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라는 단어는 입 안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다. 무겁고, 날카롭고, 혀끝에 닿는 순간 공기가 탁해진다. 사람들은 그 단어를 길게 붙잡지 않으며 부드러운 말로 바꾸거나 다른 비유로 표현한다. 마치 그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무언가가 일어날 것처럼. 그러나 임상 장면에서 자살은 항상 어디에나 숨어 있다.
문학 속에서 자살은 오래된 주제다. 일본 소설은 아마 이 주제를 유난히 매혹적으로 다루는 작품들로 가득한 듯 하다. 감정과 공허, 차가움과 푸름.
일본의 대표적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다는 깊고 어둡다. 거기에는 밤 바다에 비가 내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파도와 젖은 공기, 몸을 잠식하는 차가운 습기. 비슷한 이름의 일본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무라카미 류의 블루는 투명하다. 빛은 있지만 온도는 없다. 얕은 듯 보이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끝이 빨려 들어 간다. 바다 속인지, 우주 속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스무 살 무렵에 읽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책장을 덮었을 때 바닥이 없는 바다에 빠진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바다의 블루는 투명하지만 그 맑음은 숨을 주지 않았다. 아무 색도 없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블루였고 아주 짙은, 그러나 빛을 삼키는 블루였다. 그 속에서 모든 것들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인물들은 느림 속에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가라앉는 속도가 숨어 있었다.
상담 장면에서 어떤 내담자들은 하루키의 우울을 닮았다. 방향을 잃고 바다 한가운데서 헤엄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저 움직인다. 그 움직임에는 희미하게나마 움직임이 있고 어디로간에 대한 작은 열감이 있다. 잡을 수 있는 온기, 조금만 당기면 손에 잡힐 것 같은 거리감이다.
그러나 어떤 내담자들은 무라카미 류의 작품과 같은 우울을 닮았다. 그들은 현실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다. 빛을 본다. 그러나 그 빛은 코발트 빛이며 메마르고, 건조하고, 차갑다. 주변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에도 눈을 깜빡이지 않고 초점이 있는 눈이지만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그들의 공기는 가볍고 얇고, 일수 없는 침묵은 깊다. 류의 블루는 무감각에 가깝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지만 그 무온도의 감각은 오히려 뼛속을 은은하게 시리게 한다.
내담자는 가만히 앉아 있지만, 그 조용함이 방 안을 비운다. 상담가는 그 공기 속에서 서서히 공허의 무중력으로 빨려들어간다. 가벼운 내용의 말이지만 밑으로 가라앉는다. 손짓도, 숨소리도. 상담실의 시계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만, 시간은 방향을 잃어버린다.
그들의 블루는 한없이 투명하다. 색이 없어서, 그래서 더 파랗다. 공허와 허무가 빈틈 없이 방을 채운다. 상담가의 구조하려는 마음은 거대한 우주의 어둠 앞에서 슬로우 모션이 되고 돌아갈 모선이 없는 우주 공간의 우주인이 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부유한다. 이유 없이, 목적 없이. 그 무기력 속에서 상담가는 자기 안에 숨어 있던 또 다른 블루를 마주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보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블루를.
무라카미 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종종 느리게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기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어떤 장면은 웃음을 닮았지만, 그 안에는 공허가 있다. 상담실에서도 비슷한 웃음을 본다. 그 웃음은 감정을 배제한 미소이고 온기가 없다.
어떤 날은 상담이 끝난 후에도 그 투명한 블루가 남는다. 일상으로 돌아와도 그 블루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옮겨온 색이 아니라, 원래 내 안에도 있던 블루처럼 느껴진다. 단지, 그 내담자가 그것을 드러나게 만든 것과 같다. 그 투명하고 깊은 블루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무취의 향기 같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기 감정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은 짧고, 건조하고 예의바르고 지적이다. 그러나 그 건조함 속에, 상담가는 푸른 심연을 본다. 그 블루는 울지도, 소리치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 감당 못할 깊은 우울같은 게 자신의 살에 있다고 손으로만 가르킨다.
상담가는 거대한 투명한 블루를 바라보는 이상의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상담가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어떤 누군가가 내담자 당신의 그 투명한 블루를 당신 혼자만이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진성오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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