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본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 되었지만, 한때 일본의 신문과 TV 등 언론에도 자주 등장하며 사회적 문제로 관심이 집중되었던 단어가 있다. 바로 '초식남자(草食男子)', 줄여서 '초식남'이다. 이 표현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이며, 2000년대 후반에 일본의 공영 방송인 NHK와 주요 신문사인 아사히신문 등에서 집중해서 다루면서 사회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확산하였다. 이 신조어는 매우 직관적으로 '초식동물과 같은 남성'을 의미한다. 초식동물의 이미지는 순하고 착하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초식남은 단순하게 착한 남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와 경쟁, 소비 등에 적극적이지 않은 남성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 단어가 등장한 배경에는 일본 사회의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1970년대에 이미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때 일본 정부가 집중적으로 육성한 산업은 자동차, 조선, 철강 등과 같이 남성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한 중화학 공업과 제조업이었다. 이에 남성들은 장시간 외부에서 경제 활동을 하고 여성들은 가정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가정 내 분업 구조가 고착되었다. 따라서 당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기대치는 분명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일본 경제에 버블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초반부터 버블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본 경제는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을 반복하여 침체기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의 사회 구조가 변하였고 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도 달라지는 과정의 상징적인 표현이 바로 초식남이다.
일본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과거 일본의 기업 문화는 서구와는 달리 종신고용제와 연공서열제로 설명할 수 있다. 기업은 애초에 모든 직원은 정규적으로 고용하였고 직원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정년퇴직까지 근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입사 초기에는 낮은 임금을 받았지만 근속 연수에 따라 승진하고 임금도 상승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직원들은 높은 충성심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버블이 붕괴된 이후에는 이러한 안정적인 일자리가 많이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산업구조 변화도 초식남의 등장에 한몫했다. 정보 통신 발달과 공장 자동화로 인해 남성 근로자의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사회와 경제 구조가 달라졌는데 남성에게 기대되는 전통적인 역할은 변하지 않으니 이 모순 속에서 초식남이 등장한 것이다.
초식남이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무엇보다 연애와 결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소비활동에도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빠르게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연애와 결혼을 하지 않는 남성이 늘어나는 것은 사회적으로 환영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소비를 줄이면 내수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는 초식남이란 단어가 과거만큼 사용되지 않는다. 제2차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으로 인한 노동 시장의 세대교체로 인해 청년들의 취업이 다시 활발해지며 위기감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연애와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확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일본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일본의 '초식남'은 최근 우리 사회에도 던져진 질문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
Copyright ⓒ Metro. All rights reserved. (주)메트로미디어의 모든 기사 또는 컨텐츠에 대한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를 금합니다.
주식회사 메트로미디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7길 18 ㅣ Tel : 02. 721. 9800 / Fax : 02. 730. 2882
문의메일 : webmaster@metroseoul.co.kr ㅣ 대표이사 · 발행인 · 편집인 : 이장규 ㅣ 신문사업 등록번호 : 서울, 가00206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2546 ㅣ 등록일 : 2013년 3월 20일 ㅣ 제호 : 메트로신문
사업자등록번호 : 242-88-00131 ISSN : 2635-9219 ㅣ 청소년 보호책임자 및 고충처리인 : 안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