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에서는 사실이 아닌 내용을 사실로 믿는, 그릇된 믿음을 '망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릇된 믿음이라고 해서 모두 망상은 아니다. 우리가 연예인에 관한 헛소문을 믿는 것은 망상이라고 할 수 없다. 정신의학에서는 첫째 불합리하고 잘못된 생각이어야 하고, 둘째 논리적인 설명으로 설득이 되지 않으며, 셋째 환자가 무조건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망상이라고 부른다. 망상에는 특이한 심리적 기전이 있다. '마음의 고통이 너무 심하면, 망상으로 이를 메우려고 한다.'는 것이 그 기전이다. 예를 들어 '과대망상' 이라는 것이 있다. 과대망상 환자는 '나는 위대한 사람이다. 나는 신이다. 나는 엄청남 부자다.' 라는 주장들을 한다. 그러나 과대망상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지독한 열등감이나 패배감을 가진 경우가 많다. 내가 못난 사람이라는 열등감과 패배의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런 고통에 짓눌리다 보면, 완전히 나 자신이 망가져버릴 것 같다. 이럴 때 환자는 마음 속 '망상의 세계'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망상 속에서 살면, 더 이상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고통 받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말하면, 강하게 반발한다. 자신의 망상이 깨지면, 자신은 다시 열등감과 패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나를 미행하고 도청한다.'는 등의 '피해망상'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패배감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에서 도피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 은평구의 아파트 단지에서 40대 가장이 일본도에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견이 발생했다. 그런데 가해자 백모씨가 밝힌 살해동기가 기가 막힌다. '피해자 A씨가 현 정권에서 보낸 스파이여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는 김건희여사와 중국스파이를 처단하기 위해서 이일을 했다.'고 말하며, 자신은 심신미약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하는 부분은 '망상'일 것이다. 피해자 A씨가 진짜로 중국 스파이일까? 중국 스파이가 미행을 해야 할 만큼 백씨가 중요한 사람일까? 그리고 김건희 여사가 중국 스파이와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을까? 정신감정을 해 보아야 알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건은 백씨의 망상이 불러온 비극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망상은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도피처이다. 누구나 자신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금씩은 망상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망상이 과도하면, 또 망상의 세계에서 누군가를 증오하면, 결론은 비극이 된다. 어쩌면 역사속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도,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전쟁도, 모두 망상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형체도 없지만,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가해자 백씨는 유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유가족들은 어떤 마음일까?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두 아들의 아버지가 형체도 없는 망상의 희생물이 되어 버린 지금, 무슨 말로 유가족을 위로할 수 있을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이 슬픔을 딛고 꿋꿋이 일어서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김준형 / 칼럼니스트(우리마음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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