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네 공방 상표가 새겨진 공예품. 그 뒤로 만경제재소에 쌓인 소나무가 보인다./이범종 기자
목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찾아온 손님에게 드립커피를 건넨다. 소나무 수십톤이 쌓인 제재소 한켠에는 공방이 있고, 시끌벅적 사람 냄새도 난다. 직업도 사연도 제각각, 머무는 시간도 한 시간 아니면 새벽 3시다. 이렇게 사귄 지인만 1000여명. 이따금 찾아와 나무를 만지며 논다. 이곳 대표인 유성기(53) 목수는 제재소 내 공방을 '공간'으로 고쳐 불렀다. 어른들의 놀이터이자 소통의 공간, 경북 김제시 '유씨네 공방'을 지난 6일 찾았다.
유성기 목수가 6일 유씨네 공방에서 드라마 '리턴'에 나온 책상을 만들고 있다./이범종 기자
◆나무 파는 사업가에서 교감하는 목수로
2대째 제재소를 운영하는 유 목수는 한때 나무만 파는 사업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60여년 전 김제에 제재소를 차리고 6남매를 키워내셨다. 지역 정치인으로 신망이 두터웠던 아버지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때 사고로 돌아가셨다. 유 목수의 나이 29살이었다. 그는 이후 11년 동안 제재소만 운영했다.
800평 짜리 제재소에 공방이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문화충격'이었다. 불혹이 된 2004년 봄, 유 목수는 나무를 사러 온 치과의사가 집에서 병원 의자와 책상을 만드는 모습에 매료됐다. "제재소에서 못 보던 공구들이 생소하고, 그 분이 일 하시는 모습도 재밌어 보였지요. 아무리 오래됐어도, 물려받은 저 테이블만은 치울 수가 없네요."
이후 1970년대를 다룬 드라마 '자이언트' 촬영 장소로 유명해진 제재소는 지금도 변치않는 흡인력을 자랑한다. 작업 공간에 목마른 예술가와, 나무가 주는 감성에 젖고픈 이들이 교감하는 구심점이어서다. "사람들은 제가 하는 일을 주의 깊게 보면서 즐거워해요. 그 시선을 저도 의식하지요. 결국 나중에는 뭔가를 함께 만들게 됩니다."
드라마 '자이언트'의 배경으로 유명한 만경제재소. 이곳에서 만들어진 재료는 오른편에 이어진 공방에서 각종 목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난다./이범종 기자
하루에 적게는 10명, 많으면 50명이 유씨네 공방을 찾는다. 그 중에는 유명 배우와 아이돌도 있다.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식사에 초대한다. "그럼 혼자 오나요. 친구가 오죠. 누구겠어요. 예술가입니다."
작은 베풂이 이어지면서, 이곳은 어른들의 놀이터이자 유 목수의 배움터가 됐다. "어떤 분이 '나는 조각가인데 여기서 작업해도 되겠습니까' 합니다. 저는 예술가에게 '노(No)'를 안해요. 그 분들이 오시면 다양한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차 한 잔, 밥 한 끼가 아주 적은 수업료예요. 대신 저는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얻잖아요. 밖에 나가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 이 안에서 배우는 것이죠."
이날 공방에는 수도권에서 온 예술가와 프로듀서, 공무원이 모여 나무판에 탄소섬유 그림을 덧대고 있었다. 다음날 제재소 마당에서 열린 번개장터 전시를 위해서다. 서울에선 전시 공간에 엄격한 작가들도, 이곳에선 자기 작품을 맘껏 풀어놓는다. 사람이 좋아서다. "저는 회원이라는 표현을 안 해요. '우리 뭔가를 만듭시다' 하면, 찾아온 분들과 함께 작품 만들기를 즐기는 것이죠." 이렇게 다시 식사와 대화가 이어진다. 정이 쌓인다.
"여기 유씨를 상징하는 한글 표기를 보면, 어떤 수의사가 '동물'이라고 해요. 성악가인 아내는 음표가 보인다고 하고요. 어떤 시인은 여기에 자연이 들어있대. 산이 있고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뜨니까."몇 해를 고민해도 만들지 못한 유씨네 공방의 상표는 공방을 찾은 큐레이터가 일주일만에 만들어줬다고 한다./이범종 기자
◆함께 행복해지는 '진짜 재능기부'
한때 자신의 욕심으로 슬픔을 배운 그는, 베푸는 삶을 통해 얻는 점이 많아졌다고 한다. "인생은 사람을 통해서 희노애락을 느끼잖아요. 누군가로부터 어떤 이익을 얻을까 생각하지 말고, 저 사람에게 무엇을 베풀까 생각하면 외려 큰 것이 옵니다."
그런 탓인지 유 목수는 재료비 외에 수업료를 받지 않는다. 평소 떠오른 아이디어를 나눠주느라 본인 작품도 얼마 없다고 했다. 최근 유명해진 그의 작품은 드라마 '리턴'에서 주인공 최자혜(고현정·박진희)가 사용한 책상이다. "아이디어를 얻고 다시 찾아온 열 사람이 '전에 작품 주셨는데 저도 이렇게 만들어봤습니다' 하니, 열 개의 다른 작품을 볼 수 있는겁니다. 처음 생각한 아이디어의 결과물을 타인의 지식을 통해 얻게 된 셈이죠."
다양한 사람이 모여드는 공방답게, 이곳의 상표 역시 직업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하나의 'ㅇ'과 두 개의 'ㅅ'을 두고 수의사는 동물을, 음악가는 음표를, 시인은 산과 달이 있는 자연의 모습을 말한다. 그가 김제에 만들고픈 '감성 공화국'에 어울리는 국기다.
"사람들이요, 우리집에 들어오면 표정이 밝아져요. 제재소만 할 때는 무표정하게 거래하는 사람들만 봤는데, 목공소를 하니까 웃으면서 들어와요. 아, 아버지께서 이렇게 살으라고 여길 남겨주셨구나."
나이 마흔에 '천년을 살고 만년을 이어가는' 나무의 매력에 빠진 유 목수는, 학생들이 견학 오고 나서야 제재소를 알게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제재기 톱날이 굉음을 내며 판자 만드는 모습에 아이들이 박수를 칩니다. 두 손 가득 톱밥을 모아 냄새 맡으면서 나무를 이해하게 되죠. 선진국에는 기본적으로 목공수업이 있거든요."
유 목수의 목표는 목공학교 설립이다. 공방을 찾는 건축·조경·회계·설계사 등의 도움을 받아 지방정부에 예산을 신청했다. 그는 유럽인들이 한국의 목공 문화를 배우러 워킹 홀리데이를 하러 오는 모습을 상상한다.
왁자지껄하던 저녁이 끝나고 마지막 술잔을 기울인 새벽. 유 목수는 동화책의 결말을 읽듯 이야기했다. "이곳을 '정서를 가르치는 교육장'으로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