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프의 개척자 박세리(38·하나금융)가 오는 13일 영광스러운 은퇴식을 끝으로 필드를 영원히 떠난다. 박세리는 13일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골프장 오션 코스에서 열리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KEB 하나은행챔피언십에서 1라운드를 마치고 은퇴식을 치를 예정이다.
박세리는 한국 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썼다. 박세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골프는 부자나 권력자들이 즐기는 고급 놀이로만 여겨졌다.
그랬던 골프가 대중도 즐기는 스포츠로 다가간 것은 박세리의 등장 때문이었다. 박세리가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뒤 골프는 국민 스포츠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한국에서는 골프를 몰라도 골프 중계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딸에게 골프채를 쥐어 주는 부모도 많아졌다. 이에 세계 여자 골프는 일명 '박세리 키즈'인 후배 선수들이 점령하게 됐다.
한국에서는 골프 하면 박세리를 떠올린다. 그만큼 한국 골프에 박세리라는 이름 석 자는 특별하다. 또한 박세리는 한국을 넘어 태국, 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 골프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인 최초로 LPGA투어 메이저 챔피언에 오른 펑산산, 태국인 첫 메이저대회 챔피언 에리야 쭈타누깐 역시 크게 보면 '세리 키즈'의 일원이다.
박세리는 지난 7월 US여자오픈을 마지막으로 미국 대회에 나서지 않았다. 사실상 은퇴 상태다. 그러나 은퇴 무대는 고국에서 열리는 대회를 선택했다. 이날 은퇴식은 동료 선수와 골프 관계자는 물론 골프 팬 누구나 지켜볼 수 있는 '열린 은퇴식'으로 진행된다.
원래 육상 선수였던 박세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원한 골프 스승'인 아버지 박준철 씨의 손에 이끌려 골프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금세 천재성을 드러냈다. 중학생 때는 '프로 잡는 아마추어'로 명성을 떨쳤다. 전 갈마중 3학년이던 1992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라일 앤드 스콧 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이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박세리는 톰보이 여자오픈을 제패해 첫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1995년 한국여자프로골프 투어는 고교 졸업반 박세리의 독무대였다. 12개 대회 가운데 4승을 박세리가 쓸어 담았다.
1996년부터 프로 무대에 뛰어든 박세리는 4승을 거둬들이며 상금왕에 올랐다. 1997년에는 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에 응시했다. 결과는 수석 합격이었다.
박세리는 1998년 LPGA 투어 데뷔와 동시에 세계 골프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8년 5월 메이저대회 LPGA 챔피언십, 7월 US여자오픈을 연달아 제패했다. LPGA 투어에서 첫 우승과 두 번째 우승을 모두 메이저대회로 장식한 선수는 박세리 이전에는 없었다.
특히 US여자오픈에서는 잊지 못할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워터 해저드에 볼이 빠지자 맨발 샷을 시도한 것이다. 이 장면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 위기에 시달리던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박세리는 LPGA 투어 신인상에 이어 2003년 최저타수상을 받았으며 1998년에는 AP통신 올해의 여자 선수에 선정됐다. 메이저대회 5승을 포함해 LPGA 투어에서 통산 25승을 거둬 한국인 최다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2007년에는 한국 선수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물론 추락의 순간도 있었다. 2004년은 박세리에게 극심한 슬럼프였다. 쳤다 하면 오버파 스코어였다. 80대 스코어를 하도 자주 적어내 "주말 골퍼"라는 비아냥도 받았다. 슬럼프를 이겨낸 것은 2006년 메이저 대회인 LPGA 챔피언십에서 카리 웹(호주)를 연장전에서 꺾고 우승하면서부터였다. 박세리는 이후 2차례 더 우승했다.
올해 은퇴를 앞두고 박세리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여자부 감독으로 참가해 박인비(28·KB금융)의 금메달을 이끌었다. LPGA투어에서 이룬 업적과 맞먹는 역사적 쾌거였다. 그렇게 박세리는 떠나는 순간까지 역사를 섰다.
선수 생활을 마친 박세리는 이제 제2의 인생을 향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후배들에게 등대 역할을 하고 싶다"고 자주 말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박세리는 선수 생활 못지않은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