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려운 일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어려움도 잘 살펴보면 스스로에게서 기인하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지혜가 얕은 사람들은 자신 이외의 남에게서 꼭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다보면 문제는 풀리기는커녕 더 꼬이기만 하고 더 나아가 남에게 피해를 준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 흔히 신앙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불보살님들의 가피를 구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요구하는 하심의 자세 자애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교회 안에서 절 안에서는 마음이 편안한지 몰라도 일상 안으로 돌아오면 신앙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월광사의 신도들에게 자기 전에 그 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되뇌어보면서 뭔가 마음에 편치 않은 일들이 있다면 반드시 참회를 하라 이른다. 매일이 어렵다면 보름이나 그믐처럼 최소한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불편하고 불선한 일들에 대한 참회가 없이는 그 어떤 소원이 이뤄지기를 발원하여도 성취를 이룬다는 것은 매우 더딘 일이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많은 기도문 중에 참회진언을 항상 발원의 앞에 두는 이유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 거울에 먼지가 끼어있으면 당연히 얼굴을 모습을 밝게 보여줄 수가 없다. 그냥 나누게 되면 뿌연 거울엔 더욱 때가 얹혀지게 되어 나중에는 아무리 힘을 주어 닦아도 처음같은 청명한 거울은 기대할 수가 없게 된다. 우리 마음의 때와 부정도 그러하다. 우리 마음의 때는 업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는 업은 좋은 업보다는 불선한 업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며 거울을 매일 닦지 않으면 나중에는 우리 얼굴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듯이 불선한 업장이 쌓여지게 되면 복락이 내려앉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불선한 업장을 녹이지 않으면 계속 같은 업장에 의해 삶이 진행되며 결국은 불행한 결과를 과보로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우주적 양심은 스스로도 뭐가 잘못됐는지를 안다. 욕망이 강하다 보면 잘못된 것도 합리화를 하면서 취하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선근이 있는 사람이라면 양심을 감출 수가 없다. 정작 원하는 것을 얻고 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양심이 작용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지며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마음은 우리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되는 자정작용으로 이끈다. 이것이 참회로 이끄는 불행을 막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한다. 늘 경험하지만 참회만 되어도 발원하는 것의 반은 그냥도 이뤄진다./김상회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