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상께서 내 아들을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나는 괜찮습니다."
삼국지의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한 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정도로 유비의 아들 유선은 황제로서 평균 이하였다. 당연히 삼국시대를 열고 촉나라를 창업한 유비와 아버지라는 이유로, 자꾸 비교했으니 어쩌면 유선에게는 태생적 트라우마이자 불공정 게임인 셈이다.
조조의 후계자 조비 역시 마찬가지다.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유선과 마찬가지로 조비 역시 삼국 중 가장 강력한 위나라를 조조에게 물려받았지만, 그의 재위 시절부터 위나라는 패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4대를 못가 사마 씨에게 천하를 내준다.
꼭 역사만의 얘기는 아니다. 적잖은 기업들이 순혈주의와 지연·학연에 얽매이다가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DGB금융지주 미래가 이들과 닮은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든다.
박인규(전 DGB금융 회장) 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미래를 그려 나갈 인물(신임 회장)이 능력보다 편협한 지역주의와 학연·인맥으로 결정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 뒤에는 '경북고'라는 인맥이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김태오 차기 회장…'경북고 인맥'
국가나 기업은 뛰어난 리더가 나타날 때 한 단계 성숙한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때, GE는 잭 웰치의 22년간 재임 때, 영국은 벤저민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이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만들었다. 미국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의 리더십은 150여 년간 지지 않은 해다.
DGB금융지주 차기 회장에 대해 시장과 지주 안팎에서는 '링컨형 리더십'을 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나타났다. 이경섭 전 농협은행장이 탈락하고, 김태오 전 하나HSBC생명 사장이 최종 후보에 올랐다.
DGB금융지주와 금융권 안팎에서는 새 리더로 ▲탁월한 위기 관리 능력 ▲ 적폐 청산과 조직쇄신을 위한 안정적 리더십 ▲탁월한 경영능력(종합금융그룹 완성) ▲금융 환경 변화에 대한 미래 안목과 대처 능력 등을 갖춘 인물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DGB금융지주 한 관계자는 "창사 이래 가장 혹독한 시기다"면서 "고객과 지역주민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조직의 안정과 통합을 위한 실효적 위기관리 능력을 갖춘 인물이 필요하다. 특히 큰 조직을 이끈(리더십) 인물이 오길 기대했지만, 실망감이 크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차기 회장으로 낙점된 김태오 전 하나HSBC생명 사장은 큰 조직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 약점이다. 그의 주 재임 시절인 2012년과 2013년 회계연도 하나생명의 자산총계는 각각 2조 8734억원, 2조9904억원으로 삼성생명(2013년 자산총계 193조원)의 본부 수준도 안된다.
특히 2014년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경력 공백이 길다. 은행 경력으로 따지면 7년여에 달한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은행에 대한 이해와 미래 전략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금융권의 지적이다.
DGB금융지주는 50년 이상 지역 주민과 동고동락했다. 하지만 DGB금융지주의 조직은 파벌주의와 소수 경영진이 권력을 독점했다. 그 뒤에는 대구상고와 경북고가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DGB금융 지주 안팎에서는 '제2의 박인규 체제' 부활을 우려한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을 비롯해 DGB금융의 임추위원 5명 가운데 조해녕, 서인덕 사외이사가 경북고 동문들이다. 경북고는 대구은행장 11명 중 4명을 배출하며 DGB금융 내 인맥도 잘 구축돼 있다. 경북고 출신인 김태오 전 사장이 차기 회장으로 낙점된 배경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A은행 출신 한 은행장은 "낙하산 관치금융도 문제지만, 학연 지연 등이 기대 금융의 사유화를 노리는 잘못된 파벌주의가 더 큰 문제다"면서 "DGB가 과거 전철을 다시 밟는 느낌이다"고 우려했다..
◆종합금융그룹 완성 어떻게
DGB금융의 미래는 종합금융그룹에 있다는 데 이견은 없다. 채용 비리 등으로 조사를 받는 박인규 전 회장이 비금융부문에 공을 들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DGB금융지주는 은행 비중이 90%에 달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하이투자증권 인수가 답보 상태에 빠지면서 증권가 일각에선 BNK금융지주의 하이투자증권 인수전 참여설이 돈다. DGB생명보험은 지난해 당기순이익이 126억원으로 최근 3년 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급여력(RBC)비율은 184.2%로 업계 하위권이다. 메리츠종금증권 은경완 연구원은 "DGB금융지주의 1분기 지배주주순이익은 918억원으로 컨센서스를 6.7%를 밑돌았다"면서 "부진했던 자산 성장률 회복 확인과 조속한 지배구조 불확실성 해소가 선행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구은행 한 관계자는 "금융지주에 걸맞게 균형잡힌 포트폴리오 구축 및 비은행 강화를 위한 현안을 풀 CEO를 기대했다. 농협이라는 거대 조직의 행장을 지낸 검증된 후보가 낙마하고, 현업에서 오랜기간 물러나 있던 사람이 최종 후보로 오른데 대해 선뜻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인맥보다 능력있는 CEO에 대한 열망이다.
김 전 사장은 하나은행 재직 시절인 2009년 영남사업본부 부행장을 맡으며, 경북 지역 금융에 대한 이해와 인맥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하나금융 부사장 시절인 2006년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을 가까이서 보좌한 점도 눈길을 끈다. 김승유 전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고려대 동문으로 MB정권 당시 금융권 4대 천황으로 불렸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오프라인 점포 중심의 채널 및 지역 확장은 비용만 수반하고 효과는 불투명하다. DGB금융지주가 살아남으려면 인터넷 은행 진출과 핀테크 강화 등으로 국내 사업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