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절벽'에 빠진 한국경제가 위태롭다. 3~4%대를 달리던 경제성장률은 2%대로 뚝 떨어졌다. 물가는 역(-)성장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저(低)금리·저물가·원저의 단맛은 사라지고, 또다시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 이른바 'D(디플레이션)'의 공포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침체 국면이 오래 이어지는 현 국내 경제 상황에서 디플레이션은 매우 위험하다고 입을 모은다. 저물가가 굳어지면 수요 침체와 생산, 고용 위축으로 경제가 저성장의 질곡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기 활성화라는 당면 과제와 성장 제고를 위한 체질 개선까지 한국경제를 살리기 위한 묘안이 절실하다.
'2.7%(국제통화기금·IMF), 2.5%(무디스), 2.4%(골드만삭스)….'
한국경제의 앞날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저유가와 중국 경제 둔화에 따른 수출 부진과 고령화·가계부채 등의 구조적 문제는 한국 경제성장률을 2%대 늪으로 끌어내렸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2∼4월 1%대를 기록한 이후 5월부터 4개월 연속으로 0%대에 머물렀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 간다는 한국 경제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하는 기관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장에서는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의 늪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대 회복했지만… 'D의 공포'가시지 않아
통계청이 5일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동향을 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보다 1.2% 상승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월 1.0%를 기록하고서 5월부터 8월까지 내리 0%대에 머물다가 5개월 만에 1%대로 올라선 것이다.
문제는 계절적 요인이 커 10월 물가 상승률은 다시 뒷걸음질 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농·축·수산물 가격이 1년 전보다 10.2% 올라 9월 전체 물가를 0.77%포인트 끌어올렸다.
한국은행도 물가하락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4일 국정감사에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연평균 1.0% 수준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이는 한은이 지난 7월 발표한 경제전망에서 예측했던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1.1%보다 0.1%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한은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리는 오는 13일 올해와 내년 경제성장률과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수정 발표할 예정이다.
위험 신호는 이뿐이 아니다.
경상수지는 뒷걸음 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 4일 발표한 '2016년 8월 국제수지(잠정)'를 보면 지난 8월 상품과 서비스 등을 포함한 경상수지 흑자는 55억1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이로써 경상수지는 2013년 3월 이후 54개월 연속 흑자를 내면서 최장 흑자 기록을 또 세웠다. 그러나 흑자 규모는 지난 6월 120억6000만 달러에서 7월 86억7000만 달러로 줄어든 데 이어 두 달 연속 감소했다.
8월 상품수지 흑자는 73억 달러로 7월(107억8000만 달러)보다 34억8000만 달러 급감했다. 작년 2월(70억2000만 달러) 이후 1년 6개월 만에 최소 규모다.
수출은 작년 8월보다 3.0% 줄어든 417억 달러이고 수입은 0.6% 늘어난 344억 달러로 파악됐다. 수입이 전년 동기대비 증가하기는 2014년 9월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수입에서 유가 하락의 영향이 줄고 있고 수입물량 자체도 기계류를 중심으로 늘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요즘처럼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물가마저 낮은 수준을 면치 못하면 즉 체감경기가 둔화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정부는 6월 말 '하반기(7∼12월)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1%에서 2.8%로 낮췄다. 미국과 독일의 1인당 국민총소득이 한국의 현재 수준과 비슷했을 때의 경상성장률은 5∼6%대였다.
◆돈이 도는 경제 만들어야
"120여 개국 가운데 85% 이상에서 물가상승률이 중기 예상치(전망치)보다 낮았다. 이 중 20%는 디플레이션 상태이며, 특히 식품과 유류 가격을 뺀 핵심물가상승률도 대부분의 선진국과 많은 신흥시장국가에서 중앙은행의 물가목표치를 밑돌았다."(9월 28일 IMF)
"현재 경기는 수요 부족으로 산업생산 활동이 위축되면서 경제 전반에 과잉공급능력이 심화되는 장기불황 국면이다. 경제성장률 2%대가 고착화되고 있다."(6월 3일 현대경제연구원 '준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한 정책조합 시급'보고서)
시장에서는 'D(디플레이션·Deflation)의 공포'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디플레이션이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가 경험했듯, 만성적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국민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러나 침체 국면이 오래 이어지는 현 국내 경제 상황에서 디플레이션은 매우 위험하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에서는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줄어들어 투자 부진이나 고용 둔화로 이어진다. 가계의 경우 명목임금 상승률이 하락해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어진다. 정부 역시 재정이 부실해 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이 좋은 예다. 일본은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지속적인 디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성장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더욱 한국경제가 우려스러운 것은 물가 하락을 이끄는 중심축의 이동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유가 및 농산물 가격 하락 등 공급측 요인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투자, 소비 부진 등 수요 요인이 점차 주목받고 있다. 금리 카드와 같은 단기 처방보다는 투자·고용 확대·소비심리 활성화·구조개혁 등과 같은 근본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부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9월 국회에서 열린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지금은 과거 IMF 위기, 2008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은 아니다.…구조적 문제에 의해 자칫하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껴야 할 때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내수 회복과 함께 일자리 창출, 소득 재분배, 자산 가격 연착륙, 산업 구조개혁 등과 같은 대책들이 한꺼번에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접적인 고용이나 미래소득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 환경도 마찬가지다. 기업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보수적으로 경영할 수밖에 없다. '기업투자→일자리 창출→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정부가 쓰는 여러 정책은 경기 하강이 확인된 후 사후적으로 일부 조정하는 수준"이라며 "이런 형태의 정책은 경기 하강을 지연시킬 순 있어도 경기를 반전시키긴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어 "통화, 재정, 구조개혁 세 가지를 전방위적으로 추진하며 경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신뢰를 경제주체들에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