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오는 얘기를 듣자하니 그녀 아버지의 신기(神氣)를 물려받은 딸이 최순실이라 한다. 이런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당 운운하며 무속인들을 더불어 단죄하려 든다. 미신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다. 궁금해하는 미래에 대한 예측과 조언을 함에 있어 흔히 신기(神氣)에 의한 예측을 하느냐 아니면 명리학에 근거하느냐 숫자의 데이터에 의해 예측을 하느냐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무속인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신령을 섬겨 길흉(吉凶)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무속인들이 제사장의 위치에 있었던 적도 있었다.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러한 인식을 지금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는 전제이므로 타당하진 않을수도있다. 작금의 사태가 가져온 진실과 피해는 분명 충격이지만 무속인의 사회적 인정과 직업적 지위가 낮다하여 무속인이라는 직업군 자체를 무당! 무당! 하면서 모멸감을 주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이말은 무속인들을 옹호하려고 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한국인들이 가진 이중성 중의 하나를 보기 때문이다. 입학철 선거철만 되면 용하다는 무속인들은 더욱 바빠진다. 왜 그런 것인가? 무속인들의 순기능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속인들의 종교성으로 불리는 샤머니즘은 우리 민족의 면면에 알게 모르게 뿌리박혀 있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생활과도 매우 밀접하게 함께 하고 있다. 손 없는 날은 왜 찾고 동지 팥죽은 왜 쒀 먹는가? 우리의 역사와 전통 속의 샤머니즘엔 관대하면서 직업으로 택할 수박에 없는 무속인들을 그저 만만하게 비난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보기에 이런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속 마음으로는 필요로 하면서도 무속인들에게 의지했다는 점이 사회적으로는 인식있는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체면의식도 작용하는것인가. 때로는 용한 무속인들이나 역술인들을 찾아다니면서도 기회가 되면 그들을 비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또 무속인을 찾아와 미래를 점쳐 달라 하고 방편을 묻는다. 이러한 이중성은 분명 위선이라는 점이다. 제도적으로 잘 포장되어 있는 기성 종교집단의 종교인들에 비해 샤머니즘이 갖는 초월적 정신현상에 대한 객관적 증명이 어려운 점 등은 분명 상대적 불리함이다. 그들은 잘 정비된 이론이나 제도에 속해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무속인들에 대한 호칭을 일개 무당 무당이라 칭하며 목사나 신부 스님 칭호를 가지고 있어도 이름과 겉만 스님이고 목사인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에 비추어 무속인들이 이토록 요망한 집단이란 멸시를 받아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동의하고 싶지않다./김상회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