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후 7시 45분께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출발한 시위대 400여명은 한 시간 뒤 신사역에 도착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은 이들을 격려하며 음료수와 핫팩을 건네주기도 했다./이범종 기자
"샘플 보고 가세요…." 화장품 가게 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흐린다. 지난 15일 저녁 8시. 가면 쓴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강남 한복판을 걷고 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은 환호하며 "힘 내세요"를 외친다. 어른들이 다가와 음료수와 핫팩을 건넨다.
이날 저녁 강남과 신촌, 청량리와 대학로에서는 동시다발 시위가 열렸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숨은주권찾기'에 따르면, 강남대로에서 벌어지는 시위는 이번이 처음이다.
학생들은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시민들의 행진 참여를 독려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가 적힌 카드와 하얀 가면을 나눠주며 "오른쪽으로 오세요"를 외쳤다.
오후 6시 50분까지만 해도 40여명이던 참가자 수는 출발 직전인 7시 40분께 4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 사이 참가자들은 자신이 촛불을 든 이유를 말했다. 행진에 참여한 학생들은 주로 '교육'을 이야기했다. 서울교육대학교에 다니는 김지민 씨는 "앞으로 초등학교 교사가 될 텐데, 이 땅의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남겨주려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해 환호 받았다.
일부 참가자는 '미래 루팡' '연금 노예' '하야 Hey' 등이 적힌 머리띠를 쓰기도 했다./이범종 기자
◆"의경 오빠 생각에 여기 왔다"
그러나 김씨의 목소리가 이내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울먹이며 "의경인 오빠가 광화문 시위를 막는 데 차출돼 12일에 나가지 못했다"며 "오빠라면 이 자리에 나왔으리라 생각하고 나왔다. 민주주의를 수호하자"고 말했다.
숨은주권찾기 태스크포스(TF)가 만들어진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들은 지난달 30일 서울대 온라인 게시판 '스누 라이프'에 올라온 '시위대는 청와대를 향해선 안된다. 민중을 향해야 한다'는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글을 쓴 의경 출신 서울대 공대생은 "경찰의 방패 너머엔 생각보다 치밀한 것들이 계획되어 있다"며 "시위대는 꼭 청와대를 향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1987년 6월 민중항쟁 당시 서울 시내를 거닐던 시위대는 밝은 햇살 아래 움직였다"며 "시위대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모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해당 글에는 최현일 씨가 "강남과 신촌, 대학로, 청량리 거점으로 시위하면 대학생 참여를 일으킬 것"이라며 지도를 올렸다. 이에 시위 경험이 없지만 시국의 심각성을 느낀 학생 40명이 TF를 만들었다. 이날 TF는 "우리는 자기 의지와 달리 시위를 막을 수밖에 없는 친구들 이야기를 듣고 모였다"고 설명했다.
경기도에 사는 모 대학 유아교육과 학생은 "정부가 유아교육부터 다시 받아야 한다"고 말해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서울대에 다니는 김무스(가명·24)씨는 장대에 매단 말머리에 금메달을 걸고 입에는 닭 인형을 물렸다. 김씨는 "정권 바뀌기를 바라며 나왔다"고 말했다./이범종 기자
◆노력과 열정 비웃는 비선 문화에 분노
경기도 소재 대학에서 졸업을 앞둔 학생은 어른들이 말하는 '열정'을 꼬집었다. 그는 "정유라는 엄마가 대통령과 친해서 대학 쉽게 들어가고 고등학교는 잘 가지도 않았다"며 "졸업한 뒤에 누구는 누구와 친해 회사 들어가고 쉽게 승진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또 "요즘 애들이 노력과 열정이 없다고들 말 하지만, 이런 비리와 잘못된 제도 때문에 힘든 건 우리"라고 지적했다.
"다음 문제. 박근혜는 2012년에 대통령직을 사퇴한 적이 있다?" 결과는 전원 정답. OX 퀴즈를 진행하던 사회자가 "제발 말을 지켜달라"고 말해 강남역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7시 45분께 일어나 행진했다. 시위를 처음 해본 탓에 "박근혜는 하야하라"를 작지도 크지도 않게 말하다 멋쩍은 듯 웃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강남 일대가 떠나갈듯 "박근혜를 감옥으로"를 외쳤다. 시위대 스피커에서는 '말 달리자'와 '하야하야' 등 현 시국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약국 문을 반쯤 열고 눈을 휘둥그레 뜬 서모(50)씨는 "뉴스로 오늘 시위 소식을 알았다"며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지금. 시국이 이런데"라며 학생들을 응원했다.
길게 늘어선 촛불은 거의 세 블록을 채웠다. 서울대생 김무스(가명·24)씨는 장대에 매단 말머리에 금메달을 걸고 입에는 닭 인형을 물려놓았다. 김씨는 "정유라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며 "정권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승현(27)씨는 시위대 가운데 유일하게 '가이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왔다. 그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이 가면을 쓴 주인공 '브이'가 한 말을 인용했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 해선 안 된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이범종 기자
◆웃으며 끝난 시위 "언제든 다시 오겠다"
주최측이 나눠준 가면 대신 '가이포크스' 가면을 쓰고 온 시민도 있었다. 백승현(27)씨는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이 가면을 쓴 주인공 '브이'가 한 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작중
독재 정부에 맞서는 주인공은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 해선 안 된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다.
"앞만 보고 걸었는데, 뒤를 돌아보세요." 진행자와 함께 주위를 살핀 시위대가 "와" 소리를 내며 감탄한다. 이들이 목적지인 신사역 2번출구에 도착한 시간은 8시 41분. 시위대는 가면을 벗고 촛불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그리고 옆에서 함께 걸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눴다. 청춘들은 웃으며 귀가했다. 몇몇은 자리에 남아 함께 온 친구와 여운을 느꼈다.
호서대학교에 다니는 편윤주(19·여)씨는 "처음엔 올 생각이 없었지만 앞으로 이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언제든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편씨와 함께 온 정효원(19·여)씨는 "시위를 처음 해본다"며 "구호를 외칠 때마다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시위 내내 가슴 졸인 주최측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날 스태프로 참여한 경희대생 안정미(22·여)씨가 웃으며 말한다. "우린 시위 경험이 없는데다 진행할 사람이 5명인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어제 15명이 돕겠다고 해 20명이 진행할 수 있었죠." 이날 시위에 쓰인 마이크와 스피커는 근처 장비 대여점 사장이 즉석에서 빌려주었다.
같은 시간 청량리와 대학로, 신촌 등에서는 행진이 한창이었다. 지부별 시위 규모는 비슷했다. 안씨는 "우린 개인으로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언론이 참여 대학 숫자를 늘려가며 보도했지만, 이날 확인한 사실은 두 가지다. 촛불처럼 이글거리는 눈빛과, 활화산처럼 부글대는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