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人 머니 산업 IT·과학 정치&정책 생활경제 사회 에듀&JOB 기획연재 오피니언 라이프 AI영상 플러스
글로벌 메트로신문
로그인
회원가입

    머니

  • 증권
  • 은행
  • 보험
  • 카드
  • 부동산
  • 경제일반

    산업

  • 재계
  • 자동차
  • 전기전자
  • 물류항공
  • 산업일반

    IT·과학

  • 인터넷
  • 게임
  • 방송통신
  • IT·과학일반

    사회

  • 지방행정
  • 국제
  • 사회일반

    플러스

  • 한줄뉴스
  • 포토
  • 영상
  • 운세/사주
스포츠>스포츠종합

[영원한 국가대표] 체조 여홍철 "금메달은 신의 선물…최상의 컨디션 유지하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손진영 기자 son@



"금메달은 신의 선물…최상의 컨디션 유지하길"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무협영화 같은 체조에 매료됐죠

결선 못 간 시드니 올림픽 아쉬워

목표 뚜렷했던 선수 생활 후회 없어

체조는 운동의 기본이다. 근력, 지구력, 유연성, 민첩성, 평형감각 등 운동을 통해 키울 수 있는 모든 것이 체조 안에 있다. 그러나 스포츠 종목으로서 체조, 그 중에서도 기계 체조는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많지 않은 종목이다. 스포츠하면 흔히 떠오르는 드라마틱함과는 거리가 먼 분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기계 체조도 4년에 한번씩 늘 주목을 받는다. 올림픽에서 한국이 메달을 기대하는 종목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홍철이 그 시작이 됐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여홍철이 도마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기계 체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져갔다. 이후 양태영과 양학선 등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면서 여홍철이 쌓은 한국 기계 체조의 명성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여홍철은 남들에 비하면 체조를 늦게 시작했다. 보통 체조는 초등학교 1~2학년 때 시작한다. 그러나 여홍철이 체조를 처음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말이었다. 사실 체조보다 야구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학교 야구부가 없어진 뒤 우연히 체육관에서 체조부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체조에 마음을 빼앗겼다.

"무협영화를 좋아할 때였어요. 체조 선수들이 재주도 부리고 덤블링을 하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어요. 저게 내가 해야 할 종목인가 보다 싶었어요. 야구를 좋아한다는 것도 잊고 체조를 하게 됐죠. 그러다 감독님이 '혹시 체조를 계속할 생각이 없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감독님이 그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이렇게 체조를 하게 됐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손진영 기자 son@



처음부터 실력이 빛난 건 아니었다. 광주 출신인 여홍철은 처음 나간 전국소년체전에서 좌절을 맛봤다. "운 좋게 1982년에 소년체전에 나가게 됐어요. 그런데 서울과 수도권 애들이 얼마나 잘 하던지 단체전에서 광주는 12개 팀 중 11등을 했죠. 개인 종목별 결승전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고요." 그러나 좌절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해에는 하루도 안 쉬고 훈련을 했어요. 다시 나간 소년체전에서는 광주가 단체 준우승을 차지했죠. 저는 은메달 2개에 동메달 1개를 땄어요. 그때 정말 열심히 한 것 같아요(웃음)."

국가대표를 꿈꾼 것은 전남체육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태극마크를 한 번 달아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다음해 국가대표가 됐지만 한 달 만에 부상으로 선수촌을 나오게 됐다. 1990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다시 국가대표가 됐다. 그러나 베이징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부상으로 다시 퇴촌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91년 영국 셰필드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여홍철의 실력이 마침내 빛나기 시작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메달 없이 돌아왔지만 이듬해인 1993년 버펄로 유니버시아드에서 은메달을 다시 목에 걸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획득하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따내며 메달 행진을 이어간 그는 다시 올림픽으로 향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손진영 기자 son@



당시 여홍철은 모두가 기대하는 금메달 유망주였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실수를 해서 은메달을 땄어요. 조금만 더 보완하면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실력이었죠. 그래서 두 달 동안 열심히 훈련해서 올림픽에 나갔어요." 그러나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착지에서 아쉽게 실수를 하며 금메달을 놓쳤다. 모두가 그의 경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러나 여홍철에게 가장 아쉬운 기억은 따로 있다. 마지막 올림픽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다. "그때까지 제가 도마에서 세계랭킹 1위였어요. 경기에서도 실수도 거의 안 하고 거의 완벽하게 착지했어요. 그런데도 결승전에 들어가지 못했죠. 그때 세계랭킹 1~3위가 모두 결승전에 나가지 못했거든요. 유럽 심판들이 포진해 있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나중에 결승전을 지켜보는데 정말 현기증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때가 제일 아쉬워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으나 끝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여홍철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은퇴 계획이었다. 체조 선수로 활약하는 동안에도 대학원을 다니며 학업을 이어온 그는 은퇴 이후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마쳤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스포츠지도학과 교수로 정식 임용돼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손진영 기자 son@



누군가는 여홍철이 선수 생활에 아쉬움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또한 "선수 생활에 미련이 많이 남는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성공과 좌절을 맛본 경험이 있기에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음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여홍철은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회원으로 후배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서도 노력을 쏟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올림픽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후배들에게 그가 바라는 것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당일의 컨디션과 분위기에도 메달이 많이 좌우되고요. 후배들에게 너무 욕심 내지 말고 그동안 연습하고 훈련한 것을 충실히 하면 된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올림픽 당일 컨디션 조절도 중요하고요. 종목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절대 부담을 갖지 말고 자기 실력을 잘 보인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손진영 기자 son@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Copyright ⓒ 메트로신문 & metr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