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유서대필 사건의 피해자 강기훈 씨와 가족이 국가와 수사 담당 검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7민사부(김춘호 부장판사)는 6일 대한민국과 필적 감정을 담당한 김모씨가 강씨에게 7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실제 배상액은 5억2900여만원으로, 앞서 무죄로 밝혀진 형사재판 보상금으로 2억여원을 받은 점을 반영했다.
강씨의 부모는 각 2000만원, 자녀에게는 각 1000만원, 형제는 각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필적 감정에 대한 기본 원칙도 안지켰고, 그 감정이 수사와 재판에서 결정적 증거가 돼 강씨가 3년 이상 복역하고 풀려났다"며 "국가적 국민적 관심이 높은 상황에서 강씨의 인적사항이 언론에 공개되고, 학생을 자살로 몰아넣은 부도덕한 사람이 돼 원고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됐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또 "강씨는 후유증으로 사회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았을 것으로 판단한다"며 "그로 인해 사건 이후 태어난 원고의 자녀들 역시 정신적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수사에서 힘들어한 가족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며 "원고 강씨의 수사 및 재판, 복역과 현재에 이르는 정신·물질적 피해와 통화가치 변동 등을 고려했다"고 배상금 책정 근거를 들었다.
다만 해당 사건을 수사한 검사 두 명에 대해서는 사건 이후 20년이 넘게 지나는 등 강압 수사 부분에서 소멸시효가 된 점을 들어,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이 필적 감정을 조작하는 과정에 개입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근거도 들었다.
유서 대필 사건은 1991년 5월, 강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서강대에서 자살한 친구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한 혐의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에 처해진 사건이다. 이후 유서에 대한 허위감정 사실이 확인돼, 강씨는 지난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씨의 소송 대리인 송상교 변호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어찌보면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가해자이고 몸통이라 할 수 있고, 대필조작 사건을 전체적으로 지휘·진행한 당사자들에 대해 책임을 부정했다"며 "그런 수사의 틀 안에서 움직였던 국과수 감정인에 대해서만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마무리된 점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송 변호사는 "검사들이 당시 강씨 필적이 유서와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많은 필적을 은폐하거나 인멸하거나 법정에 제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재판에 관여하고 진실을 왜곡했다"며 "폭압적인 수사에 변호인 접견도 수차례 거부하는 식으로 강씨를 고립하고 자신이 원하는 식으로 수사 프레임을 끝까지 짠 부분이 많은 기록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어 "소멸시효 제도에 대해서 특히 이런 과거사 사건에 대해 종래 법원이 형성해온 법리마저 매우 소극적으로 해석했다"며 "종래 법원은 피해자(원고)가 재판을 청구할 수 없었다는 객관적인 사정이 존재했을 때, 가해자가 시간이 오래 지났음을 이유로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강씨의 소송 대리인단은 향후 항소 여부를 논의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