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분리로 재벌과 금융을 분리시키겠다. 금융 시장은 기업의 행위를 객관적 입장에서 감시하고 감독해 효율적으로 자본을 배분하는 본래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문재인 대통령, 1월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3차포럼 '재벌개혁,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길' 좌담회)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의 생각도 문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기본적으로 금융위원회 업무이고 더 나아가 법무부와 국무총리실 등 다양한 부처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다른 정부부처와 잘 협의해 경제에 큰 충격을 주지 않고 시장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삼성그룹 등 재계가 가장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새정부 정책 중 하나가 '금산분리' 정책이다. 금산분리 정책이 시행되면 삼성생명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 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낮춰야 한다. 이는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 일가의 지배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한화생명, 한화증권 등을 보유한 한화그룹, 현대차·롯데·현대중공업 등도 마찬가지다.
금산분리제도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결합을 막자는 것이다. 산업자본이나 금융자본에 과도한 경제력이 몰리는 것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그동안 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주장했던 금산분리 강화 목소리는 '은산분리'(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에 집중됐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금산분리가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에 대응(투자·일자리 창출 등) 하는데 자칫 걸림돌이 되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의 위협은 물론 기업의 지배력 약화로 외국계 자본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사금고는 막아야, 융·복합 환경에 맞는 규제로
재계는 금산분리 강화 움직임에 대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금산융합으로 금융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것"이라며 염려의 목소리를 낸다.
재계 한 관계자는 "동양그룹 사태, 최순실 국정농단사태 등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금산분리 강화 목소리가 정치권을 중심으로 불 붙는 양상이다. 이 같은 사태는 기존의 제도적 장치를 보완한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문제다"고 말했다.
시장성 차입금 감독 강화나 금융계열사의 비금융계열사 지원 제한, 개인 투자자 보호 강화, 캐피털ㆍ대부업체 관리감독 강화 등의 조치면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금산법, 자통법, 보험업법 등 개별 금융 관련 법령을 통해 규제를 하는 만큼 금융사의 사금고화 가능성은 낮다는 논리에 배치되는 사건이 많았다.
지난 2013년 동양그룹은 그룹을 살린다는 목적으로 동양증권과 동양자산운용을 통해 부도 가능성이 높은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소비자에게 팔았다는 점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금융사가 소비자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소비자의 돈으로 그룹 오너를 챙겨준 것이다. 같은 해에 효성캐피탈이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일가 및 계열사에 1조 2300억원이 넘는 금액을 대출해 준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터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불거진 대기업과의 정경유착 의혹은 '금산분리' 문제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하영구 은행연합회 회장은 지난달 29일 최근 인터넷전문은행 출범에 따라 '뜨거운 감자'가 된 금산분리·은산분리에 대해 "금산분리 적용기준을 단순한 업종이 아닌 금융사의 실제 업무내용과 규모, 역할로 전환해야 한다"며 "특히 인터넷전문은행에는 은산분리를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조 후보자도 재벌개혁의 목표와 수단에 대해서 유연한 자세다.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겸업 금지)는 중요한 원칙이지만 현행 규제가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는 금과옥조는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변화된 환경에 맞춰 원칙을 합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산분리: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자료=SK증권
◆적대적 M&A노출, 투자위축 초래할 수도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민주화 의지가 워낙 확고하다. 금산분리의 큰 틀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학계와 재계의 관측이다.
문 대통령은 은행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금산분리를 보험·카드 등 제2금융권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공약했다. 금융이 재벌의 사금고가 되지 않도록 재벌과의 고리를 끊겠다는 얘기다.
이상원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현행 금융지주회사법상 비금융주력자로 표현되는 비금융계열사에 은행에 한해서만 '4%룰'을 적용하고 있다"며 "제2금융권 계열사 지분 보유는 제재 사항이 아니지만 만약 금산분리 강화로 출자·피출자에 대한 규제가 강해진다면 삼성그룹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현행 은행법은 산업자본이 의결권 있는 은행 지분을 4%만 보유하도록 규정한다. 또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상 금융회사는 국내 계열사의 의결권 행사가 불가능하나 ▲임원의 선임 또는 해임, ▲정관변경 ▲그 계열회사의 다른회사로의 합병, 영업의 전부 또는 주요 부분의 다른 회사로의 양도의 경우 15% 이내에서 의결권 행사를 허용하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기존 생각보다 한층 강화된 '금산분리'안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지난 1월 박용진 의원(더불어민주당) 등 12명은 예외적으로 의결권 행사가 가능한 범위 내 계열회사 간의 합병, 영업의 전부 또는 주요부분의 양도를 제외하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2013년 동양그룹 회사채 사태와 관련, '동양그룹 회사채 피해발생 관련 쟁점과 입법정책과제'란 보고서에서 "지난해 국회에서 심도 있게 논의됐던 금산분리를 비은행 금융회사로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재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의결권 강화다. 공정위는 19대 국회에서 은행·보험사의 의결권 한도를 5%까지 낮추는 내용의 공정거래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무산됐다.
이렇게 되면 금융·보험사의 의결권이 줄어 들어 해당 기업에 대한 영향력이 약해지고, 의결권 행사 지분율 감소분을 다른 계열사를 통해 사게 되면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재계는 적대적 M&A 가능성이 커지고 신규투자 여력은 줄어든다면서 걱정하고 있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미국과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에서도 은행과 산업자본 분리는 엄격히 하지만 다른 금융기업과 산업자본의 융합은 풀어주는 추세"라며 "금산분리 강화가 국내 금융산업 선진화와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인터넷은행이 좋은 예다. '은산분리' 발이 묶인 상태다. 인터넷전문은행 측은 금융당국이 애초 추진했던 대로 KT, 카카오 등 일반기업(산업자본)의 지분율 확대 등 자본금 확충이 이뤄져야 활발한 서비스 경쟁과 투자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