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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일반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일생 '오뚝이 정치인·영원한 2인자'



김종필(金鍾必)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김 전 총리는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하면서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군림하며 당시 정치·경제적 구상을 함께했다.

◆오뚝이 정치인

김 전 총리는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다. 하지만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난 데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신군부에 의해 부패정치인으로 낙인 찍혀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채 야인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김 전 총리는 다시 오뚝이같이 일어났다. 1986년 미국에서 귀국한 그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해 당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다음으로 4위라는 성적을 거뒀다.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한 성적이었다.

이에 바로 다음해 치러진 총선에서 신민주공화당은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 원내교섭단체를 꾸렸다. 이후 그는 1990년 1월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공화계 대표로 최고위원직을 맡았다.

◆만년 '2인자'

1992년 김 전 총리는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해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또 다시 최고정권의 2인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을 그를 2인자로 놔두지 않았다.

당시 김영상 대통령이 3당 합당의 약속을 저버리고, 당 대표의 권한을 뺏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여기서 그의 오뚝이 정신이 다시 발휘됐다. 그가 이끄는 자민련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총 50석을 얻으며 다시 정치 중앙에 등장했다.

이후 김 전 총리는 또 다시 2인자를 자청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원하면서다.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탄생이다. 김 전 총리의 선택은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켰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 후 그는 공동정권의 2인자로 총리직을 역임했다. 민자당 정권에 이어 또 다시 집권여당의 실권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2000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나 자민련 총재로 복당한 그는 같은 해 실시된 제16대 총선에서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와도 내각제 개헌, 16대 총선 과정에서 쌓인 공동정권 수장 사이의 갈등,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을 계기로 결별했다. 그가 평생의 과제로 여겨져 온 '내각제'는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번번이 휴지조각이 된 셈이다.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쿠데타 원조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등 그에 따라붙는 여러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영욕과 부침을 거듭해왔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우리 정치권을 풍미해 온 '3김 시대'는 실질적 종언을 고하게 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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