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은행원들은 각종 앱 설치를 권유해야 한다. 설치한 앱을 실행시켜 '권유직원 번호(사진 붉은색 테두리)'를 눌러야 실적에 반영된다. 처음엔 친한 친구로 시작하는 영업은 어느새 '지인'으로 범위를 넓힌다. 한 은행원은 "연락처를 넘기다 덜 친한 친구 번호 앞에서 갈등을 하다 큰 맘 먹고 '통화'를 누른다"며 "가입한다고 손해볼 것도 없는데 '그런 것 안 한다'는 말에 상처입기도 한다"고 말했다./은행 앱 캡처화면
"n포요? (웃으며) 헬조선에서 다들 어려운데 은행원은 돈을 많이 받으니, 해당사항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처음엔 없다고 했다. 그러나 하루 일과를 묻자, 포기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점심은 기본이고 취미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다 영업하는 사람들의 고민 1순위, 인간관계 이야기가 나왔다. 인간관계에 대한 이들의 걱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영업하다 멀어지는 친구들이다. 두 번째는 성과연봉제 도입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동료의식이다.
◆ 불편해지는 친구 관계
요즘 은행원은 평소 연락하지 않던 친구에게 전화해 "요즘 어때"를 말해야 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은행 앱 설치를 권유하기 위해서다. 은행원 친구를 둔 강 모씨(27·여)는 "친구가 모바일 앱을 깔고 '추천인 아이디'를 입력해달라고 부탁한다"며 "수많은 약관 등 복잡한 절차를 거친 뒤에는, 연동되는 앱을 또 깔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불편함이 싫어 가입 하지 않으면, 한참 뒤에 전화가 온다. 강씨는 "친구가 머뭇거리다 미안한 목소리로 '아직 안했어?'라고 묻는다"며 "그 친구는 마감을 앞두고 '빈칸'으로 표시된 나를 발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잘못된 관행과 불편한 기술이 행원과 고객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며 안타까워했다.
연락처를 뒤적이는 행원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여의도 A은행에 다니는 김 모씨(30·여)는 "금융당국이 밀어붙이는 정책 때문에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해 가면서 영업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벌써 학교 친구들이 카드 한 장 씩 다 만들어줬다. 그런데 카드는 신규발급만 성과로 인정한다"고 말했다. 카드는 사용 기간이 끝나거나 해지하고 2년이 지난 뒤 새로 발급받아야 신규로 인정된다.
그는 "2년마다 돌아오는 날짜에 맞춰 친구들을 '관리'할 수도 없고 미치겠다"고 하소연했다. B은행 관계자는 "은행원이 됐을 때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시고 친구들도 부러워했다"면서도 "그게 2년을 못 가더라. '또 상품 얘기냐'고들 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 식사와 취미? "여유가 없다"
사람 만나 밥 먹을 여유도 없다. 입행 7년차 계장 신 모씨(30·여)는 "여유롭게 점심 먹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신씨는 "바쁠 땐 밥도 못 먹고 저녁까지 고객을 응대한다"며 "좁은 탕비실에서 김밥 한 줄 겨우 먹고 자리로 돌아가기 일쑤"라고 했다.
신입 때부터 취미 가질 생각을 아예 접은 경우도 있다. 밀린 업무와 공부 때문이다. 입행 8년차인 이 모씨(35)는 "업무 지식이 해박해야 고객의 금전 손실을 막을 수 있으니 주경야독 해야한다"며 "집단대출로 주말업무가 밀리고, 연수 받고, 자격증 공부하다 보면 취미는 커녕 가정생활도 못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보통 행원급은 연수를 1년에 3과목씩 받아야 한다. 과목당 20시간이다. 자격증도 따야 한다. 파생상품 투자 상담사와 외환 전문역 1·2종, 펀드와 보험관련 자격증 등 4가지를 취득해야 상품을 팔 수 있다.
◆ 성과연봉제로 "동료마저 잃을까" 걱정
은행원들은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성과연봉제로 인해 동료의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밖에서는 친구와 서먹해지고, 안에서는 선후배와 실적 경쟁으로 껄끄러워지는 등 "우리 인간관계는 비활동성계좌, '어카운트 인(人)포'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입행 13년차인 유 모씨(39)는 "선배가 후배를 끌어주는 문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유씨는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나의 여·수신 노하우를 후배에게 알려주지 않게 된다"며 "이 치열한 경쟁 환경을 만드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특수은행 관계자는 "우리는 '사람'을 잃고 있다"며 "일터에서 팀 단위로 일 하던 동료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각자가 잘 하는 분야가 있으니, 힘들게 뽑은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게 맞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어 "저들은 우리를 생산장에 한데 모인 자영업자로 보지만, 우리는 팀 단위로 움직여야 개인성과가 나온다"며 "기존 성과주의 문화에 성과연봉제가 더해지면, 우린 일터가 아닌 생산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우린 사람이 아닌 숫자로 살아야 한다. 동료보다 높은 점수가 되어야 하고, 동료 또한 나에게 그럴 것이다. 이건 은행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성과연봉제 도입에 성공하면, 사회 전체의 인간성이 숫자에 잠식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