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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인터뷰] "IMF가 '함께 먹는 밥의 소중함' 가르쳐줬죠"

설 연휴 마지막 날인 30일에 만난 우씨 부자는 새 보금자리인 오피스텔에서 "다시 일어서기까지 힘들었지만, 앞으로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자"며 손을 잡았다./이범종 기자



선뜻 '오피스텔'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주황색 건물을 가리키며 우힘찬(31·가명)씨가 말한다. "저기예요. 우리 가족이 다시 마련한 집이."

1997년 IMF 사태의 여파로 아버지 우직한(61·가명)씨는 나라 밖을 돌아다녔다. 식구들은 정든 집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온 아버지와 아들은 설 연휴 마지막 날 마주앉아 웃었다.

"우리 회사가 국내 5위였죠. 하지만 은행이 망하는 상황인데 버틸 수가 있나요."

우씨는 4형제가 운영하던 가구회사에서 제품개발과 디자인을 맡았다. 근속 연수는 18년. 그의 마지막 명함에는 '이사'가 적혀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 순간이었다.

"낌새요? 대통령도 직전에야 알았다니 말 다했죠 뭐." 우씨 회사는 매출액 100억원에 직원 180명 규모였다. 정부기관과 조흥은행, 대학교 등 공공시설물 위주로 사업을 이어갔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경기장의 스탠드, 방송 비품 등의 가구를 도맡아 만들었다. 금융 전산화 이전에는 매일 저녁 회사에 넘치는 현금을 입금하기 위해 은행 직원들이 포대를 가져와 쓸어 담아야 했다.

일이 끊이지 않았다. "조흥은행 200개 지점을 맡았는데, 5년 전 공사한 것을 부수고 새로 맞춰요. 그런데 일주일에 한 개 지점밖에 공사를 못해. 그러니 계속 하는 거예요(웃음)."

경주에 1만평짜리 수출용 공장을 짓기도 했다. "1995년이었죠. 다른 세 곳은 내수용이었고. 그런데 물건을 좀 팔만 하니까 IMF가 터져버린 겁니다."

은행이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어음 결제 구조는 회사에 덫이 됐다. "갑자기 현금으로 100억원 가까이 달라는 겁니다."

이럴 때 회사가 돈을 마련할 방법은 하나였다. "다 같이 망해서 너도 나도 공장을 팔려고 하니, 누가 사나요. 그러니 부도가 났죠."

18년 동안 일주일에 3일만 집에서 자며 달렸다. 그러다 일거리 미터기가 '0'을 가리켰다. 1998년 초. 우씨는 시동이 꺼진 몸을 이끌고 곤지암 근처에서 한 달을 머물렀다. "의사가 '죽기 싫으면 새소리 병원 가서 3년 사시라'는 거예요. 숲 같은 데서 쉬라는 거야 그냥."

미국계 회사가 그를 찾아온 건 이 무렵이었다. "부도 날 무렵에 그 회사에서 우리한테 6000만원을 선입금했죠. 그러니 우리한테 돈을 뜯기게 된 겁니다. 공장에 가 보니, 딱 그쪽이 주문한 수량만큼의 재료가 있어요. 그래서 한 달 내내 일했습니다. 그렇게 물건을 만들어 보내고 공장 전기를 내렸지."

돈을 날렸다고 생각했던 회사는 우씨에게 이직을 제안한다. 그는 카자흐스탄 지사에서 통역사를 둔 채 150명 직원과 일했다. "이제는 밥 얻어먹을 정도는 돼요. 러시아어가, 허허."

우씨는 이후 8년 동안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서유럽을 오가며 나무를 만졌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 남은 아내와 두 아들은 경매로 넘어간 송파구 집을 등지고 경기도 광주로 살림을 옮겨야 했다.

"빨간 딱지가 집안 곳곳에 붙는 모습을 봤어요. 서울에서만 20년을 넘게 살다 나오니까, 서울에 내 집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더라고요."

둘째 아들 우힘찬 씨는 성동구에 있는 9평짜리 오피스텔을 얻어 서울에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돌아봤다. "어머니와 경기도 광주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어요. 저는 학업을 위해 서울에서 냉장고 같은 옥탑방에 살았죠. 그러다 어머니께서 일하시는 오피스텔에서 월세를 얻었어요. 온 식구가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오피스텔 방 5개를 갖게 된 거죠." 현재 우씨 부부와 그의 형이 쓰는 방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에선 월세가 나온다. 우힘찬 씨는 아내와 함께 독립해 살고 있다.

아버지 우씨는 "외환 위기로 해체된 가족이 많은데 우리는 그래도 각개전투로 살다가 다시 모여 고맙게 생각한다"며 "좋고 나쁜 시절 다 살고 보니, 외환위기 시절도 어찌 보면 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함께 어려움을 극복한 우씨 가족은 설 연휴에 처음으로 노래방을 찾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마주보며 웃었다. "제 나이 서른이 넘어서 가족이 다 같이 모여 뭔가를 새로 했다는 사실이 뜻 깊어요. 낡고 작은 오피스텔이지만, 지금이라도 하루하루 얼굴 보고 밥 먹으며 좋은 얘기, 싫은 얘기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한 생활이구나 생각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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