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경영대학원의 문송천 교수는 이번 가을학기 아일랜드국립대 경영대학원과 영국 뉴캐슬대학 전산학과를 오가며 강의하고 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아일랜드국립대 경영대학원의 붉은 단풍이 인상적이다. /문송천 교수 제공
"소프트웨어(SW)라는 숲 전체를 보지 못한 채 인공지능(AI)이라는 나무 하나에 연연하고 목숨을 거는 현재 우리나라 정부 정책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국내 전산학의 개척자이자 권위자인 문송천(63)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는 메트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알파고 쇼크'에 대한 한국의 대응이 달라져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AI를 포함한 어떤 SW의 발전도 운영체계(OS)와 데이터베이스(DB)엔진이라는 기반 없이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가SW개발연구소부터 제대로 갖춰 놓고 SW산업 발전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다시 시작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무턱대고 AI 하나에 매달리다가는 OS와 DB엔진을 장악한 기존 강자의 배만 불려주게 된다는 것이다. 영국이 알파고를 개발하고도 그 열매를 미국의 구글에 빼앗긴 일이 이를 방증한다는 설명이다.
문 교수는 이번 학기 아일랜드국립대와 영국 뉴캐슬대학을 오가며 강의 중이다. 그와의 인터뷰는 이메일과 전화통화를 통해 이뤄졌다. 다음은 문 교수와의 인터뷰를 간추린 것이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한국내 AI 열풍이 거세다.
"알파고는 원래 딥마인드라는 영국 기업 작품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에 대한 보도가 BBC 한 차례, 더 타임즈지 한 차례, 가디언지 한 차례 등 총 3건에 그쳤다. 한국에서 대국기간 내내 수십만건에 달할 정도로 보도 홍수를 이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이후 행보에서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알파고 사건을 보고 원래 예정보다 코딩 교육을 조기 도입할 필요를 느껴 초등학생부터 코딩 교육을 도입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가AI연구소가 조기 출범하는 등의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국가AI연구소 출범에 문제가 있나?
"AI는 전체 SW 분야 중 10% 몫도 채 안된다. 그런데도 AI에 온갖 기대를 거는 일은 앞뒤 논리상 모순이 존재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상누각형 투자로 인해 SW 분야 전체의 균형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SW분야에서는 OS와 DB엔진이 기초기반 핵심기술로 SW 전체의 80% 몫을 차지한다. 기초분야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그렇지 않고 AI에만 너무 연연하는 것은 알파고로 인한 충격을 건전한 방향으로 소화하는 해법이 아니다. 영국의 알파고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자 몇명이 만들어낸 SW다. 영국 정부 지원 하나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한국 AI 역사는 30년이 넘었다. 연구를 제대로 해왔다면 지금 알파고가 아니라 '슈퍼알파고' 같은 것이 서너개는 족히 나왔어야 했다. AI연구소만 가지고는 지난 30년간 보였던 것처럼 별 성과 없는 연구결과만 양산해 낼 것이 뻔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AI가 왜 SW산업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인가?
"운동장을 깔아줘야 메시 같은 축구선수가 뛰어 다닐 수 있듯이 핵심SW는 운동장 같은 플랫폼 역할을 한다. 마음대로 뛰어 다니며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놀이마당이라는 뜻이다. 플랫폼 자체도 다층 구조로 형성되어 있으나 가장 기초에 해당하는 것이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윈도즈와 같은 OS, 그리고 오라클사의 오라클 같은 DB엔진이다. OS와 DB엔진, 이 두가지 없이는 어떤 소프트웨어도 작동될 방법이 없으며 이 점에서는 알파고와 같은 AI도 예외가 아니다."
-OS와 DB엔진이 없이 AI만 발전할 경우 어떻게 되나?
"알파고는 영국이 만들어낸 작품이었지만 미국이 만든 OS와 DB엔진을 바탕으로 작동되는 소프트웨어였기에 결국 영국의 경쟁력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기 보다는 미국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알파고는 구글이 독점적으로 보유하여 제공하는 SW 위에서 돌아갔기에 그 위력이 이세돌 9단과의 대국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구글 플랫폼이 아니었다면 알파고는 그런 위용을 우리에게 보이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알파고를 만들어낸 영국 기업 딥마인드는 결국 미국 기업 구글에 인수되고 말았다. 영국 내에서는 알파고를 자생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영국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 OS 국내 개발, DB엔진 국내 개발에 성공하지 않고는 SW 분야에 대한 투자는 모두 헛발질이 될 것이다. 구글이 독자 OS와 DB엔진으로 독자 생태계를 갖고 있고, MS와 IBM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잘 관찰하지 않고는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왜 타사의 플랫폼을 채택하지 않는지, 하면 아니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남의 플랫폼을 채택하는 순간 그 기업은 영국의 딥마인드처럼 종국에는 인수될 운명에 처하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결국 남 좋은 일하다 마는 을(乙)의 처지를 벗어나기 힘들다."
-한국은 IT강국인데 영국보다 잘할 수 있지 않나?
"HW(하드웨어)는 강하지만 SW에서는 영국에 많이 뒤져있다. SW가 IT에서 차지하는 몫이 80%, 나머지 20%가 HW다. HW 분야에서는 미국과 한국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반면 SW 시장에서는 미국이 80% 이상으로 독점하다시피하고 있으며, 점유율 10% 정도로 그 뒤를 쫓는 나라가 영국이다. 우리나라는 SW 점유율이 겨우 0.8% 수준에 머물고 있다. SW 후진국 중의 후진국이란 말이다. HW만 발달해 있고 SW는 전혀 안돼 있는 기형적 모습이 대한민국 IT산업의 불편한 진실이다. SW분야는 부가가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는 없는 분야다. 우리에게는 지난 40여년에 걸쳐 HW분야를 멋지게 일구어낸 저력이 있기에 SW 쪽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
-한국이 무엇을 해야 하나?
"정부가 국가AI연구소부터 출범시키는 우를 범한 일은 조기에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SW개발연구소부터 제대로 갖춰 놓고 SW산업 발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마치 야구 전문가가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려놓겠노라고 공언하는 일이나 다름 없다. AI가 마치 SW산업을 대변하는 것인 양 일부 학계와 일부 정치권에서 나서서 일을 만든 탓이다. 이제라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항간에서는 SW개발연구소가 국내에 있는 듯이 말하지만 기껏해야 외산을 잔뜩 국내에 들여다가 조립하거나 가공하는 수준에 머무는 연구소라면 플랫폼 차원에서는 없는 것이나 진배 없다."
-AI와 관련해서는 대규모 실업사태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계 기술은 인간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쪽으로 기여해왔지 인류 사회를 파괴하는 쪽으로 흐르진 않았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트랜지스터의 등장으로 일자리가 수없이 늘어난 것을 보라. 컴퓨터도 그랬다. 사무가 자동화되어 일자리가 점차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으나 실제는 다르게 나타났다. AI도 그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면 됐지 기존 일자리를 위협하는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AI가 인간을 넘어설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인간은 역경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지능을 가진 존재다. AI가 아무리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자연지능을 당해내진 못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 최초로 유럽IT학회 이사로 활동 중인데.
"영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학문의 세계에서 학계의 권위를 대변하는 학술지가 거의 없는 것이 아시아권의 한계다. 아시아권 연구결과가 유럽 선진국에서 내놓은 연구결과와 대등한 수준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고 이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작은 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문송천 교수는 국내 전산학박사 1호이자 OS와 DB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과거 국내 유일의 숭실대 전산학과를 나와 카이스트에서 석사를 마쳤다. 이어 숭실대에서 전산학을 가르치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일리노이대에서 전산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 재직 시절 첨단 SW 분야 중에서 최고난도로 일컬어지는 DB엔진 IM과 분산DB엔진 DIME을 미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개발, 학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는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 1970년대초 전세계 수십명에 불과하던 컴퓨터 입문자 중 한 명으로 24살 젊은 나이부터 교수생활을 시작해 40년간 후진을 양성하는 데 몰두해 왔다. 그의 활동 반경은 유럽을 아우른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에든버러대 전산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고, IT 분야 세계 3대 학회 중 하나인 유럽IT학회의 아시아 대표로 활동 중이다. 현재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교수로서 이번 가을학기에는 아일랜드국립대 경영대학원과 영국 뉴캐슬대학 전산학과를 오가며 강의하고 있다.
그는 연구와 후진 양성 외에 사회봉사에도 힘써 왔다. 1999년부터 1m를 뛸 때마다 기부하는 기부마라톤을 시작하였고 17년 동안 1년에 2번씩 마라톤 완주를 하며 카이스트 학생들과 함께 기부활동을 해왔다. 또한 지난 20년간 매주 1회씩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IT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왔으며 출연료 전액을 정신대할머니 돕기 및 백혈병어린이 돕기에 기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