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기획코너 > 되살아난 서울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34) 노인과 공생하는 3·1운동 성지, 종로구 '탑골공원'

3·1 운동의 발상지가 종로 탑골공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탑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공원이자 독립운동 성지이다. 과거 탑골공원 터에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고찰, 흥복사가 있었다. 세종은 1464년 흥복사를 중건해 원각사를 세웠다. 도성 3대 사찰로 번창했던 원각사는 연산군이 1504년 이곳에 연방원이라는 기생방을 만들면서 사찰로서의 기능을 잃게 됐다. 이후 중종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원각사 재목이 관청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되면서 사찰 건물은 자취를 감췄다. 원각사가 있던 자리에는 원각사지 10층석탑과 원각사비만 남게 됐고, 탑이 있는 지역이라 하여 '탑골'로 불리게 됐다. 탑골 일대가 공원으로 만들어진 건 19세기 말이다. 공원은 고종 34년(1897년) 총세무사로 있던 영국인 브라운의 제안으로 조성됐다. 원각사 탑이 있던 장소라 하여 파고다(Pagoda·탑)공원으로 개원했으나 1992년 5월 옛 지명인 탑골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3·1 운동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 "吾等(오동)은 玆(자)에 我朝鮮(아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과 조선인이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민족임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서문이 낭독됐다. 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탑골공원은 독립운동 성지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 지난달 23일 3·1운동의 발상지 종로구 탑골공원을 찾았다. 종로3가역 1번 출구로 나와 약 4분을 걷자 삼일문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공원에는 팔각정을 중심으로 반시계방향으로 3·1운동 기념탑, 손병희 선생 동상, 원각사비, 만해 용운당 대선사비, 3·1운동 기념 부조, 탑골공원 사적비가 차례로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은 원각사지 10층석탑과 팔각정이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세조 13년(1467년) 경천사 십층석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공원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탑의 높이는 약 12m이다. 탑의 하단부에는 용과 연꽃무늬가 새겨졌고, 중간에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오는 과정이 그려졌다. 상단부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이 조각됐다. 탑은 보호 유리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는 지난 1999년 석탑의 훼손을 막기 위해 유리로 만들어진 보호각을 설치했다. 원각사지 10층석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다른 석탑과 달리 대리석으로 지어져 산성비와 공해에 취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경기도 안산에서 온 김용만(64) 씨는 "55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정교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그런데 탑이 유리 감옥에 갇혀 있어 답답한 느낌을 준다"면서 "누가 저런 발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조형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다. 지나친 과보호"라며 혀를 끌끌 찼다. 팔각정은 고종 때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 정자다. 5단의 층단식 석축 기단 위에 마루 없이 기둥을 세운 구조로 이뤄졌다. 이날 팔각정 앞에서 만난 대학생 김상기(21) 씨는 "이곳이 3·1운동 발상지라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게 됐다"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인데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것이 아쉽다"며 한숨을 쉬었다. 조선 시대 때 황실 관현악단이 음악을 연주했던 장소인 팔각정은 3·1운동 당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 최초의 시민운동 시발점인 삼일대로(안국역~탑골공원) 일대를 역사상징가로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탑골공원 후문광장 바닥에 3·1운동 만세 물결을 상징하는 발자국 모양을 새기고, 주차장으로 단절된 삼일대로변 보행길을 정비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3·1운동 준비와 전개 과정에 중요한 배경이 된 역사적인 장소들은 현재 그 흔적이 사라졌거나 방치돼 있다"며 "3·1운동 발상지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해 지역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노인들 만남의 광장 노인들은 탑골공원 북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장기를 두고 있었다. 이날 만난 한 노인은 "공원 안에서는 장기 못 둬. 내쫓아서"라며 씁쓸해했다. 종로구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공원 내에서 장기를 두는 게 법적으로 금지된 행위는 아니"라며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대여해주는 등의 상행위만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양시 동안구에서 온 김수만(90) 할아버지는 "인덕원에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왔다"면서 "이 나이가 되면 어디 갈만한 데도 없고 심심하다. 그런데 여기 오면 또래 노인네들 만나는 재미가 있다"며 마지막 남은 아랫니 네 개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김 씨는 날이 더 추워지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이내 울상을 지었다. 종로구 관계자는 "공원 일대에 추위 대피소(비닐 천막) 등을 설치할 계획은 현재 없다"며 "탑골공원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타 부서와 협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지난 3월 65세 이상 노인에게 발급되는 무임교통카드 이용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할아버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탑골공원이 있는 종로3가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는 10월 말까지 어르신들이 집중된 시설 주변의 도로 보행환경을 개선해 사고 위험으로부터 교통 약자를 보호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시는 차량 감속 유도시설(과속방지턱, 과속경보표시 장치), 보·차도분리시설, 보도상 쉼터 등을 조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탑골공원 일대는 보행환경 개선사업이 추진되지 않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탑골공원 근처가 '창덕궁 앞 역사인문재생' 사업과 연계돼 있어 보행환경 개선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대신 종묘공영주차장 쪽에 노인보호구역 4개소를 지정했다"고 말했다. 해가 저물어 주위가 어둑해지자 불콰하게 취한 노인들이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로 붐볐던 공원 후문에는 두 명의 노인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내 이들 사이에서 훈훈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박모(77) 할아버지가 장기를 같이 둔 김모(82) 할아버지에게 "형님, 내가 살 테니까 저기 올라가서 막걸리 한 사발 하이소"라며 술 한잔을 권했다. 김 할아버지는 "나는 처음 본 사람한테 폐 끼칠 수 없다. 갚을 능력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박 할아버지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약 10여 분 간의 대치 끝에 더 늙은 노인이 덜 늙은 노인의 손에 이끌려 자리를 떠났다. 오후 6시. 탑골공원으로 출근했던 노인들이 모두 퇴근했다.

2018-12-04 16:01:07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33) 타임머신 타고 조선으로··· 종로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종로를 가득 메운 고층 빌딩 숲 지하에 600년 전 조선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서울시는 지난 2015년 공평동 1·2·4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추진 과정 중 조선 시대 전기부터 근대 경성에 이르는 유구와 유물을 발굴해 도시 유적을 원위치에 전면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문화재청과 사업시행자와 반년이 넘는 협의를 거쳐 매장문화재를 현장 박물관으로 조성해 올해 9월 개관했다. ◆개발과 보존의 공존, '공평동 룰' 16~17세기의 조선을 만나기 위해 지난 11일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방문했다. 전시관은 종각역 앞 센트로폴리스 건물 지하 1층에 연면적 3817㎡ 규모로 조성됐다. 전시관 바닥은 투명한 유리로 이뤄졌다. 이날 박물관을 찾은 시민들은 발 아래로 펼쳐진 조선 시대 건물터와 골목길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 강서구에서 온 이선희(35) 씨는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조선시대 때 골목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기분이다"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이 씨는 "관람데크 중 일부가 철골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를 전부 유리 바닥으로 바꾸면 유물이 잘 보일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전문 건축사가 전시 설계에 참여했다. 유구 등 콘텐츠가 많은 부분은 바닥을 유리로 만들었고, 통로나 유구가 없는 곳은 관람 환경을 고려해 알루미늄 재질의 데크로 조성해 이용객 편의를 높였다"고 설명했다. 은평구 대조동에서 온 이인욱(57) 씨는 "이런 금싸라기 땅에 600년 전 집터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참 신기하다"면서 "이것들을 다른 데로 옮기지 않고 본 모습 그대로 시민들에게 공개한 게 대견하다"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개발과 보존의 공존을 유도한 민관 협력 보존형 정비사업 모델의 첫 사례다. 시는 매장문화재를 원위치에 보존하는 대신 민간 사업시행자에게 용적률 인센티브를 제공해 손실을 보전해줬다. 시는 개발과 보존이 공존하는 방식인 '공평동 룰'을 도시 개발 과정에서 발굴되는 문화재 관리 원칙으로 삼을 계획이다. 공평동 룰에 따라 건물은 기존 용적률 999%(A동 22층, B동 26층)에서 인센티브 200%를 받아 총 용적률 1199%(A동 26층, B동 26층)로 지어졌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시에 기부채납돼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으로 운영된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공평유적전시관의 가장 큰 특징은 원위치에 전면 보존한다는 것이다"며 "청진구역 등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원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 전시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업시행자에게 시에서 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인센티브를 주고, 시행자가 이에 상응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민간 건물 내의 현장 전시관은 첫 사례"라며 "공평유적전시관은 유구 원위치가 대규모로 보존돼 주목받았다. 공평동 룰이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게 하는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종로 한복판서 조선을 체험하다 전시관의 핵심 콘텐츠는 각기 다른 형태로 복원된 가옥 3채다. 입구 앞에는 '전동 큰 집'을 1/10 크기로 축소한 전시물과 영상이 있어 당시 모습과 현재 집터를 비교해가며 볼 수 있었다. 전동 큰 집 옆, '골목길 ㅁ자 집'터에는 가상현실(VR) 영상기기가 놓여 있었다. VR 체험을 마친 시민 손수희(35) 씨는 "가옥 안으로 들어가 집 내부를 둘러보는 느낌이었다. 가옥을 디지털 영상으로 재현해 집 구조를 설명해줘서 이해하기 쉬웠다"고 말했다. 손 씨는 이어 "그런데 기기 조작법이 어려워 초반에 5분 정도 헤맸다. 설명이 나와 있긴 한데 전혀 도움이 안 됐다"며 "교육적인 체험 프로그램이어서 어린이들도 사용하기 쉽게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VR 기기와 함께 사용하는 컨트롤러가 원래 2개였는데, 조작법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1개로 바꿨다"며 "제작사와 협의해 설명 패널을 교체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전시관 가장 안쪽에는 '이문안길 작은 집'이 실제와 같은 크기로 복원되어 있었다. 온돌과 마루, 아궁이 등의 주택 바닥형식이 모두 발굴돼 조선 전기의 한옥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는 전시물이다. 이문안길 작은 집을 둘러본 시민 백은경(31) 씨는 "집 안에 화로, 나막신 등이 있어 실제 사람이 사는 것 같다"며 "그 당시 이문안길 작은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관람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박물관에는 2015년 발굴된 유물 1000여 점과 인근 청진동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 20점도 함께 전시됐다. 중국 명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매병 조각, 청동거울, 조선 전기 무신 구수영의 패찰 등을 통해 당시 생활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전시관 관람 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관람료는 무료다.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휴관한다.

2018-11-13 16:23:59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32) 동면 들어가는 '뚝섬 자벌레'··· 나방으로 재탄생하나?

서울 청담대교 하부 뚝섬 한강공원에는 공상과학영화(SF)에 나올 법한 거대한 은색 건축물이 하나 있다. 롤러코스터처럼 둥글게 생긴 건물의 정체는 한강의 전망문화콤플렉스 '뚝섬 자벌레'다. 자나방의 애벌레를 모티브로 디자인해 '자벌레'라고 불린다. 지난 2010년 4월 개장한 뚝섬 자벌레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다. 건물 규모는 지하 1층~지상 3층, 길이 240m, 높이 5~12m, 폭 6~19m, 연면적 2476㎡이며, 벽 없이 기둥만 세운 필로티 양식으로 지어졌다. 자벌레는 알루미늄 패널을 붙여 만든 외벽, 기다란 곡선형 구조 등 독특한 형태로 개장 9개월 만에 누적 방문객 100만명을 돌파해 화제를 모았다. 2014년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2' 촬영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개장 이후 부실한 콘텐츠, 모호한 정체성 등의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달 26일 복합문화시설인 자벌레를 폐장하고 '카페형 도서관'으로 리모델링한다는 계획을 밝혀왔다. ◆방치된 자벌레··· "방만 운영 배경은?" 공간 리모델링 전 자벌레의 마지막 모습을 담기 위해 지난달 28일 뚝섬 한강공원을 찾았다. 공원에 들어서자 독특한 모양의 건축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벌레는 거대한 은색 구렁이처럼 보였다. 건물은 총 3층으로 구성됐다. 1층에는 전시·공연, 행사·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문화·편의시설'이, 2층에는 작은 도서관 '책 읽는 벌레'가, 3층에는 '놀이 벌레'로 불리는 생태전시관이 위치해 있다. 가장 먼저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과 이어진 1층 문화·편의시설로 들어갔다. 원통형의 하얀 복도 양쪽에는 미술 작품 20여 점이 띄엄띄엄 걸려 있었다. 대학생 이지윤(24) 씨는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어 작가가 궁금해 주변을 살펴봤는데 설명 표지판이 없다"면서 "'눈으로만 감상하세요'라는 경고 문구 외에 다른 안내가 없어 아쉽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경기도 정왕동에서 온 심은정(66) 씨는 친구가 동네에 살아 자벌레를 자주 방문했다고 했다. 심씨는 "전에 손녀와 왔을 땐 여러 가지 불빛이 나오는 다리나 애들이 만든 미술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어 참 재밌게 봤는데, 오늘은 정말 볼 게 없다"면서 "계속 이런 식이면 다신 안 올 것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3층에서 만난 시민 김모(36) 씨는 "여기에 생태체험관이 있다고 해서 공원에 온 김에 애들을 데리고 한번 와봤다"면서 "불이 다 꺼져 있어서 어항 안에 고기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물 위에는 나방만 떠다닌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동대문구 장안동에서 온 박모(42) 씨는 "자벌레가 오세훈 전 서울 시장이 만든 시설이어서 서울시가 방치하고 있는 것"이라며 "박원순 시장 때 한 거면 이렇게 방만 운영하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6일 시에 따르면, 자벌레는 2010년 조성 이후 매년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30~40회의 전시가 열렸다. 또 해마다 150회의 공연, 교육,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됐다. 그러나 자벌레는 다른 유사시설과 차별화되지 않은 콘텐츠로 방문객이 꾸준히 줄었다. 자벌레의 방문객 수는 2010년 103만5000명, 2011년 95만3000명, 2012년 80만명, 2013년 74만8000명, 2014년 71만8000명, 2015년 71만3000명, 2016년 63만9000명, 2017년 49만6000명으로 개장 이후 계속 감소했다. 시설 노후화로 인해 유지관리비는 증가하는 추세다. 자벌레 유지관리비는 2014년 4억400만원, 2015년 4억2100만원, 2016년 4억5200만원, 2017년 5억800만원으로 늘어났다. 시는 이번 리모델링 비용으로 11억6000만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자벌레 조성 당시 투입된 예산(150억원)의 8%에 달한다. 앞서 시는 지난 2월 한 차례의 시설 누수 공사를 실시한 바 있다. 자벌레는 1년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내부 공사를 진행하게 됐다. ◆"내년엔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길" 썰렁한 1, 3층과 달리 도서관이 있는 2층의 분위기는 훈훈했다. 2층 '책 읽는 벌레'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주민과 독서를 하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을 만나볼 수 있었다. 성수동에 사는 홍성연(17) 씨는 "공원에 놀러 나왔는데 비도 오고 너무 추워서 친구들과 잠깐 들어왔다"면서 "조용히 쉴 공간으로 부족함이 없다"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광진구 자양4동에서 온 심영희(65) 씨는 "동네 주민이지만 자벌레에는 오늘 처음 와봤다"면서 "사람들이 여기에서 책 읽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심 씨는 "아늑한 공간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홍보가 좀 부족한 것 같다"며 "막대한 돈을 들여 건물을 세워놨으면 잘 활용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고등학생 양서원(17) 씨는 "지나다니면서 몇 번 보긴 했지만, 안에서 뭘 하는지 몰라 와 볼 생각을 못했다"면서 "주변에 독서실이 마땅치 않아 불편했는데, 카페형 도서관으로 리모델링 된다고 하니 이제 여기에 와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며 밝게 웃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재 2층에만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고, 나머지 1층과 3층은 휴식공간 및 다목적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리모델링 후에는 층별 컨셉에 맞게 공간 구성을 달리해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자벌레는 오는 12월 리모델링을 위해 폐장한다. 시는 내달 공사에 착수해 2019년 4월 준공할 계획이다. 뚝섬 자벌레는 시민 누구나 제한 없이 공유하고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카페형 도서관으로 새로 단장해 내년 5월 1일 문을 열 예정이다.

2018-11-06 13:59:33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31) 2억명 넘게 방문한 빌딩숲 속 오아시스 '청계천'

청계천은 조선시대 개천(開川)이라고 불렸다. 한양 도성을 가로지르는 물줄기였던 개천은 우기 때 비가 많이 오면 범람했다. 도성 안 백성들의 피해가 커 개천 물길을 다스리는 일이 역대 왕들의 큰 숙제였다. 영조는 1760년 대규모 청계천 준천 사업을 실시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하수도개수계획을 추진하고 대부분의 지류를 복개해 도로로 만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청계천 복개구조물 노후화로 인한 안전문제와 천변 환경 정비 필요성이 논의됐고, 청계천 복원 여론이 형성됐다. 이에 서울시는 2003년 7월 청계천 복원사업에 착공, 2년 후인 2005년 5.8km 구간을 복원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당시 청계천은 개장 58일 만에 방문객 1000만명을 돌파하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연평균 1650만명 다녀가는 '도심 속 휴양지' 지난 22일 '서울의 허파' 청계천을 찾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조깅을 하는 외국인, 동료와 이야기 나누는 직장인들, 친구와 나들이를 나온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성북구 장위동에서 온 윤성원(40) 씨는 "회사가 근처라 짬짬이 시간을 내 청계천 산책로를 따라 자주 걷는다"면서 "건물에 갇혀 있다가 여기 나오면 숨통이 좀 트인다"며 밝게 웃었다. 취준생 조정연(24) 씨는 "종각역 카페에서 스터디 모임을 마치고 나왔다"면서 "면접 준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었는데 청계천에서 사람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쐬니 기분이 좀 풀린다"고 말했다. 청계천은 연평균 1500~1800만명이 다녀가는 도심 속 명소로 자리 잡았다. 서울시가 2005~2015년 방문객 통계를 분석한 결과, 1년 중 청계천을 찾는 시민이 가장 많은 달은 10월인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기간에는 평균 220만여명의 사람들이 청계천을 찾았다. 유동인구는 오후 2~4시에 가장 많았으며, 인기 지역으로는 청계광장과 오간수교 일대가 꼽혔다. 이날 청계천에서는 발에 물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장구를 치는 어린이와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서울시 청계천 이용·관리에 관한 조례'에 따르면, 청계천에서는 수영·목욕 등 이와 유사한 행위를 할 수 없다. 낚시행위 및 유어행위도 금지되어 있다. 이를 어길 시 행정지도 처분을 받게 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청계천은 기본적으로 물놀이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 발을 담가서는 안 된다"며 "행정지도 대상에 해당하긴 하지만 강제성은 없다. 다만, 모든 시민들이 이용하는 장소인 만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세금 먹는 하마··· 연간 유지보수비 71억원 청계천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직장인 한모(32) 씨는 "청계천에 흐르는 물은 전부 인위적으로 끌어온 것"이라며 "휴식공간이 생긴 건 좋은데 이게 다 내 피 같은 월급에서 떼어간 세금이라는 걸 알고 난 후부터는 좋게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라며 눈을 흘겼다. 더불어민주당 백재현 의원이 지난해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청계천이 준공된 2005년 10월부터 2016년 말까지 총 857억원의 유지보수비용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평균 71억원의 세금이 물길을 따라 흘러갔다. 항목별로는 인건비를 제외한 항목 중에서는 시설수리 점검, 전기료 등 유지관리비가 310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사무 관리 등 기타경비 55억원, 간접관리비 43억원, 자산취득비 5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백 의원은 "청계천 복원은 애초부터 생태 환경적 개념이 아닌 도심 정비를 위한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임기 내 완공을 위해 자연 하천이 아닌 인공 하천으로 무리하고 빠르게 복원됐다"며 "탄력적 유지용수 공급 등 예산을 절감할 수 있는 요소들을 찾아 낭비 요소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계천은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이 흐르지 않은 건천이다. 서울시는 청계천에 항상 물이 흐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외부에서 물을 끌어다 쓰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과거에는 펌프 3개를 이용해 청계천에 하루 평균 12만t의 물을 한강에서 끌어다 썼다"면서 "예산을 줄이기 위해 2016년부터는 1개 펌프를 사용해 4만t의 물을 가져다 쓰고 있다"고 밝혔다. 자양취수장에서 퍼 올린 물은 정수과정을 거쳐 관로를 따라 청계천으로 유입된다. 이날 청계천을 찾은 시민 문모(52) 씨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들도 복원한다고 들었는데, 대체 언제쯤 완성되는 건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현재 수표교 복원을 추진 중"이라며 "지금 있는 임시 다리는 23m 폭을 가지고 있는데, 수표교 원형은 폭이 27m로 더 길다. 옛 유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려면 주변 건축물과 도로에 다 손을 대야 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설명했다.

2018-10-23 15:04:42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30) 순교자 희생정신 기리는 '절두산 순교성지'

서울 마포구 양화진 동쪽 한강 변에는 누에머리처럼 생긴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잠두봉이라 불리는 이곳은 중국에서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할 때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장소였다. 1866년 2월 프랑스 로즈 제독이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문제 삼아 군함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에 침입했다. 흥선대원군은 "화친을 허락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는 척화문을 걸고 서양인에 의해 더럽혀진 양화진을 천주교인들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잠두봉에서 수많은 천주교인의 목을 베었다. 이후 잠두봉은 머리가 잘린 곳이라는 뜻의 '절두산'으로 불리게 됐다. 한국 천주교회는 병인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1967년 순교 기념관을 개관했다. 서울시와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계기로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조성했다. 서울 순례길은 지난달 14일 아시아 최초의 교황청 공식 국제 순례지로 선포됐다. 시는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스페인 산티아고와 같은 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44.1km 순례길에 포함된 순례지 일부와 인근 관광명소를 연계해 '북촌 순례길', '서소문 순례길', '한강 순례길'의 총 3개의 도보 관광코스를 개발했다. 북촌 순례길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당시 순교자 124위의 시복이 이뤄졌던 광화문 시복터에서 시작해 조계사, 인사동, 운현궁, 석정보름우물, 가회동 성당으로 구성된 코스다. 서소문 순례길 코스는 천주교 공동체 발원인 명동 대성당을 시작으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서울시립미술관을 지나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와 중림동 약현성당으로 이어진다. 한강 순례길은 마포역에서 출발해 마포나들목을 지나 한강길로 이어진다. 길의 끝에는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천주교 서울 순례길, "어딘지 몰라···" 지난 14일 한강 순례길 구간에 포함된 절두산 순교성지를 찾았다. 서강대교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당산철교 방면으로 가는 한강 순례길을 걷다 보면 성당이 세워진 절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종 3년, 천주교인들의 목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피의 절벽이 되었다고 한다. 절벽 아래 길을 따라 주차장 쪽으로 올라가면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보인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28위의 순교자와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은 총 3개 조형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에는 조선시대 형구 가를 형상화한 작품이 있고, 좌측에는 순교자들의 모습이, 우측에는 목이 잘린 순교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날 절두산을 찾은 박선형(33) 씨는 "목이 잘려 얼굴만 덩그러니 놓인 조각상을 보니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진다"면서 "순교자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기념탑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혜화동 성당을 설계한 고 이희태 서울대 미대 교수가 지은 건축물이다. 성당은 배흘림 양식의 기둥, 초가지붕 모양의 추녀, 갓 형태의 외형 등 한국의 토착성을 가미한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미사를 마친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에서 쏟아져 나왔다. 성동구에서 온 김미영(45) 씨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 때 이곳을 찾는다"면서 "이번에 국제 순례지로 지정됐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도보 관광코스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울시 관계자는 "'Visit Seoul(서울 도보관광 홈페이지)'을 통해 서울 순례길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며 "종교적인 의미의 순례길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홍보하고 있고, 명소와 연계한 관광 코스로서의 순례길은 서울시에서 홍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교도 즐길 수 있는 순례길 관광코스 순교성지답게 절두산 곳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상을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고, 성모상 앞에서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도 보였다. 지난 일요일 절두산 순교성지를 방문한 조모(49) 씨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지나가다 건물이 예뻐 보여서 왔다"며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다"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조 씨는 "천주교 신자들이 아닌 사람도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어야 사람들이 '천주교 서울 순례길'을 많이 찾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 순례길은 순례지와 연계해 서울의 다양한 명소를 소개하는 코스로 구성했다"며 "한강 순례길의 경우 마포 음식문화거리와 이어져 있어 종교적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천주교 신자 이주영(23) 씨는 "순례길 코스가 새로 생겼다고 해서 궁금해 찾아왔다"면서 "오면서 살펴봤는데 안내판 설치도 잘 안 되어 있고, 가이드북을 나눠주는 곳도 없었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재 안내 표지판 확충 계획은 갖고 있지 않다"며 "민원이 추가로 들어오면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관광안내소에 가이드북을 몇 개 구비해 놓긴 하는데 수량이 많지 않아 떨어졌을 수 있다"며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공동으로 개발한 '서울 순례길'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2018-10-16 15:31:46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29) 서울 역사 산책을 시작하는 도시 별자리 출발점, '서울역사박물관'

지형과 한 몸으로 조형된 아름다운 도시 서울은 조선왕조의 한양부터 식민시기 경성, 대한민국 서울에 이르는 육백 년 수도이다. 서울시는 종로구 새문안로 경희궁 터에 수도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도시역사박물관을 조성해 지난 2002년 개관했다. 박물관은 경희궁 터 2만9786평 중 유물이 발굴되지 않은 부지에 지하 1층~지상 3층, 연면적 6100평 규모로 지어졌다. 박물관은 기증유물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상설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서울 이야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달 16일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관람 순서를 따라 조선시대부터 해방 이후까지 서울의 역사를 소개한 3층 상설전시실로 올라갔다. 전시실은 조선시대,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고도성장기 등 시대별로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상설전시실 1존은 한양 정도부터 개항 이전까지 조선시대의 서울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한양의 육조거리(조선시대 6개 중앙관청이 있던 광화문 앞대로)와 시전 등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제일의 번화가 운종가를 작은 크기로 만들어 놓은 전시물이 가장 눈에 띄었다. 가운데로 난 큰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시전 상인들이 줄지어 앉아 물건을 팔고 있었다. 용산구 청파동에서 온 김정현(14) 군은 "교과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것들을 볼 수 있어 신기하고 재밌었다"며 "'조선시대 사람들이 명동이나 이태원에 오면 이런 기분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둘러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 한켠에는 가로 188cm, 세로 213cm의 거대한 크기의 도성대지도가 전시되어 있었다. 현존하는 서울 지도 중 가장 큰 지도로 1753~1764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경산수화 기법으로 만들어진 지도에는 관청, 도로, 하천 등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아이와 함께 지도를 살펴보던 이수정(35) 씨는 "처음에는 단순히 그림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지도였다"며 "GPS나 카메라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런 지도를 만들었는지 정말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강서구에서 온 전은영(27) 씨는 "박물관 전시 내용 중 조선시대가 좀 빈약하게 느껴졌다"면서 "조선의 역사는 500년이 넘는데 대한제국과 마찬가지로 한 구역에만 전시되어 있어 아쉬웠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시기별로 공간을 할당해야 한다는 건 편의적인 생각"이라며 "상설전시실의 반을 1존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공간적인 면으로 봤을 때 부족하지 않다"고 말했다. ◆시민의 삶이 도시의 역사로··· 상설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기증유물전시실이 있는 1층으로 이동했다. 새하얀 간호사복과 함께 간호사 월급표, 대한간호사협회 회원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물은 1960~70년대 파독 간호사인 김진향, 숙희Stadler, 서영, 서의옥, 안차조, 한정로 등이 기증한 것이었다. 송파구에서 온 박지선(26) 씨는 "당시 한국인 간호사들이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땅 독일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면서 "지금 우리나라에도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이들을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짙은 카키색과 베이지색 군복도 눈에 띄었다. 50년대 군용물품을 제공한 기증자의 남편은 6.25 전쟁 중인 1953년 임관해 1967년 대위에 예편했다고 한다. 이날 박물관을 찾은 윤모(35) 씨는 "반세기 전 군복을 통해 참혹했던 전쟁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며 "우리 윗세대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윤 씨는 이어 "전시물 중 일본인이 기증한 유물이 꽤 있던데 서울역사박물관에 왜 이들이 제공한 물건이 있는 거냐"며 의아해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일제강점기 시대 이후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인들이 서울에 대한 자료를 모아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라며 "희귀한 유물이 많아 역사적 가치를 따져봤을 때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게 맞다고 판단돼 전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종 모양의 타임캡슐 전시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서울1000년 타임캡슐'은 1994년 서울의 인간과 도시를 주제로 당시 서울의 생활, 풍습, 인물, 문화예술을 상징하는 문물 600건을 선정해 1000년 후 개봉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됐다. 보신각종 모양을 본뜬 전시물 안에는 한국주택은행에서 발행한 주택복권과 쌍방울 속옷, 1993년 개봉한 판소리 영화 서편제 테이프 등이 담겨 있었다. 타임캡슐을 유심히 살펴보던 황승택(26) 씨는 "서울 시민의 삶이 모여 한 도시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면서 "얼른 집에 가서 박물관에 전시될 만한 물건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며 활짝 웃었다. 황 씨는 "무공훈장증, 대장계급장 등 간단히 설명되어 있는 기증 유물에도 전시 배경이 자세히 나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기증자분들이 설명해준 내용을 바탕으로 안내푯말을 제작한다"며 "유물이 너무 오래되어 기억하지 못한 분들이 있어 다양한 얘기를 못 담는 제약이 있다"고 말했다.

2018-10-09 15:40:30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28) 하루 4만명 찾는 여의도 한강공원··· 불법 광고·노점 여전해

서울의 랜드마크인 국회의사당과 63빌딩 사이에는 싱그러운 초록빛 향연이 펼쳐지는 여의도 한강공원이 있다. 여의도 한강공원은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 2·3번 출구와 맞닿아 있어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하고, 도심과 가까워 서울의 대표적인 휴식처로 손꼽힌다. 하루 평균 이용자는 4만명에 달한다. 한강철교에서 국회 뒤 샛강 사면지까지 자리 잡고 있는 여의도 한강공원은 길이 8.4km, 148만7374㎡ 규모로 조성됐다. 공원은 물빛광장, 빛의폭포, 천상계단, 공원도로, 수상시설, 놀이시설, 운동시설 등으로 구성됐다. ◆개선되는 시민의식···· 쓰레기 제자리에 더위가 한풀 꺾인 지난 2일 오후, 여의도 한강공원은 선선한 가을바람을 즐기는 시민들로 붐볐다. 공원 도로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잔디밭은 텐트를 치고 휴식을 만끽하는 시민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온 정소영(26) 씨는 "친구들과 강바람을 쐬기 위해 역 근처에서 텐트와 돗자리를 빌려왔다"며 "치킨과 족발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벌써부터 신난다"며 씨익 웃었다. 이날 여의도 한강공원에는 텐트 앞에 돗자리를 깔고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치맥(치킨과 맥주)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쓰레기통이 늘어나서였을까.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공원 잔디밭은 깨끗했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지난 6월 무질서와 쓰레기 무단 투기 근절을 골자로 하는 '한강공원 특별대책'을 발표하고, 여의도 한강공원의 쓰레기통을 3배 늘린다고 밝힌 바 있다. 시는 11개 한강공원 중 가장 많은 시민이 찾는 여의도 한강에 음식물수거함과 분리수거쓰레기통을 각각 50개와 30개로 확대했다. 방문객의 쓰레기 분리·배출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서울시 관계자는 "실제 계획했던 것보다 쓰레기통을 더 설치했다"며 "주말에 나가 확인해 본 결과, 음식물 쓰레기통이 늘어나고 난 후 분리수거 비율이 꽤 높아졌다"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분리수거 캠페인을 진행 중"이라며 "음식물 분리수거가 예전보다는 잘 되고 있다. 단시간 내에 개선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나아지고는 있다"고 덧붙였다.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여의도 한강공원 근처 따릉이 대여소에는 남아 있는 자전거가 한 대도 없을 정도로 라이딩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한강공원을 찾았다는 최주혁(37) 씨는 "집 근처는 차가 쌩쌩 지나다녀 위험하다"면서 "애들이 자전거 타기에 여기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전단지, 불법노점 문제는 아직··· 한편, 공원 입구 여의나루역 앞은 전단지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광고지를 나눠주려는 아주머니와 이를 받지 않으려는 시민들 사이에서 시비가 붙기도 했다. 사람들은 팔짱을 끼거나 고개를 저으며 전단지를 거부했지만,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은 반강제로 이들의 손에 광고지를 쥐여줬다. 양손 가득 광고전단을 받은 대학생 권주영(21) 씨는 "광고지를 안 받으려고 눈을 피했는데, 막무가내로 줘서 어쩔 수 없이 받게 되었다"면서 "한 번 받기 시작하니 주변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이렇게 많아졌다"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권 씨는 "어플로 시키면 할인쿠폰도 주고 포인트도 쌓이는데 누가 이걸 보고 시키겠냐"면서 "보지도 않고 버려지는 광고지들이 쌓여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며 혀를 끌끌 찼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원 내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은 불법이다"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현장에서 직접 전단지 뿌리는 것을 목격한 후 잡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며 "민원인이 전화해 나가보면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어 단속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광고전단 실랑이가 벌어지는 곳 바로 옆에는 돗자리, 담요, 텐트 등을 대여해주는 불법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직장인 윤기현(36) 씨는 "일단 오늘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나와 돗자리랑 텐트를 빌리긴 했는데, 저분들은 세금을 내고 저기서 장사하는 건지 궁금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원 내에서 돗자리, 텐트, 담요 등을 대여하는 것도 불법"이라며 "여의도 한강공원 센터에서 계도차원의 안내는 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적발하기가 쉽지 않아 단속이 어렵다"고 말했다. 10일 시에 따르면, 불법 상행위로 과태료가 부과된 건수는 2016년 67건에서 2017년 244건으로 약 3.6배 증가했다. 여의도 한강공원센터에는 현재 8명의 단속반과 14명의 공공안전관, 총 22명의 인원이 불법 행위를 단속하고 있지만, 공원의 규모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2018-09-11 15:54:33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27) 친일파가 지어 독립운동가가 살다간 곳··· 한국 근현대사 관통하는 '백인제 가옥'

서울 종로구 북촌로 7길에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지어진 가옥은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 재력가였던 한상룡이 1913년 일대 한옥 12채를 사들여 지은 저택이다. 마지막 주인의 이름을 따 '백인제 가옥'이라 불리는 저택은 전통양식과 일본양식이 접목된 근대 한옥이다.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은 2460㎡ 대지 위에 압록강에서 공수한 흑송을 재료로 최대 규모의 최고급 가옥을 세웠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00년 전 서울 상류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백인제 가옥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조성해 지난 2015년 시민에게 개방했다. ◆전통방식에 일본양식 접목한 근대한옥 지난달 24일 북촌에서 두 번째로 큰 한옥, 백인제 가옥을 방문했다. 가회동 주민센터에서 정독도서관 쪽으로 난 골목으로 100m 정도 들어가자 먹색 기와의 높다란 대문이 보였다. '백인제 가옥'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대문간채는 조선 사대부가에서 사용한 솟을대문 형식으로 지어졌다. 당대 최고 권력가 한상룡의 위세를 짐작게 하는 거대한 대문간채를 지나자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중문간채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을 통과하자 탁 트인 마당과 함께 사랑채와 안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인제 가옥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가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로 들어갔다. 가옥 안채의 대청과 툇마루는 모두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설사는 "우리나라는 봄은 건조하고 여름은 습한 계절적 특성을 갖고 있어 나무 바닥이 잘 썩는다"며 "바닥을 쉽고 편리하게 교체하기 위해 우물마루로 만든 것이다"고 설명했다. 백인제가옥은 전통한옥과 달리 안채와 사랑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밖에서 보면 'ㄷ'자 모양처럼 보였다. 사랑채의 툇마루와 복도에는 장마루가 깔려 있었다. 해설사는 "사랑채는 한상룡이 일본 고위인사들과 연회를 즐기던 곳으로 안채와는 달리 일본식 장마루로 구성됐다"고 말했다. 서대문구 창천동에서 온 박서현(26) 씨는 "사랑채의 문을 열면 정원과 곧바로 이어지게 해 놓은게 특히 인상깊었다"며 "이렇게 좋은 곳에서 한상룡이 조선총독부 고위 인사들과 파티를 즐겼다는 사실이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하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거쳐 간 집 사랑채 앞 정원 한 켠에 있는 샛길로 들어가자 가옥 내 비밀의 공간으로 불리는 별당채가 보였다. 별당채는 다른 건물들보다 반 층 더 높게 세워져 있었다. 수원 영통구에서 온 서영미(61) 씨는 "별당채를 왜 이렇게 외진 곳에 만들어놨나 궁금해하며 올라왔는데 창밖 풍경을 보니 단번에 이해가 갔다"며 "북촌이 한눈에 들어와 정말 아름답다"며 활짝 웃었다. 서 씨는 "조용하고 아늑해 휴식 장소로 정말 안성맞춤이었을 것 같다"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해설사는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별당채 천장을 올려다보라고 말했다. 천장에는 부챗살처럼 생긴 나무 기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해설사는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은 목수가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기 때문에 건축비가 많이 든다"며 "집주인의 재력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요소다"고 말했다. 백인제 가옥의 초대 주인 한상룡은 을사오적 이완용의 조카이다. 일제강점기 은행가였던 그는 조선 재계 일인자로 1906년부터 가회동 일대 민가를 구입, 1913년 대저택을 완공했다.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한상룡의 손을 떠난 가옥은 1935년 개성 출신의 언론인 최선익에게 넘어갔다. 집은 그 후로부터 9년 뒤인 1944년, 3·1운동 주도자이자 당대 최고 외과 의사였던 백인제 박사(백병원 설립자)의 소유가 됐다. 6·25 전쟁 중 백인제 박사가 납북된 뒤에는 그의 부인 최경진 씨가 가옥을 지켰다. 서울시는 2009년 최 씨로부터 가옥을 매입해 100년 전의 모습을 복원,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인천 부평구에서 온 송민혜(62) 씨는 안채에 놓인 'VICTOR' 축음기를 보며 "와 이거 정말 옛날에 우리 집에 있던 건데···"라며 반가워했다. 송 씨는 "그 시대 때 이 정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집이 으리으리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백인제 가옥은 현재 80% 복원된 상태이다"며 "차근차근 고증을 거쳐 보완해나갈 예정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부 사진이 남아있는 게 없어 그 당시 상류층이 사용했을 법한 물건들로 공간을 꾸며놓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사전 예약을 하지 않고 백인제가옥을 찾은 손광은(28) 씨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내부를 관람할 수 없어 아쉬웠다"며 "현장신청도 받아 건물 내부 투어를 진행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부득이하게 인원 제한을 해 관람하도록 하고 있다"며 "현재 1회 최대 관람 인원이 25명인데, 향후 조금씩 늘려나가겠다"고 말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지난해 백인제 가옥을 찾은 방문객은 총 16만3250명으로 하루 평균 500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2018-09-04 15:27:46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26) 외세에 휘둘린 조선··· 뼈아픈 역사 담긴 아관파천 피신로 '고종의 길'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태자와 함께 궁녀 교자(여성용 가마)를 타고 경복궁 건춘문을 빠져나와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임금이 거처할 곳을 옮긴다는 뜻) 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를 데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약 1년을 머물렀다. 문화재청은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할 때 사용한 ‘고종의 길’을 복원해 이달 1일부터 시범 개방했다. ◆ 열강 속 대한제국 운명··· 고뇌하는 고종 고종의 길은 정동공원과 덕수궁 선원전 터 사이에 난 120m의 좁은 길이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1년 미국과 토지교환으로 덕수궁 선원전 부지가 국내 소유가 되자 경계에 석축과 담장을 쌓아 길을 새로 닦았다. 낮 기온이 36도까지 치솟은 지난 11일 고종의 길을 방문한 임현아(51) 씨는 “‘내 나라를 코앞에 두고 남의 나라로 피신해야 하는 심정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길을 걸었다”면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른 1년 동안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쓰나미처럼 조선을 침략해와 심적인 부담이 컸을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노원구 중계동에서 온 안복선(51) 씨는 “시대는 변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우리나라는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다”며 “미·중 무역전쟁을 보면 과거 러일전쟁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안 씨는 “고종의 길에서 100여 년 전부터 반복되어 온 한국 수난의 역사를 느낀다”며 울상을 지었다. 아관파천 직후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 등은 백성들에 의해 격살 당했다.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구성됐다.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등이 요직에 임명됐다. 고종은 단발령을 폐지하고 공세를 탕감하는 등 민심 수습에 나섰다. 이날 아이들과 고종의 길을 찾은 김영신(43) 씨는 “한 나라의 왕이 새벽에 은밀히 러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궁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팠다”며 “치욕의 길이지만 올바른 역사의식 고취를 위해서라도 널리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어린 친구들은 이런 역사를 잘 모르는데, 아관파천 내용을 담은 안내 푯말을 길에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 궁능문화재과 관계자는 “시설 안내판은 10월 정식 개방 때까지 설치하겠다”며 “시범 개방 이후 가로등 설치, 직원 배치 문제 등을 보완해 정식 개방 때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 고종의 길을 둘러싼 또 하나의 담장 길 중간 즈음에는 미 정부 소유 부지 출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동작구 상도동에서 온 박모(38) 씨는 “왜 고종의 길 한복판에 미 정부 소유부지가 있는 거냐”며 “출입을 못 하게 막아놨던 데 여기는 우리나라 땅이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은색 스테인리스 재질의 표지판을 기점으로 고종의 길에는 양쪽으로 나 있는 두 개의 담벽 외에 하나의 담장이 더 만들어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고종의 길을 복원하면서 정부 간 체결한 양해각서 내용에 따라 미국 대사관저가 있는 왼쪽은 보안상의 문제로 담장을 높게 설치해 놓은 것이다”고 설명했다. 덕수궁 문화해설사로 일하는 김종구(70) 씨는 “사람들이 고종의 길을 걸으면서 ‘우리나라의 문제를 외세에 의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고종의 길을 복원한 건 참 좋은데, 길이나 담벽이 현대식으로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면서 “옛 정취가 느껴지지 않아 '122년 전 그 길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문화재청 관계자는 “고종의 길은 당시 미국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와 옛날 사진, 자료 등을 검토해 복원했다”며 “보안을 위해 미국 대사관저 쪽 담장만 위로 높게 올렸을 뿐 담장 역시 전통식으로 쌓은 게 맞다”고 설명했다. 고종의 길 옆에는 성인 한 명이 오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뚫린 슬레이트 가림막이 있었다. 입구 안으로 들어서자 갈색 한옥 지붕의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 보였다. 조선저축은행은 정동정 1-39번지 대지를 사들여 지하 1층~지상 2층, 141평 규모의 사택을 지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저택은 오랜 기간 미국 대사관에서 사용해왔다. 건물 안은 안전상의 문제로 들어갈 수 없어 외부에서만 관람할 수 있었다. 오랜 기간 관리되지 않아 건물 곳곳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고, 지붕과 벽 사이에는 거미줄이 잔뜩 처져 있어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은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철거할 예정이다”며 “옛날 덕수궁 선원전 부지여서 올해 주변 시설물을 드러내고 내후년부터 유구를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18-08-21 14:58:14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25) 조용해진 '이화마을', 벽화 지워 오버투어리즘 문제 해결?!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 끝자락에는 담벼락 전체가 알록달록한 그림들로 뒤덮인 작은 마을이 있다.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로 불리던 이화마을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대에 벽화작품을 조성, '이화벽화마을'로 재탄생했다. 대학교수, 전문가뿐만 아니라 대학생 자원봉사자, 중·고등학교 학생, 마을 주민이 벽화 작업에 동참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이화마을은 정겨운 동네 분위기와 어우러진 벽화들로 채워졌다. 벽화는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조용한 동네는 관광객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지난 2010년 KBS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에서 연예인 이승기가 날개 벽화 앞에서 사진을 찍은 모습이 화제가 돼 유명 관광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오버투어리즘(과잉 관광)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마을 속으로 들어갈수록 주민들의 속내를 들어낸 상처가 우리를 아프게 한다. ◆관광객으로 스트레스 받던 주민 벽화 지워 지난 3일 찾은 이화마을은 관광명소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이날 오후 두시간 동안 마을에서 본 관광객은 10명 남짓이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산책할 겸 이화마을을 들렀다는 직장인 김주희(29) 씨는 "2년 전만 해도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는데, 오늘은 사람이 정말 없다. 불금 맞냐"며 썰렁한 동네를 둘러보면서 의아해했다. 오버투어리즘(과잉 관광)으로 고통받던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서울 혜화경찰서는 지난 2016년 5월 마을의 벽화를 지운 이화동 주민 5명을 공동재물손괴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붙잡힌 주민 중 3명은 벽화마을 계단에 그려진 4200만원 상당의 해바라기 그림 위에 회색 페인트를 칠해버렸고, 나머지 2명은 1000만원짜리 잉어벽화를 지웠다. 경찰 조사 결과 주민들은 관광객으로 인한 소음, 쓰레기, 낙서 문제에 대해 구청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해왔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불만을 갖고 벽화를 훼손한 것으로 밝혀졌다. 마을 주민들이 없애버린 '해바라기' 벽화 앞에서 만난 장현성(34) 씨는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와 오늘 같이 왔다"며 "입구에서는 아기자기한 조형물이랑 귀여운 그림들이 많아 즐거웠는데, 안으로 들어올수록 점점 무서워진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날 충신4나길 계단에서는 해바라기와 잉어 그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림이 사라진 계단 옆 담벽에는 '조용히'라는 말이 빨간색으로 5번 넘게 쓰여져 있었다. 서대문구 창천동에서 온 서지연(26) 씨는 "학교 앞에서 자취하고 있어 관광객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주민들 심정을 백번 이해한다"며 "사진을 찍는다고 길을 막고 있거나 집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소음, 쓰레기, 낙서 문제는 시에서 정비사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며 "주민들끼리 자체적으로 규약을 정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화마을을 찾은 시민들을 시에서 일방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불청객 줄어 환영" vs "손님 없어 불만"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이게 사람 사는 동네지···" 마을 꼭대기 정자에서 만난 이화동 주민 이모(77) 씨는 관광객이 줄어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이 씨는 "그림 지우고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 예전에는 말도 못 하게 시끄러웠다"며 "조용해져서 좋다. 벽화를 지운 사람에게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을 정도"라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반면, 건너편에 앉아 있던 동네 주민 황모(76) 씨는 "동네에 사람이 많이 와야 경제가 살아난다"며 "훼손된 벽화가 하루빨리 복원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벽화마을에 있는 잡화점과 카페, 음식점에서는 손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게 안에는 사장과 종업원만 있었다. 지난해 종로구가 발표한 '빅데이터 활용 종로 관광통계 분석 연구용역'에 따르면, 2016년 10월부터 2017년 6월까지 벽화마을이 위치한 이화동의 월평균 관광객 수는 32만5225명이다. 종로구 관내에서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는 삼청동 북촌한옥마을의 방문객 수(218만1978명)의 1/7 수준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해 재생계획 수립에 착수해 현재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하반기에 결정 고시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이라며 "이화동이 오랫동안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보니 기반시설이 열악하다. 도로정비, 노후 상하 수도관 교체 사업 등을 실시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2018-08-07 15:48:39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24) 발길 뜸한 '돈의문 박물관 마을' 대체 뭐가 문제일까?

서울시가 340억원을 들여 지은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주먹구구식 운영과 저조한 관람객 수로 빚 좋은 개살구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시와 종로구의 소유권 정리가 끝나지 않아 제대로 된 운영이 이뤄지지 않고, 정식 휴관일이 아닌 일요일에도 문을 열지 않아 방문객 수가 점점 줄고 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어떤 곳? '의의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을 가진 서울의 서쪽에 있는 돈의문은 태조 5년 한양 도성을 쌓을 때 세워졌다. 도성 사방 4개의 성문(숙정문·돈의문·숭례문·흥인지문) 중 하나인 돈의문은 임진왜란 중 소실됐다. 이후 숙종 때 재건됐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전철 공사를 이유로 다시 철거됐다. 서울시는 돈의문 터가 남아 있는 정동사거리 인근의 마을 전체를 리모델링해 9770㎡ 규모의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조성, 지난해 9월 개관했다. 박물관 마을에는 조선 시대부터 2013년 철거 전까지 돈의문 일대의 역사가 담겨 있다. 마을에는 사라진 동네의 역사와 골목 문화를 기록해 놓은 '돈의문 전시관', 한옥을 되살려 문화 체류 공간으로 활용한 '한옥체험시설', 공공건축문화와 역사를 보존해 놓은 '서울도시건축센터',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시민들과 생활예술을 실천하는 '공방·문화 골목' 등이 있다. ◆휴관일 아닌 일요일도 문 닫아 지난 22일 오후, 박물관 마을은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 시간을 돌아다닌 끝에 어렵게 만난 방문객 김긴희(47) 씨는 "여기에 박물관 마을이 있다고 해서 조카들을 데리고 왔다"며 "그런데 전시실 문이 거의 다 닫혀있어 볼 만한 게 정말 없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실제로 이날 박물관 마을에서 문을 연 곳은 돈의문 전시관과 서울도시건축센터 등 일부 시설뿐이었다. 나카가와 히데코 등 요리연구가들이 쿠킹 클래스를 운영한다던 음식문화센터 '키친레브쿠헨', 헌 옷과 재활용품 등을 활용해 새 옷을 만드는 친환경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던 헌옷 리뉴얼센터 '래코드' 등의 문은 전부 굳게 닫혀있었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 운영 팸플릿에 따르면, 공방·문화 골목에 있는 두 센터들의 운영시간은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남 거창에서 온 이모(53) 씨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멀리서 왔는데, 한옥이고 뭐고 문이 다 잠겨있다"면서 "운영을 안 할 거면 왜 비싼 돈을 들여 만들어 놓은 것인지 궁금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시가 돈의문 박물관 마을에 투입한 세금은 340억원이다. 박물관의 공식 휴관일은 월요일이지만, 공방, 전시관 교육관, 한옥 등 대부분의 시설이 일요일에도 문을 열지 않았다. 서울시의 주먹구구식 운영으로 이날 박물관 마을을 찾은 시민들은 황금 같은 주말 오후를 날려야 했다. ◆서울시 vs 종로구, "누가 가져갈지···" 동네 주민 김모(47) 씨는 "서울시랑 종로구가 박물관 마을 소유권을 두고 다투고 있어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며 "이게 들어서면 관광객들도 많이 오고 상권도 살아나서 동네가 좀 더 좋아질 줄 알았는데, 이전보다 썰렁해졌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차라리 원래 계획대로 박물관이 아닌 공원이 생기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물관 마을이 위치한 신문로2가 일대 부지는 지난 2014년 돈의문뉴타운 조합이 정비사업구역에 경희궁 자이 아파트를 짓는 조건으로 종로구에 기부채납한 곳이다. 서울시는 한양의 사대문 중 하나였던 돈의문과 성벽 아랫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도시재생사업으로 이 일대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시는 기부채납 받은 부지의 용도를 공원에서 문화시설로 변경, 철거되기 전까지 교남동과 새문안동네의 역사를 살려 마을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서울시는 계획 단계서부터 예산 투입, 마을 조성 등 전부 시에서 했기 때문에 소유권은 시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종로구가 조합으로부터 기부채납받은 공원 부지는 해당 자치구 소속이라며 맞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박물관 마을 소유권 분쟁과 관련해 30일 서울시 관계자는 "정비사업 완료 후 조합이 해산하면 땅에 대한 소유권은 그때 가서 결정할 예정"이라며 "현재 건물 운영에 지장이 없도록 토지사용승낙을 받아놓은 상태이다"고 말했다. 종로구 관계자는 "공원은 구에서 관리하지만, 박물관 마을이 문화시설로 되어 있어 서울시와 협의 중이다. 아직 결정난 건 없다"며 "2020년 6월로 계획된 준공 완료 시점까지 협의를 완료하겠다"고 말했다.

2018-07-31 16:01:40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23)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 쉬는 날'에도 북적북적··· 의미 없는 '관광 허용시간'

동서로는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남북으로는 북악산과 남산으로 둘러싸인 북촌은 풍수지리적으로 길한 곳에 위치해 있어 예부터 권문세가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 조선시대 최고의 주거지로 각광받던 북촌은 2018년 한 달에 만 명이 넘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 최악의 주거지로 전락했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달 14일 관광 허용시간 도입을 골자로 하는 '북촌 한옥마을 주민피해 개선 대책안'을 발표했다. 시는 7월부터 북촌로 11길 일대를 평일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관광할 수 있게 하고,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는 통행을 제한한다고 했다. 또 일요일은 '골목길 쉬는 날'로 지정해 관광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골목길 쉬는 날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요일인 지난 15일 북촌로 11길을 방문했다. ◆ "골목길 쉬는 날이라고요? 전혀 몰랐습니다" 올해 첫 폭염경보가 내려진 15일 오후 북촌 한옥마을 입구 돈미약국 앞은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이날 친구들과 북촌 한옥마을을 찾은 김수연(23) 씨는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고 너무 예뻐서 왔는데 마을 분위기가 살벌하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는 "입구에서부터 붙어 있는 현수막을 보니 괜히 왔나라는 생각이 든다"며 "주민들 눈치가 보여 빨리 사진만 찍고 자리를 떠야겠다"고 말했다. 한옥마을 곳곳에는 빨간색 현수막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현수막에는 '새벽부터 오는 관광객 주민은 쉬고싶다', '북촌한옥마을 주민도 인간답게 살고싶다', '주거지인 북촌 주민의 사생활과 재산권을 보호하라' 등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마을주민 김모(56) 씨는 "서울시에서 관광 허용시간을 도입한다고 했는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뿐더러 강제성도 없어 하나 마나다"며 "골목길 쉬는 날이라는 오늘도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미국에서 온 엘레인(24) 씨는 "한옥마을에 관광 제한시간이 있는지 몰랐다"며 "여행 일정 때문에 일요일에 올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둘러보고 가겠다"고 작게 속삭였다. 서울시 관광정책과 관계자는 "골목길 통행을 제한할 법적인 근거가 없어 강제성을 부여하기 어렵다"며 "종로구 거주자를 대상으로 북촌마을 지킴이를 모집했다. 그동안은 서울시 인력을 투입했지만, 27일부터는 지킴이를 현장에 배치해 무단 촬영·침입 등 관광객 금지행위에 대한 계도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고 말했다. 좁다란 한옥마을 길을 따라 반야로차도 문화원이 있는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위이이이이잉' 청소기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봤더니 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소리의 정체는 외국인 방문객이 드론을 띄워 발생한 소음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온 마을 주민은 "노 드론! 스탑!"이라고 소리치며 관광객을 제지했다. 시에 따르면, 북촌마을 지킴이는 관광객이 많은 시간대(오전 11시~오후 4시)에 두 타임으로 나눠 3명씩 배치된다. 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6명의 지킴이가 관리해야 한다. 게다가 관광 제한시간에 한옥마을을 방문한 불청객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할 마을 지킴이도 없다. ◆ 북촌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 현재 북촌에는 1200여 동의 한옥에 약 82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관광 허용시간'과 같은 보여주기 식 대책이 아닌 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을 요구했다. 종로구 가회동에 사는 박모(63) 씨는 "관광 수익금 일부를 주민들을 위해 사용하거나 시에서 소음공해 피해 보상금을 지급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북촌 한옥마을처럼 투어리스티피케이션(주거지역이 관광지화되면서 원주민이 소음·쓰레기·주차 문제 등을 이유로 이주하는 현상)을 겪은 부산 감천문화마을은 주민협의체가 사업장을 운영해 얻은 관광 수익금을 방범 CCTV 설치, 소방시설 정비 등 주민 복지에 사용, 관광객과의 갈등을 해결해나가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옥마을에도 주민협의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감촌마을과 한옥마을은 상황이 많이 달라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소음 피해 보상금과 관련한 내용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삼청동 주민 김은실(52) 씨는 "지구단위계획을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 주택건축국 관계자는 "현재 2010년 수립된 지구단위계획을 재정비하고 있다"며 "지구단위계획 폐지를 요구하는 주민은 극히 일부"라며 "오히려 한옥의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민 의견이 더 우세하다"고 말했다. 한편, 종로구의회가 지난 3월 '주민과의 대화'를 통해 의견을 청취한 결과, 주민들은 지구단위계획에 ▲정주환경 보호 및 개선 ▲골목상권 보호 ▲한옥 보전 ▲특화거리 조성 ▲상업시설 도입 ▲편의 및 주차시설 확충 등의 내용을 요구한 것으로 조사됐다.

2018-07-24 14:20:12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㉒ 조선 백성 19만명 구슬땀 뚝뚝··· '한양도성 박물관'

동대문 성곽공원에는 태조 5년부터 현재까지 약 600년 동안 서울을 지킨 성벽의 역사를 담은 한양도성 박물관이 있다. 한양도성박물관은 목동으로 이전한 이화여자대학교 동대문병원의 연구동 하나를 철거하지 않고 리모델링해 지난 2014년 개관했다. 박물관은 한양도성의 현재를 볼 수 있는 1층 전시실과 다양한 기획전시가 열리는 2층 전시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모습과 도성 훼손·복원·발굴 과정을 소개한 3층 전시실로 조성됐다. ◆성벽에 새겨진 조선의 역사 지난 8일 서울의 울타리, 한양도성의 역사와 변화를 살피기 위해 박물관을 찾았다. 1층 전시실 안에는 곡면으로 된 대형 스크린 하나가 설치돼 있었다. 원하는 순성 구간을 누르면 드론으로 촬영한 한양도성 영상이 화면에 나타나는 '디지털 순성 체험' 코너였다. 성북구 삼선동에서 온 최윤복(72) 씨는 "한양도성 약 18km 구간을 여기에서 다 둘러볼 수 있어 좋다"면서 "나처럼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돌아다니기가 힘든데 우리한테 안성맞춤이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양도성 박물관 관계자는 "도성을 전부 돌아보지 않더라도 박물관 한 자리에서 모든 구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이다"고 말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태조 어진 복원 모사도도 주목받는 전시물 중 하나"라며 "준원전 태조 어진의 유리원판 사진과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참고해 복원 모사한 것이다. 어진에서는 수도 천도 당시 태조의 장년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후 1시가 되자 파란 조끼를 입은 중·고등학생 수십 명이 우르르 박물관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실제 돌을 이용해 태조·세종·숙종·순조대의 성벽 축조 기술을 소개한 전시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기도 파주시에서 온 최정은(19) 학생은 "한양도성을 순성하는 중에 박물관에 들렀다"며 "성벽을 따라 직접 걷다 보니 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기별로 성벽의 돌을 쌓는 방식이 달랐다는 게 특히 흥미로웠다"면서 "개인적으로는 정방형 형태의 돌을 쌓아 올린 숙종대의 축성방식이 마음에 든다"며 수줍게 웃었다. ◆"거기엔 왜 올라가셨나요?"··· 문화재 괴롭히는 사람들 한양도성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훼손됐다. 일제는 1925년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 도성 주변 성벽을 헐어버렸다. 해방 이후에는 도로, 주택, 학교 등을 지으며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반복됐다. 이날 박물관을 찾은 조철희(33) 씨는 "사람들이 성문은 잘 알지만, 성벽은 잘 알지 못한다"며 "도성을 복원하되 원 석재를 훼손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으로 잘 살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 씨는 이어 "박물관을 둘러보고 전시실과 이어진 순성구간을 탐방할 생각이다. 빨리 밖으로 나가 성벽을 따라 걷고 싶다"며 들떠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도성이 가까이 있고 전시실로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찾다 보니 현재 위치로 오게 되었다"며 "한양도성 탐방로와 인접해 있어 하루 평균 방문객은 438명, 연평균 방문객은 16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박물관 3층 전시실 문을 열었더니 푸른 언덕배기를 따라 켜켜이 쌓인 성벽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박물관 관람에 이어 낙산구간 순성길에 올랐다. 성곽공원 잔디밭과 흥인지문, DDP 등 동대문 일대 도심 전경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성벽을 따라 성북구 한성대입구역 쪽으로 걸어갔다. 순성 도중 성벽 위에 올라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는 시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양도성을 관리하는 서울시 문화본부 관계자는 "단순히 올라간 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벌금 규정이 없지만, 한양도성은 사적 제10호로 낙서 등 성을 손상하는 행위가 적발되면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도성관리팀은 CCTV 관제를 통해 성벽에 올라간 시민들에게 계도 차원의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며 "하루 평균 4~5명 정도가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성벽에 올라가는데 성벽의 평균 높이가 5~8m로 높아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되도록 올라가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2018-07-17 12:11:46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㉑ 한양도성 600년 물길 역사 담은 '청계천 박물관'

청계천 하류 구간에 위치한 두물다리에서 용두공원 쪽으로 걷다 보면 물길을 재현해 놓은 듯한 건물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유리 튜브처럼 생긴 청계천 문화관은 2005년 청계천복원을 기념해 건립됐다. 청계천 문화관은 2015년 개관 10주년을 맞아 전시 내용을 리뉴얼해 청계천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청계천 박물관은 성동구 마장동에 연면적 5712.40㎡,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로 조성됐다. 박물관은 개천 시대, 청계천·청계로, 청계천 복원사업, 복원 후 10년을 주제로 한 4개의 전시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시대 청계천의 모습은? 지난달 17일 600년 서울의 역사를 간직한 청계천 박물관을 찾았다. 전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속성을 따라 4층에서부터 1층으로 이어졌다. 관람순서를 따라 조선 시대 한양의 젖줄 청계천을 다룬 4층 1존으로 이동했다. 청계천은 지대가 낮은 도성 아래 물길이 모여 생긴 자연하천으로 조선 시대에는 '개천'으로 불렸다. 폭우가 쏟아지면 다리가 사라지고 집들이 물에 잠겼다. 영조는 1760년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개천 바닥을 깊이 파내 물이 잘 흐르도록 하는 준천 작업을 실시했다. 성북구 보문동에서 온 유호청(46) 씨는 "서울시장이 바뀔 때마다 진행된 청계천 공사가 조선 시대 때부터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며 "조선 시대 영조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청계천 준천 공사를 했듯, 시장들도 본인의 업적이 아닌 시민을 위해 청계천을 살펴야 한다"고 꼬집었다. 경기도 안산에서 온 채계병(60) 씨는 "오늘 박물관에 오지 않았다면, 청계천 공사 과정 중 장통교가 사라진 것도, 수표교가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사실도 몰랐을 것"이라며 "현재의 청계천 모습뿐만 아니라 과거 모습도 알게 돼 좋았다"며 밝게 웃었다. 청계천 박물관 관계자는 "개관 당시에는 청계천 복원공사 전후, 비교적 최근 내용만 다뤘다"며 "전시관을 새롭게 단장한 2015년부터는 청계천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전시에 담아 조선 시대부터 현재까지 청계천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발의 상처, 어디에? 3층 2존은 청계천 물길이 도로가 되는 과정을 담아냈다. 6·25 전쟁이 끝난 폐허의 땅, 청계천변에는 피난민들이 내려와 거대한 판자촌을 이뤘다. 급격한 도시화를 거치며 청계천은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다. 정부는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를 통해 하천 위를 콘크리트로 덮었다. 이날 박물관을 찾은 김효숙(57) 씨는 "청계천 판자촌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데 박물관에서 그때 아련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 반갑고 기쁘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온 박준영(36) 씨는 "청계천에 관한 한 권의 책을 읽은 것 같다"며 "저는 참 즐거웠는데, 애들이 너무 지루해해서 혼났다"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청계천 박물관에는 시청각 자료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전시물이 A4용지 한쪽 분량의 줄글과 함께 진열돼 있었다. 유아나 초등학교 저학년의 어린이들은 금세 흥미를 잃고 박물관 내부를 뛰어다녔다. 박물관 관계자는 "아이들에게 전시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라며 "어린이들을 위한 청계천 판잣집 만들기, 보드게임 등의 체험 프로그램은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2층에는 청계천 복원부터 10년 후의 미래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3존에는 청계천을 복원하기까지 서울시정의 변화, 복원 공사 시행 등 사업 전 과정이 전시되어 있다. 4존에는 복원 후 미완의 과제로 남은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서울시가 구상한 미래 모습을 미리 엿볼 수 있다. 노원구 상계동에서 온 윤모(64) 씨는 "청계천에서 쫓겨나 가든파이브에 반강제로 입주한 상인들 중 생활고로 투신자살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쏙 빼놨다"며 "박물관 전시 내용에 개발의 장점만 부각해놓고 청계천 복원 계획을 홍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청계천 박물관 관계자는 "'청계천 2050 마스터플랜' 계획이 있다는 걸 전시한 것"이라며 "계획의 잘잘못(시비)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관련 사실만을 보여주려 노력했다"고 항변했다.

2018-07-10 16:25:11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⑳ 2% 부족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고인 물 갈아야···"

서울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 끄트머리에는 한국 근·현대사 비극을 간직한 붉은 담벽의 옥사가 있다. 감옥은 1908년 일제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가두기 위해 세운 것으로 유관순 열사, 백범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가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건립 당시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감옥은 증·개축을 통해 수용 가능 인원이 3000명까지 늘어났다. 개소 이후 80년 동안 약 35만명을 수감한 감옥은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됐다. 서울시는 숱한 민족 수난사가 배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으로 조성, 1998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문을 열었다. ◆독립운동가로 남은 친일 변절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전시관과 중앙사, 11·12 옥사, 여옥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지난달 10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방문했다. 입구로 들어서자 과거 보안과 청사로 사용됐던 2층짜리 전시관 건물이 보였다. 관람 순서를 따라 가장 먼저 건물 2층 민족저항실로 올라갔다. 전시실에서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이날 역사관을 방문한 조길환(가명·56) 씨는 "왜 친일파 윤치호가 독립운동가로 나와 있는 거냐"면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 저런 잘못된 것들은 당장 치워야 한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윤치호는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조작해 비밀 결사조직 신민회 회원을 검거·고문한 105인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에 출소했다. 이후 그는 친일파로 변절, 일본 귀족원의 칙선 의원을 지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계자는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람 중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인물, 사진이나 기록이 남아 있는 인물들을 위주로 전시하고 있어 윤치호 선생이 포함된 것이다"고 해명했다. 민족저항실을 둘러본 후 고문실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고문실은 물고문실, 임시구금실, 취조실, 지하 독방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지하 고문실에서는 머리에 짚으로 만든 용수(수감자가 앞을 볼 수 없도록 얼굴을 가리는 갓의 한 종류)를 뒤집어쓰고, 양 팔목에 수갑을 찬 어린이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수형도구 체험을 한 이준우(12) 군은 "앞이 안 보여 답답하고 두려웠다"며 "저 시대에 태어났어도 무서워서 독립운동을 못했을 것 같다"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고문실 한켠에는 관 세 짝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벽에 서 있는 관의 정체는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가둬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 고통을 주는 고문 기구였다. 마포구 합정동에서 온 김성태(45) 씨는 "몸을 잔뜩 웅크려 봤는데도 벽관에 들어갈 수 없어 포기하고 나왔다"며 "독립운동가들이 이 좁은데 갇혀 고생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여성독립운동가는 독립의 꽃? 전시관 뒤쪽에는 방사형으로 뻗은 10·11·12 옥사와 연결된 중앙사가 있었다. 중앙사는 옥사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중앙사 감시실로 이동했다. 중앙감시실에는 나무 상자처럼 생긴 간수 감시대가 있었다. 해설사는 "모두 감시대 위로 올라와 옥사를 둘러보라"고 말했다. 감시대에 올라서자 일자로 길게 뻗은 옥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해설사는 관람객들에게 "이제 감옥 안으로 들어가보라"고 권했다. 3평 남짓의 공간에 어른과 아이 20명 정도가 들어가자 감옥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다.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온 김미경(53) 씨는 "들어가는 순간부터 가슴이 답답해 숨이 안 쉬어 졌다"면서 "일본이 여기에 30명을 가둬놨다고 들었는데, 오늘같이 습하고 더운 날은 정말 고생이 많았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역사관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마지막 관람 장소인 여옥사에 도착했다. 여옥사는 미결수와 사형수 등을 가둔 장소로 1979년 철거됐다가 설계도면이 발견돼 지난 2011년 복원됐다. 여옥사를 방문한 김모(29) 씨는 "여옥사 안에 있는 시청각 자료에 '독립의 꽃 여성독립운동가'라는 문구가 매우 불쾌했다"면서 "남성독립운동가도 사람이 아닌 꽃으로 표현하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 씨는 "여옥사 내의 또 다른 시청각 자료에서는 '고문을 당해 부은 얼굴로 찍힌 사진 때문에 유관순 열사가 부정적인 인상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하는 영상이 나오는데 대체 누가 유관순 열사의 사진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관계자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다른거다"고 짧게 답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 3월 시와 자치구가 추진하는 사업에 성역할 고정관념, 성차별적 요소 등이 담긴 사례를 점검하는 시민 성평등 모니터링단을 운영, 점검 내용을 사업에 반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18-07-03 15:28:31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⑲ 진화하는 공원, 뚝섬 '서울숲'

한강과 중랑천,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뚝섬은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가 매사냥을 즐기던 장소였다. 백 년 전에는 정수장으로, 1954년에는 경마장으로 쓰였던 뚝섬에 2005년 여의도공원 5배 규모의 서울숲이 들어섰다. 서울숲은 물놀이터, 조각 정원, 무장애 놀이터가 조성된 문화예술공원, 사슴, 고라니, 토끼 등의 동물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생태숲, 곤충식물원과 나비 정원이 있는 체험학습원, 습지생태원, 한강 수변공원 등으로 이뤄져 있다. ◆민간 위탁 첫 사례, 효과는 지난 3일 개장 13년을 맞는 서울숲을 방문했다. 공원 입구에서 중랑천 쪽으로 10여 분을 걸어 들어가자 푸르른 녹음이 가득한 메타세쿼이아 길이 펼쳐졌다. 길 끄트머리에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뾰족한 지붕의 통나무집이 보였다. 다락방 창문에는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가, 지붕에는 마녀가 타고 다니는 빗자루가 붙어 있었다. 서초구 잠원동에서 온 김윤서(11) 양은 "집이 꼭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의 집처럼 생겼다"면서 "책에서처럼 집이 과자로 만들어져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었다. 공원 운영을 맡은 민간단체 서울숲컨서번시 관계자는 "가족마당 뒤쪽 어린이 정원은 성동구 공동육아 커뮤니티가 공간 기획과 조성, 관리 전 과정에 참여해 만든 장소"라며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를 컨셉으로 만든 테마정원이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이어 "마녀의 집은 지역 주민이 낸 아이디어가 실제 공원 조성에 적용된 사례"라며 "서울숲은 공원 관리와 운영에 지역 주민들이 직접 의견을 내고 참여하는 시민참여형 공원이다"고 말했다. 서울숲은 지난 2016년 11월부터 비영리 민간단체 '서울숲컨서번시'가 서울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해오고 있다. 시가 공공 공원 운영을 민간위탁한 건 서울숲이 처음이다. 당시 공원 관리 경험이 없는 민간단체에 서울숲을 맡길 수 없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서울시는 공원에 대한 다양한 시민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원 관리 모델이 필요하다며 민간위탁을 추진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원 민간운영을 통해 인건비 등을 포함해 연간 50억에 달했던 운영비가 3~4억 정도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연간 오천 명이던 자원봉사자는 만 명으로 늘었다"며 "민간 위탁 이후 시민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공원 운영에 참여할 기회가 많아졌다"고 강조했다. 시 관계자는 "'서울숲 반상회'를 통해 정기적으로 주민들을 모아 관련 전문가들과 서울숲 관리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고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많이 수렴해 공원 이용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나비 정원부터 바닥분수까지··· 아이들의 천국 어린이정원이 있는 문화예술공원에서 한강이 있는 남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체험학습원이 나온다. 체험학습원에는 나비 정원과 곤충식물원이 있다. 나비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흰 나비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정원에서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크게 뜨고 나비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강서구 화곡동에서 온 김원주(42) 씨는 "산에 가도 보기 힘든 나비를 잔뜩 볼 수 있어 좋다"며 "오늘은 친구들이랑 왔는데 다음에 가족들이랑 꼭 한 번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이 넓은 공간에 관리자가 한 명도 없는 건 이해가 잘 안 간다"며 "바닥에 죽은 나비들이랑 곤충식물원에 폐사한 곤충들은 왜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 거냐"며 의아해했다. 실제 이날 곤충식물원에 있는 아크릴 사육장 안에서 길앞잡이, 흰점박이꽃무지 등의 곤충들이 죽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숲컨서번시 관계자는 "곤충식물원 관리 인원 2~3명이 식물부터 모든 관리를 다 맡아 해 곤충이 죽어 있는 걸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며 "식물원이 곤충이 살기 적합한 상황이 아니어서 손이 많이 탄다. 수시로 관리하고 있지만 곤충들이 잘 죽는다"고 해명했다. 시곗바늘이 오후 2시를 가리키자 서울숲 광장에 어린이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들이 서 있는 체스판처럼 생긴 바닥에서 3m 높이의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왔다. 바닥분수 위에 발바닥을 올려놓은 한 꼬마는 구멍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꺄르르"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족들과 서울숲을 찾은 이지은(35) 씨는 "애들이 너무 재밌어해서 집에 안 간다고 할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라며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니 오늘 여기 오길 참 잘한 것 같다"며 빙긋 미소지었다. 이 씨는 "물놀이 이용객들이 정말 많은데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사람들과 부딪혀 다칠까 봐 걱정된다"면서 "바닥분수 근처에 안전요원이 없어 불안하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날 오후 서울숲에서는 조각 정원 뒤 잔디밭에서 물을 주는 서너명 외에는 현장 관리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서울숲은 13만 평(43만㎡), 축구장 60개 크기의 대규모 공원이다. 주말 평균 약 2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관광 명소지만, 운영직 29명을 포함해 약 70여 명의 현장 근무자만이 공원을 관리하고 있다.

2018-06-26 11:29:07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⑱ 통일 염원 담긴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 '경교장'

"탕, 탕, 탕, 탕"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0분, 백범 김구 선생의 사저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주한미군방첩대(CIC) 요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향년 74세였다. 대한민국 헌법은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가 정한 국호, 국기, 국체, 국가를 이어받았다.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환국 이후 첫 국무위원회가 개최된 역사적인 장소다. 하지만 김구 선생 서거 후, 이곳은 외국 대사관과 병원 시설 등으로 사용되면서 제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후 시민사회에서 경교장을 문화재로 지정·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서울시는 2013년 약 3년여간의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마치고 경교장을 시민에게 개방했다. ◆70년 전에 멈춘 시계…백범 김구 선생의 숨결 지난달 27일 경교장을 찾아 민족 자주통일을 위해 애쓴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의 응급실 옆에 위치한 경교장은 아치형 창문 5개가 인상적인 2층짜리 건물이다. 가장 먼저 입구 왼쪽에 있는 계단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임시 정부 당시 보일러실, 식당, 방이 있었던 자리에는 경교장의 역사,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을 주제로 한 3개의 전시실이 들어서 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전시물은 백범 김구 선생의 혈의였다.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고 있었던 하얀색 저고리의 목덜미와 겨드랑이 부분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파주시 금촌동에서 온 김수민(13) 양은 "저 옷은 지금 봐도 마음이 아프고 서럽다"면서 "그 당시 사람들은 김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더 슬펐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속옷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속옷 밀서라 불리는 전시물은 1948년 정부수립 직전 북한 내에 민족진영 비밀조직원들이 김구 선생에게 북한 정세를 보고하고, 남북 통일정부수립을 탄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경교장을 찾은 정혜연(21) 씨는 "속옷 밀서에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독립국을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면서 "나라를 위한 이분들의 노력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소유권 병원에…100% 복원 어려워 경교장 1층에는 국무위원회가 개최된 응접실이 있다.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했다. 응접실에서 복도로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귀빈식당이 나온다. 식당 안에는 양 끝에 1명, 가운데 7명씩 총 16명이 앉을 수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기다란 식탁이 놓여 있다. 임시정부의 공식 만찬이 열렸던 식당은 김구 선생 서거 당시 빈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층 더 위로 올라가면 김구 선생의 집무실과 침실, 서재 등을 볼 수 있다. 일식 다다미방으로 꾸며진 임시정부 요인 숙소는 그 당시 사진자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집무실 책상 뒤 창문에는 서거 당시 총탄 자국도 재현돼 있다. 송현성(43) 씨는 "경교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여기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딸애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밖에 경교장이라고 쓰여 있어 들어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람들이 김구 선생은 알고 있지만, 경교장은 잘 모르는 것 같다"며 "홍보가 잘 돼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서울 역사박물관 관계자는 "경교장에는 하루에 200명 정도가 방문한다"며 "지하철 광고 등을 검토하고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홍보에 어려움이 있다"고 고백했다. 한편, 아직 복원이 이뤄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는 시민도 있었다. 자녀와 함께 경교장을 찾은 김영민(41) 씨는 "남북 정상회담도 있고 해서 아이에게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방문했다"면서 "김구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 때 북행을 위해 사용한 지하 1층 보일러실 북측 문도 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서울 광진구에서 온 박모(55) 씨는 "외부는 복원이 전혀 안 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박 씨는 "건물 뒤쪽은 병원 응급실과 붙어있고, 정원이 있었다던 앞마당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교장은 건축 당시 전체 면적이 5267.44㎡에 달하는 넓은 공간이었지만, 현재 규모는 대지 396㎡에 건물 총면적 945㎡ 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 역사박물관 관계자는 "경교장 소유권이 삼성병원 쪽에 있고, 이미 병원 건물이 상당 부분 들어서 있어 100% 완벽한 복원은 어렵다"고 설명했다.

2018-06-06 12:00:37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⑰ 궁 안에 숨겨진 비밀의 화원··· 창경궁 대온실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하게 동향으로 배치된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에서 오른쪽 샛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궁에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얀색 철골로 둘러싸인 유리 온실은 1909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창경궁 대온실은 2013년 문화재청이 실시한 '국가지정 문화재 특별 종합점검'에서 목재 부식 등 안전상의 문제가 발견돼 1년 3개월간의 보수공사를 마치고 지난해 11월 다시 문을 열었다. ◆꽝꽝나무부터 팔손이나무까지 "엄마, 이 나무는 이름이 꽝꽝이래요." 지난 20일 창경궁 식물원에서 만난 한 꼬마가 나무 앞에 있는 이름표를 확인하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꽝꽝나무 옆에는 사람 손바닥처럼 생긴 이파리가 무성한 팔손이나무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초등학교(옛 국민학교) 동창들과 식물원을 찾은 박월선(75) 씨는 "나무랑 꽃을 좋아해 평소 식물원에 자주 오는데 이런 천연기념물들은 볼 기회가 좀처럼 없다"면서 "친구들과 산책도 하고 희귀한 식물도 보고 일석이조"라며 즐거워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2000년 이후부터는 국내 자생식물 위주로 전시해오고 있다"며 "천연기념물 후계목(모수에서 직접 채취해 키운 나무)을 전시해 창경궁 식물원만의 특색을 살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천연기념물 옆에는 상어의 날카로운 이빨처럼 생긴 파리지옥과 부부젤라 모양의 네펜데스가 있었다. 식충식물 네펜데스 안에 갇힌 개미를 본 아이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식충식물 구역에서 스무 발자국 정도 전진하면 양치식물 구역이 나타난다. 비늘고사리, 좀쇠고사리, 주저리고사리, 들토끼고사리 등이 심어져 있다. 잎이 길게 늘어져 있어서인지 애·어른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고사리를 만지고 잡아당겼다. 고사리뿐만 아니라 온실 내 많은 식물들이 매너 없는 관람객들로 인해 수모를 겪고 있었다. 식물원 곳곳에 '만지지 마세요. 눈으로만 보세요'라는 푯말이 붙어있었지만, 사람들은 경고문을 무시하고 식물들을 괴롭혀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관리소에서 자주 순찰을 다니면서 관람객들에게 '만지지 말아 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는데, 일부 관람객 중 '사람들 많은 데서 면박을 준다'며 기분 나빠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어려움이 있다"며 "다른 분들도 배려해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코끼리랑 벚나무는 어디 갔나요?" 이날 식물원을 찾은 관람객 중에는 반세기 전 창경원의 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있었다. 성북구 정릉동에서 세 자매와 함께 궁을 찾았다는 조월자(73) 씨는 "지금은 여의도에서 벚꽃놀이를 하지만, 내가 20대 초반일 때는 사람들이 창경원으로 벚꽃놀이를 왔다"면서 "동생들은 여기로 소풍하러 와 동물원에서 코끼리도 보고, 식물원 구경도 하고 그랬다"며 추억을 회상했다. 조 씨와는 정반대로 창경궁 온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노원구 월계동에 사는 박모(72) 씨는 "일제의 잔재는 싸그리 다 없애야 한다"며 "일본이 만든 식물원이 왜 아직도 창경궁에 남아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혀를 끌끌 찼다. 이에 문화재청 관계자는 "일제의 잔재를 전부 없애는 게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게 될 수 있다"며 "그 시대에 지어졌다고 해서 다 없애기보다는 역사적 의의나 배경,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문화유산을 존치할 것인지 폐쇄할 것인지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창경궁 대온실은 1907년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 후쿠바 하야토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해 1909년 건립됐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을 창덕궁에 가둬놓고는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었다. 일제는 한일합병조약 체결 후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왕이 살던 궁궐은 벚꽃놀이, 불꽃놀이가 열리는 유원지로 전락했다. 창경궁은 광복 40여 년이 지나서야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83년 창경궁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서 궁 안에 있던 위락시설인 동물원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했고, 벚나무들은 여의도 윤중로로 옮겨 심어졌다. 창경궁 내 일제가 지은 건물을 모두 철거됐지만, 대온실은 대한제국 말기에 들어온 서양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유산으로 인정받아 2004년 2월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아 보존됐다. 강북구 번동에서 온 채명국(58) 씨는 "아픈 역사지만 이렇게 건축물로 남겨 놓고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며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식물원 입구에 창경원 식물원의 가슴 아픈 역사 등을 적어 놓은 안내문이 없다는 거다"고 말했다. 채 씨는 "사람들이 식물원을 둘러 보면서 창경궁에 유폐된 순종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더 좋은 역사 교육의 장이 될 것 같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종종 어르신들이 와서 과거 소풍 왔을 때 기억을 더듬어 '코끼리는 어디 갔냐?'고 물어보시곤 하는데, 그럴 때는 자료를 찾아서 따로 알려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이어 "창경궁 온실 앞에 건물 보수 이력을 전부 기술한 안내문을 따로 설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며 "관련 사항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18-05-22 13:28:24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⑯ 키워드 '야생'··· 도롱뇽, 버들치 기다리는 '이촌한강생태공원'

등대처럼 생긴 전망대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한강대교 북단 철교 밑에는 초록빛 물결이 넘실거리는 이촌한강생태공원이 있다. 서울시는 생태적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 자연형 호안과 소생물 서식처를 복원하는 자연성 회복 사업을 진행해 지난해 12월 이촌한강생태공원의 문을 열었다. 이촌한강생태공원은 한강대교와 원효대교 사이 약 1.3km 구간에 9만7100㎡ 규모로 만들어졌다. 공원에는 생태 복원을 위한 자연형 호안, 천변 습지, 논 습지와 시민들을 위한 자전거도로, 산책로, 생태놀이터 등이 조성됐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꿈꾸다 "우와~ 소금쟁이가 두 마리나 있네?" 지난 13일 이촌한강생태공원을 찾은 어린이들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돌아다니는 소금쟁이의 가느다란 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용산구 청파동에서 온 조영균(36) 씨는 "아이들이 도시에서 자라서 습지는커녕 논조차 볼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가까운 곳에 생태공원이 생겨서 기쁘다"며 밝게 웃었다. 이촌한강생태공원 습지에는 경남 창녕군에서 기증받아 심은 우포늪 습지식물 6종이 식재되어 있다. 조 씨는 "안내푯말을 보면 창포, 부들, 매자기, 송이고랭이 등 4600본의 습지 식물을 심어놨다고 나왔는데 아직 다 자란 것 같지도 않고 별로 많아 보이지도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생태공원은 일반 근린공원처럼 처음부터 아름답게 완성된 식물을 빽빽하게 심어놓는 게 아닌 습지 식물이 살만한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 자연성을 회복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생태공원을 찾은 공무원 시험 준비생 이석영(29) 씨는 "정자에 앉아 버드나무 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보니 스트레스가 좀 풀린다"며 미소 지었다. 이 씨는 "그런데 공원을 조성만 해놓고 관리는 제대로 안 한 것 같다"며 "오면서 봤는데, 습지는 물이 다 말라 있고, 전망대 뒤쪽은 예초 작업을 안 해 놔서 풀들이 지저분하게 자라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습지는 상태에 따라 양수기로 물을 채워 넣는데 전날 비가 와서 기계를 꺼놓은 것 같다"며 "확인 후 시정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전망대 뒤편에 심은 쇠무릎은 최대 1m까지 자라는 식물"이라며 "야생 경관 조성을 위해 따로 예초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자전거가 '쌩쌩'··· 실종된 시민의식 이촌생태공원에는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훼방꾼들이 존재했다. 도로 위의 무법자 '자전거족'이다. 용산구 보광동에서 온 박윤성(24) 씨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쌩쌩 달려 부딪힐 뻔했다"면서 "심지어는 자전거 도로가 아닌 보행로로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서울시 관계자는 "현재 한강 자전거길 제한속도인 시속 20km를 10km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생태공원 강변 쪽과 도로 쪽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각각 따로 만들어져 있음에도 일부 자전거족들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생태 복원을 위해 조성된 이촌한강공원에서 낚시를 하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한강생태공원은 낚시 제한구역으로 제한사항을 준수한 경우에만 낚시를 할 수 있다. 제한사항에는 '낚싯대를 4대 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나와 있지만, 대부분이 4대 이상의 낚시대를 사용해 어류를 포획하고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원 내 청원 경찰이 24시간 근무하며 계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위반사항을 다 잡아내기 어렵다"면서 "가장 중요한 건 시민의식이다"고 강조했다. 강남구 삼성동에서 한강공원을 찾은 이윤희(64) 씨는 "강변에 앉아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한강에서 하수구 냄새가 심하게 나서 자리를 털고 나왔다"며 "사람들이 마시고 사용하는 물인데 수질 관리를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한강 물을 유람선 운항 등의 이유로 호수처럼 가둬놔 물이 흐르지 않아 나는 냄새"라며 "신곡수중보를 철거해야 한강을 옛 하천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8-05-15 11:03:23 김현정 기자
기사사진
[되살아난 서울] ⑮ 서울 도심 한복판 무릉도원, '양녕대군 이제 묘역'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2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10여 분을 걸어 내려오면 '양명문(讓名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한옥이 나온다. 한옥 대문을 열면 세종대왕의 큰형 양녕대군의 묘와 사당이 있는 '양녕대군 이제 묘역'을 만날 수 있다. 숙종 대왕은 1675년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이 아우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사양한 덕망을 기리기 위해 사당(지덕사)을 세웠다. 원래 남대문 밖 도저동에 있던 사당은 1912년 묘역이 있는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서울시와 동작구는 지난 4월 27일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출입을 제한해왔던 양녕대군 이제 묘역을 시민들을 위한 문화·휴식 공간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18년 만에 전면 개방했다. 지난 4일 찾은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산새 지저귀는 소리와 연못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평화로운 무릉도원이었다. ◆마을의 문화유산··· 주민 쉼터로 양녕대군 이제 묘역은 동작구 상도동에 1만5281㎡ 규모로 조성됐다. '명예를 사양한다'는 뜻을 가진 양명문 안으로 들어가면 세 갈래로 나뉜 돌길이 보인다. 왼쪽으로 가면 정원이, 가운데로 올라가면 양녕대군 묘역이, 오른쪽으로 가면 사당이 나온다. 왼쪽 돌길을 따라 올라가면 눈앞에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정원에는 5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에는 묘역 성역화 약사, 양녕대군이 지은 한시, 대군이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 등이 새겨져 있었다. 상도동 주민인 장영자(62) 씨는 "당대 명필가답게 서체에서 강한 힘이 느껴진다"며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 씨는 "동네에 숨겨져 있던 문화유산을 영영 못 보고 지나칠뻔 했다"면서 "이제라도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며 밝게 웃었다. 동작구 상도4동에 사는 한명순(74) 씨는 "묘역을 주민 쉼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게 정말 마음에 든다"며 "동네에 마땅히 산책할만한 곳이 없어 아쉬웠는데 이런 작은 공원이 생겨 너무 좋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동작구 관계자는 "이 지역에 주민들이 이용할 만한 공원 부지가 부족해 양녕대군 이제 묘역을 개방하게 되었다"면서 "문화행사를 진행해 주민들을 위한 휴식·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묘역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를 합장한 묘소가 있다. 묘소 앞에는 장명등과 묘비, 좌우로 2기씩 총 4기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었다. 장명등은 묘 앞에 불을 밝히는 등으로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사찰과 왕릉 앞에 세워 두는 석물이다. 능을 지키는 수호물 문인석은 묘소 앞에서 내시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왕을 경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분당구 구미동에서 온 이효수(83) 씨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묘소에 와서 조상님을 직접 찾아뵙게 되어 기쁘다. 조선 왕조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일반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는 지역 명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당도 재실도 출입금지··· "전면 개방 맞나요?" 묘소를 등지고 왼쪽으로 가면 지덕사라는 사당이 나온다. '지덕'이란 인격이 덕의 극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양녕이 동생 세자에게 자리를 양보한 행적이 고대 중국 주나라의 태백과 같다는 의미에서 세조가 친히 명명했다. 사당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와 후적벽부 팔폭병풍 초서체 목각판, 숭례문 현판 탁본, 지덕사기 등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지만,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돼 들어갈 수 없었다. 이날 사당 앞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한 관람객이 "여기는 뭔데 못 들어가게 막아놓은 것이냐"고 따져 묻자 지덕사 관리자는 "거기는 아직 개방이 안 되어 있는 곳이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지덕사 사당 내에 있는 서고와 창고인 제기고 뿐만 아니라 사당 오른쪽에 있는 재실(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 도광재 역시 출입이 금지돼 들어갈 수 없었다. 중랑구 신내동에서 온 김관섭(81)씨는 "죽기 전에 사당 안에 있는 지덕사기를 두 눈으로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들어갈 수 없게 해놨다"며 아쉬워했다. 김씨는 "역사 교육을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다 개방을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서울시 관계자는 "사당은 제사 때 이용되는 곳이라 개방하지 않았다"면서 "동작구에서 지덕사 측과 협의 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강동구 상일동에서 온 서창식(65)씨는 "입구 앞 표지석에 양녕대군 부인을 '광주 김씨'라고 잘못 적어놓았다"며 "학생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도록 안내문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

2018-05-08 11:01:13 김현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