건설한 때부터다. 선경 성장사에 커다란 디딤돌을 놓게 된 아세테이트 공장 기공식이 거행된 것은 1968년 3월 25일이었다. 그리고 3개월 뒤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이 건설되었다. 두 공장 완공 후 최종건 회장은 섬유산업의 계열화를 위해 선경유화(DMT )와 선경석유(정제)를 설립해 화학섬유의 원료산업인 석유화학 공업 진출을 도모했다. 그러나 최종건 회장은 1973년 11월 15일 평생을 꿈꿔온 섬유산업 수직계열화의 꿈을 동생인 최종현 회장에게 넘기고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미래 모빌리티의 핵심인 배터리와 정유, 반도체 그리고 대한민국 1위 이동통신사업자를 보유한 SK그룹이 탄생하기까지 최종건 회장의 열정과 패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종건 회장은 그야말로 우리 경제의 성장을 이끈 핵심인물이다. ◆인재 경영 최종건 회장은 인재를 모아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을 운영 초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여성 직원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 필요한 인재가 있으면 몇 번이고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했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경영에 있어 인재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공장을 관리할 적임자인 김영환을 설득하기 위해 세 번을 찾아갔고 최고의 도안가 조용광을 영입하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 그의 진심은 언제나 사람들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특히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최종건 회장은 기술을 최우선하는 기업가였다. 그의 신념은 남보다 싼 것이 아니라 제일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이다. 품질을 통해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야 기업을 잘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평생을 지켜온 철칙이다 창업 초기 히트 상품인 인조견 닭표 안감부터 제조원을 밝힌 것도 제조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고객과의 신뢰를 쌓기 위한 의도였다. 이후 봉황새 이불감 생산, 나일론 직물 개발, 크레퐁과 앙고라 개발, 조제트 생산, 폴리에스터 원사 '사카이론' 생산 및 수출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최고만을 고집했다.

2024-06-11 15:15:59 양성운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나침반이자 가장 큰 엔진 '솔선수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기업이 한 나라의 문화를 바꾸는 자본주의 시대다. 정부가 숱한 캠페인과 아이디어를 내놔도 한 기업이 도입한 사내 복지가, 때로는 기업의 총수가 보여준 한 행동이 사회에 더 큰 반향을 일으키곤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이러한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장 잘 아는 인물 중 하나다. 그런 그의 행보는 사업보국(事業保國)을 말하던 창업주 호암 이병철 전 삼성 회장을 닮아있다. 다른 점은 시대가 변하며 한국이 세계에서도 문화와 기술을 선도하게 되며 보폭이 커졌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삼성의 나침반이면서 동시에 엔진으로써 활약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솔선수범'의 기업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직접 세계 곳곳을 누비고 노력으로 만든 글로벌 네트워크를 십분 활용하며 번거로움을 마다않는다. 사익을 좇아 회사를 통해 좋은 일 하고 떠벌리기 보다는 남 모르게 솔선수범한다. 이 회장의 업적을 말할 때면 항상 그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거론된다. 이 회장은 기업 내에서 폭넓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핵심 사업을 키우는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나침반의 역할만을 하며 손가락 지시만을 이어가는 기업인들과 달리 결정적인 순간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시키는 게 바로 이 회장이다. 대표적인 일이 지난 2020년 삼성전자가 이동통신 세계 1위 버라이즌과 7.9조 원 규모의 네트워크 장비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한 사건이다. 당시 8조 원에 달하는 장기 공급 계약은 이 회장의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CEO와의 인연이 계약 성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2010년 스페인 바로셀로나 MWC에서 처음 인사를 나눴는데, 이 회장은 2012년 스웨덴 발렌베리그룹 경영진이 방한 한 때 에릭슨 회장 자격으로 온 베스트베리 CEO를 비공개 만찬에 초청했다. 삼성에 따르면 당시 베스트베리 CEO는 만찬 후 "삼성전자와 4G 이동통신 분야 공조를 하고싶다"고 밝혔는데, 이 회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수차례 전화와 영상회의를 거치며 삼성의 장점을 어필했다. 몇 년에 걸친 이 회장의 러브콜은 결국 8조 원에 달하는 수주 결과로 돌아왔다. 재계 관계자들은 "버라이즌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는 데 성공한 것은 결국 기술력과 보안성은 물론, 총수가 보여준 열정과 오랜 신뢰, 협력 관계 덕"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초유의 기업들만이 이 회장의 환대를 받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11월, 이 회장은 삼성의 일본 내 협력회사 모임인 'LJF(Lee Kunhee Japanese Friends)' 정례 교류회를 주재하며 미래사업 전략을 공유하고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LJF는 이건희 선대회장이 일본 내 ▲반도체 ▲휴대폰 ▲TV 등 IT업계 기업들과의 협력 체제 구축을 제안해 1993년 시작된 모임이다. 이건희 선대 회장이 '구매의 예술화'를 통해 협력사들의 성장이 곧 삼성의 초일류 기업으로의 성장 발판이 된다고 말한 바를 이 회장 또한 공감하고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격이다. 앞서 이 회장은 2021년 1월 평택 반도체 생산라인 설비 반입식에서도 원익IPS, 솔브레인, 피에스케이, 동진쎄미켐 등 협력사 대표들을 초대해 국내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 육성 및 상호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이 회장은 반입식에서 "함께 하면 미래를 활짝 열 수 있다. 삼성전자와 협력회사, 학계, 연구기관이 협력해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어 시스템반도체에서도 신화를 만들자"며 다독였다. 기업 활동 밖에서도 이 회장의 '솔선수범' 정신은 빛나고 있다. 이재용 삼성 회장은 지난 4월 데이터앤리서치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상위 10대 기업집단 수장 중 가장 사회공헌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12개 채널 23만개 사이트를 대상으로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10대 그룹 총수의 사회공헌 관련 포스팅에 대한 빅데이터 분석 결과다. 이 회장은 지난해 1년간 총 7589건의 사회공헌 관련 정보량을 기록했고, 이는 2위를 차지한 최태원 SK 회장 3832건의 2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지난달 국세청 법인공시에 따르면 이 회장은 지난해 호암재단에 개인 자격으로 2억 원을 기부하며 삼성계열사를 제외한 유일한 개인 자격 출연자(기부자)로 이름을 올린 바도 있다. 국가를 위한 기업 경영을 했던 창업주 호암 이병철 선생의 유지가 대를 이어 이재용 회장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최근 이재용 회장은 서울 영등포 쪽방촌 요셉의원에 20년 이상 후원을 이어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4-06-04 16:08:49 김서현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 ESG 모태 된 '구매의 예술화' 이건희 삼성 회장

"삼성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 인류 사회에 공헌하는 것입니다." 삼성의 경영철학과 목표이자 매년 펴내는 지속가능보고서의 서두다. 기업의 성장과 이익이라는 말대신 인재와 기술, 공헌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경영철학에서 '공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만큼 삼성의 ESG 경영의 성과는 눈부시다. 삼성의 ESG 경영 주요 성과를 살펴보면, 2022년 온실가스 BAU(배출 전망치) 대비 감축량은 1016만 톤CO₂e로 전년 대비 59% 증가했고 재생 에너지 전환율은 31%에 이르렀다. WBA(World Benchmarking Alliance) 기업인권벤치마크(CHRB)는 ICT 제조기업 부문 2위, 디지털 포용성 평가(DIB)는 7위를 기록했다. 협력회사 종합평가 우수 등급 취득률 62.1%, 스마트공장 지원사업 수혜 기업 수는 277개에 달했다. 사회공헌 수혜자 수는 66만 761명을 기록했으며 2012년부터 2022년까지 누적 수혜자 수는 2277만 명에 이르렀다. 올 1분기 또한 좋은 성과를 냈다. 4월 한국ESG평가원이 올 1분기 국내 100대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ESG 평가 작업을 실시한 결과 삼성이 SK그룹과 함께 82점으로 평가등급 S 최고점을 기록했다. 나열하기 벅찰 만큼 화려한 ESG 경영 성과에는 바로 고(故)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있다. 그가 남긴 어록이자 경영철학인 '구매의 예술화'는 바로 오늘날 말하는 ESG 경영의 핵심이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은 구매담당 임직원들에게 마치 시구절 같은 주문을 했다. "구매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달라." 모호한 표현이었으나 뜻을 들은 임직원은 모두 수긍했다. 협력업체와 공존경영의 관계를 맺고 성장을 도와 이를 통해 고객만족과 품질향상을 이뤄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기업에 있어 구매란, 품질 좋은 제품을 찾아 저렴한 견적서를 제시하고 제조원가를 최대한 낮추는 게 기본 원칙이다. 이 탓에 협력사와의 거래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업이 현재도 허다하다. "'구매의 예술화'란 말은 내가 직접 만들어낸 말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며, 정확히 알고, 철저히 실천해야 할 개념이다. 조립양산업은 원가의 80-85%가 구매원가이므로 협력업체를 지도, 육성해 질을 높여야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중략)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부부'와 같다. 어느 한쪽도 혼자서는 불완전하며, 힘을 합쳐야 제대로 기능을 발휘한다. 서로 이끌고 밀어주면서 공존공영해야 한다. (이건희에세이)" 협력사 또한 성장하고 상생할 수 있도록 적절한 마진을 남길 수 있도록 하자는 이 회장의 주문은 당장 괜한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회장은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다. 삼성전자에 협력업체가 필요시 지원할 자금은 물론 정보제공과 현장기술지도를 전담하는 별도 부서를 뒀다. 또 협력업체 성장을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중소기업인력개발원'을 만들어 중소기업중앙회에 기증했다. 이 회장이 밀고 나간 상생의 기업가 정신은 곧 눈부신 성과로 돌아왔다. 1993년 매출액 41조원, 영업이익 5000억원이었던 삼성은 2002년 매출액 141조원에 영업이익 14조 2000억원의 글로벌 기업이 됐다. 세계 시장 점유율 또한 D램은 14.0%에서 32.0%로, S램은 6.2%에서 30.1%까지 뛰었다. 10년 사이 5배까지 시장 점유율이 뛰었다. 하청업체라는 말은 1980년대 진작 협력업체로 바꿨다. 하청이라는 말이 곧 중소기업을 부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를 계기로 삼성전자 협력사들의 협의회인 '협성회'가 발족했고, 1차 협력사 39개사로 출발한 협성회는 2023년 208개 기업이 회원사로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이 회장의 비전은 협력사의 성장으로도 성과가 나타났다. 삼성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협성회 201개사 매출 총액은 약 57조 9000억 원, 직원 수는 28만 명에 달한다. 매출액 1조 원 이상 기업은 9개다. 마치 새로운 개념처럼 다가온 ESG 경영은 삼성에는 이미 너무나 익숙한 개념이다. 이 회장이 주장한 구매의 예술화란 기업 활동에서 '구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과 상생의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다. ESG 경영은 이윤 추구를 위해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려는 구시대 기업상과 정반대다. 환경을 생각하며 기업의 이익을 사회와 나누고, 기업 내부는 물론 관계·협력사에 이르기까지 성장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단기간 비용 발생을 감수해야 한다. 이 탓에 현재도 ESG 경영을 기업 성장에 다소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경영인들도 많다. 이 회장은 30년 전 ESG 경영의 모태를 주장했고, 중요성을 기어이 입증해내고야 말았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이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빛난 원인을 ▲기존 경영 관습에 대한 자기 부정 및 반성 ▲경영전략의 선도적 변화 등으로 꼽는다. 특히 비전 제시 후 기획과 실행이 이뤄지면서 추진력이 발휘됐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는 "제조업체와 납품업체의 공존공영체제"로 설명하고 "협력포털, SCM(공급망 관리) 등으로 시스템화하는 데에 이르며 '구매의 예술화'가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4-05-30 13:21:55 김서현 기자
기사사진
[다시 기업가 정신](上)현자의 통찰과 청년의 추진력 '상상초유'…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삼성전자는 지난 21일 반도체 사업 수장을 경계현 사장에서 전영현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지난해 삼성은 15조 원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2022년 메모리 사업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늦어진 감산 조치와 같은 해 11월 챗GPT 공개 후 급변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기습적인 수장 교체는 위기 돌파를 위한 쇄신 인사로 해석된다. 파격적인 원포인트 인사 후 고(故) 이건희 회장의 생전 기업가 정신이 다시 화제가 됐다. 파격적이고 돌발적이며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그의 기업가 정신은 그야말로 '상상초유(想像初有)'였다. 선지자적인 통찰들은 30년 전 발언마저 현시대에 나온 말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인 71세까지 이 회장은 현자의 선구적인 혜안에 청년의 과감성과 추진력을 보여줬다. 이 회장의 돌발성과 과감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 바로 최근 다시 소환 중인 2011년 원포인트 인사다. 당시 이 회장은 7월 액정표시장치(LCD) 사업부가 1조 원을 훌쩍 넘긴 적자를 내자 LCD 사업부 장원기 사장을 경질했다. 이어 LCD 사업부를 메모리·시스템LSI 등 반도체 사업부와 모두 묶어 디바이스솔루션(DS) 사업 총괄을 신설하고, 당시 반도체 사업부장 권오현 사장을 수장으로 앉혔다. 파격적인 결정에 안팎으로 우려가 쏟아졌지만 DS부문은 역대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끌어내며 '1등 삼성'의 신화에 주인공이 됐다. 이 회장의 과감한 결정이 옳았다. 삼성은 탁월한 선구안으로 삼성을 지휘한 이 회장으로부터 배우고 있다. 이 회장은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事業保國)'의 발로였던 반도체 사업을 마침내 꽃피우며 유지를 받드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병철 회장은 부존자원이 없는 대신 높은 교육열을 가진 한국의 장단점을 간파하고, 반도체 산업이 국가적으로도 필요할 것으로 생각했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삼성그룹 2대회 회장으로 오른 이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 회장은 1983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이 공식화 한 후부터 당시 기술 선진국이었던 일본을 매주 방문해 배우고 인재를 삼고초려 했다. 이 회장의 혜안과 '일류기업'은 취임 40년이 지난 현재 현실이 됐다. 당시 10조원이었던 삼성의 매출은 2018년 387조원으로 약 39배 늘었다. 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259배,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 늘었다. 전쟁을 경험한 작은 나라의 기업이었던 삼성은 현재 작은 움직임에도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1993년 이 회장이 주창한 '신경영'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남겼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메시지를 필두로 당시 소품종 대량생산 구도였던 제조산업을 "양(量) 아닌 질(質)로 승부한다"로 전환했다. 아직 주요 선진국으로부터 OEM 생산을 주문받던 우리나라에서는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당장의 이익 대신 미래의 거대한 이익을 바라본 당시 결정에 많은 이들이 놀라고 우려했지만 그 결정이 지금의 삼성을 만들었다. 이 회장의 족적을 분석한 석학들과 가까이서 함께한 이들은 모두 그의 기업가 정신을 혜안과 더해진 추진력이 만난 '상상초유'로 설명한다. 지난 3주기 때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던 로저 마틴 토론토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이 회장을 "전략 이론가면서 동시에 통합적 사상가"로 평가했다. 승산이 없어도 그의 뛰어난 상상력과 통찰력, 폭주기관차 같기도 한 추진력과 실행력이 더해지면서 그가 예고한 대로 '일류 기업' 삼성이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그는 "이 회장은 과거에 묶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며 "잘하지 못하는 분야를 초일류로 만들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공언한 목표를 이뤘다"고 설명한다. 1970년 제일모직으로 입사 후 비서실 감사팀으로 이동해 이 회장을 가까이에서 본 이승한 전 홈플러스 창업회장은 이 회장을 '3-sight가 있는 분'으로 설명한다. 그는 "3-Sight는 과거/현재/미래를 보는 눈"이라며 "과거에 대한 조명력은 'hind sight', 현재에 대한 현시력은 'eye sight', 미래에 대한 선견력은 'fore sight'라고 하는데, 이 회장은 놀랍게도 세 가지 모두를 갖춘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최근 세계 정세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술 빅뱅을 맞이함과 동시에 세계화에 따른 대륙을 넘나든 국가적 갈등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현재조차 해석하기 어려운 지금, 경영자들이 당장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기 일쑤다. 타계 전까지 장래희망을 이야기하는 어린이와 같이 미래를 말한 이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우리 사회의 기업은 물론, 사람들의 삶에까지 큰 울림을 남긴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4-05-27 16:03:54 김서현 기자
기사사진
'사업보국'…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 "나라가 없다면 삼성도 없다"

"HBM은 정말 기적 같은 기술이다. 한국 기업이 너무 겸손해서 그런지 여러분이 HBM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반도체의 제왕'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월 엔비디아 개발자 대회에서 전세계에서 모인 기자들에게 말했다. 1960년대, 동네에서도 TV를 가진 집이 몇 없어 어린애들이 한데 모여 만화영화를 봤던 우리나라였다. 6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여느 나라도 따라잡진 못 하는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 '반도체'로 세계를 놀래키고 있다. 한국에서 큰 사건이라도 발생해 생산이 중단되면 전세계 반도체 업계가 멈춘다는 업계 관계자의 말도 있을 정도다. 놀라운 성취의 시작에는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사업보국(社業報國)'이 있다. "반도체에 대한 투자는 사업보국을 위한 사명감이다." 1974년 12월, 삼성전자 이병철 회장이 집적회로용 웨이퍼 제조공장인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삼성전자를 1969년 설립하고 5년만이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병철은 무역업, 제분업, 제면업, 모직업, 설탕, 비료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며 삼성을 국내 최상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미 성공한 사업이 있던 때 그러나 삼성비료로 위기를 겪던 당시 그의 결정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삼성은 1966년 5월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을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적발됐다. 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을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1968년 비로소 사건은 마무리 지었지만 알짜배기 회사 하나가 사라지며 위기가 닥쳤다. 이 시기 설립한 게 삼성전자였다. 금성사(현 LG전자) 등이 크게 반발하고 삼성 내에서도 당장 이익을 기대하기 힘든 전자산업 진출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했다. 실제로 첫해 직원 수가 36명, 매출은 3700만원에 불과할 정도로 금성사에 한참 밀렸다. 이때 한국반도체 인수라는 과감한 결정이 있었다. 이 회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반도체가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삼성에도 반도체가 마지막 기회라는 확신이었다. "1966년 한국비료로 최대 위기에 놓였던 삼성에게 한국반도체는 손실과 굴욕을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회고록에도 썼다. 당시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의 수준은 처참했다. 반도체의 전단계 규소박판 가공 공정에 머무르고 있었고, 개발을 위해 예상 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이면서 당장의 이익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본격적인 반도체 산업 추진이 이어진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다. 한국반도체 인수 후 경영 위기가 닥쳤고 현상 유지보다는 사업 축소 기조가 돌았다. 전환점은 1982년 이병철의 방미였다. 이 회장은 미국 방문 중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귀국 후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심, 여러 반도체 전문가들의 말을 경청하며 정보를 입수해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측하고, 1983년 3월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다. 삼성은 기술진 확보를 위해 미국의 유학파들을 대거 스카우트하고, 자체 개발에 매진한 결과, 1983년 11월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3번째 개발로, 삼성의 기술력을 입증하며 세계 반도체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성과가 나타나기 무섭게 삼성은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졌다. 반도체 시장은 만만치 않았다. 1984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일본 기업들의 덤핑 공세로 64K D램 가격이 폭락했고, 삼성은 큰 적자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꿋꿋이 밀어붙이며 공장 생산라인 증설과 신제품 개발에 나섰다. 그 결과,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1986년에는 1Mb D램을 출시하면서 반도체 시장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회장의 선구안은 여기서 한 번 더 발휘됐다. 일본 기업들과의 기술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이병철은 지속적으로 독자 기술 개발을 추진했다. 1989년에는 16Mb D램을, 1992년에는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삼성은 256Mb, 1Gb D램을 모두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반도체 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회장의 반도체에 관한 일화는 마치 그가 한창이던 때 일처럼 파격적이지만 사실 그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때는 일흔이 넘은 때였다. 이 회장의 기업가 정신에는 '나라'가 함께 있었다. 왜 하필 반도체냐는 내부 분위기에 그는 "나라가 없다면 삼성은 없어도 좋다."고 응수했다. 식민지 하에서 태어나 전쟁의 폐허를 경험한 그는 삼성의 안위를 넘어, 반도체 산업이야 곧 미래 한국이 전세계를 선도할 열쇠라고 확신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이 1984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에 대단위 초대규모집적회로(VLSI) 생산 공장을 완공했던 때,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번째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지었다는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날 이 회장의 인삿말은 사못 엄숙했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부존자원이 없어 경제개발에 불리한 여건이지만 우수한 두뇌와 강인한 국민성, 높은 교육열이 있어서 컴퓨터나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기술이 가장 적합하다"면서 "삼성은 오늘 준공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정진해서 내년에 256K D램을 개발해 선진국과 기술 격차를 좁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4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눈여겨 보는 기술 선도 국가가 됐다. 이 회장의 선구안과 나라를 향한 염려가 밑바탕이 됐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우리나라가 반도체 경쟁에서 앞설 수 있었던 이유를 아래와 같이 썼다. 첫째 경제적 타산이나 위험을 초월해 국가적 견지에서 첨단기술에 도전한 확고한 기업가 정신이 있었다. (...) 다섯째 재미 한국인 박사들의 사심 없는 조국애에서 비롯한 적극 참여로 고도의 두뇌 집단과 기술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섯째 여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양질의 근면한 노동력 확보와 훈련이 가능했다. 사업보국 고 이병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그야말로 '애국'이었다. /김서현기자 seoh@metroseoul.co.kr

2024-05-24 10:17:30 김서현 기자
[다시 기업가 정신]경제 침체 장기화속 난국 타개위해 '기업가정신' 되새겨야

이병철·정주영등 선대회장 '기업가정신' 중무장…글로벌기업 반열 올려 창업주 3세 '도전·혁신' 중요…기업가정신 중무장 스타트업 배출도 절실 '지속가능성' 기업가정신 핵심 꼽아…기업인에 대한 '사회적 존경' 필요 1976년 6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진행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연인원 250만명 이상이 동원된 이 사업은 당시로선 한 회사가 맡은 단일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사 업체는 다름아닌 대한민국 현대건설이었다.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항만공사 현장에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 밖에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는 말로 직원들을 독려했다. 정주영 회장이 남긴 어록은 많다. "기업의 성공에는 모든 모험적인 정보, 모든 모험적인 노력, 모든 모험적인 용기가 필수적이다"는 말도 그중 하나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안 될 사람'을 세가지 부류로 정의했다. 어려운 일은 안하고 쉬운 일만 하며 권위만 찾는 사람,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 알아듣긴 해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그 부류다. 그러면서 이병철 회장은 "가장 나쁜 사람은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꼬집었다. 이들 선대 회장이 남긴 어록은 모두 기업가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런 정신으로 일궜던 '삼성', '현대'는 우리나라를 넘어 글로벌 대표 기업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23일 산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경제가 길고 어두운 터널속에 갇혀있는 가운데 '기업가정신'이 이를 타개할 수 있는 시대정신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관련기사 3면> 도전, 혁신 등의 단어로 대표할 수 있는 기업가정신이 위기를 벗어나는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29일로 어느새 64회째가 되는 기업가정신 조찬포럼을 개최하며 기업가정신을 곳곳에 전파하고 있는 (사)도전과나눔 이금룡 이사장은 "대한민국에서 기업가정신이 정말 필요한 곳은 두군데"라면서 "하나는 삼성, LG, 현대, 한화 등 창업자 3세들의 기업가정신으로, 자칫 선대가 쌓아놓은 기업의 경영자에 머물수 있는 만큼 국가기업경쟁력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이 얼마나 도전적인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금룡 이사장은 "또다른 하나는 스타트업인데 인공지능을 비롯한 바이오, 로봇 등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에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창업기업이 나오고, 이들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해야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중소기업청장을 역임한 주영섭 서울대학교 특임교수는 '지속가능성'을 기업가정신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주영섭 교수는 "디지털, 그린, 문명 대전환이 진전되면서 지속가능성과 디지털화가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키워드가 되고 있다"면서 "기업가정신 역시 디지털화, 즉 디지털 대전환을 통해 환경, 사회 그리고 인류의 지속가능성에 기여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을 이끄는 사장 뿐만 아니라 임직원 모두가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면서다. 특히 그는 기업가정신을 제고하기 위해 기업인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가치관을 회복시킬 수 있는 파격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 교수는 "국가 경제의 주체인 기업인이 바로 '애국자'라는 사회적 존경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활성화를 통해 사회 전체 혁신성의 역동성을 높이고 가치관을 회복하는 획기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전체 기업의 99%, 종사자의 81%를 담당하는 중소기업, 소상공인 분야에서도 기업가정신은 화두다. 이런 상황에서 중소기업중앙회는 올해 중소기업주간을 맞아 진주시, 진주 K-기업가정신재단과 'K-기업가정신 확산'을 위해 함께 노력키로 했다. 세계중소기업학회장을 맡고 있는 김기찬 인도네시아 프레지던트대학 국제 부총장은 "한국의 경제는 기적적으로 성장한 이후 지금 안일함에 빠져 있다. '안일함'은 문명의 적이다. 우리 기업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절실함도 부족하다"고 꼬집없다. 김 부총장은 그러면서 "기업가정신의 핵심은 기회를 포착하는 정신이다. 그 기회는 글로벌 시장에 있다. 해외시장 진출을 귀찮아하는 '갈라파고스화'를 빠르게 타파해 나가야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영국의 글로벌 기업가정신 연구협회(GERA)가 앞서 발표한 '2023년 글로벌 기업가정신 모니터(GEM)' 보고서에 따르면 참여 대상 49개 나라 중 한국의 기업가정신 지수는 10점 만점에 5.8점을 기록, 지난해 8위를 차지했다. 2021년 조사 땐 6위였다.

2024-05-24 10:17:28 김승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