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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육

[인터뷰] 33년만에 이발소 간 광운대 천장호 총장 "딸을 위해 생애 유일하게 자기서약 깼다"

광운대 천장호 총장 /광운대 제공



"지하철 첫차와 막차를 타보지 않고서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학교 총장이 있다. 광운대학교 천장호(68) 총장이다.

천 총장은 평생을 자가용 승용차 없이 지하철 1호선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서민의 애환을 뼈저리게 느꼈다. 생계를 위해 피곤한 몸으로 첫차를 타야만 하는 사람들, 막차 안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사람들을 수십 년간 지켜봤다. 스스로도 출퇴근길 지하철 빈자리 하나에 울고 웃었다. 2014년 총장이 된 후 다른 대학 총장들과 장관, 장군들과 어울리게 됐지만 그는 "지하철을 타는 그 사람들이 바로 내 이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천 총장이 메트로신문과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한 것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서민들이 보는 신문"이라는 이유였다.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노벨상을 바라보는 한국의 대표적 과학자로 거론되는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서민들에게 재미와 함께 희망을 주길 원했다.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천 총장과의 인터뷰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천 총장은 시흥 토박이다. 지금은 서울 금천구에 속하지만 과거에는 중학교 하나 없는 시골이었다. 서울로 통학하던 중학생 시절 오전 6시30분에 하나 있는 기차를 놓치면 끝이었다. 첫차를 타는 사람들의 절박감을 처음 느낀 때였다. 그는 대학 시절에도 열차 통학으로 마음 고생을 했다. 서울대 입시에 실패하고 광운대 전자공학과에 수석입학한 그는 집에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게 고통스러웠다. 열차 시간이 정해져 있다보니 서울대 진학에 성공한 친구들과 매일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대 학생들은 광운대 인근 서울공대에서 교양수업을 받았다.

천 총장은 고3시절 저녁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다. 집안이 가난해 점심과 저녁 도시락 2개를 쌀 형편이 못됐기 때문이다. 점심 도시락도 마늘장아찌나 새우젓, 아니면 고추장이나 무말랭이가 고작이었다. 영양실조가 오는 게 당연했다. 도서관에 앉아 늦게까지 공부하다보면 눈이 침침해졌다. 천 총장은 한 번에 서울대에 합격한 아들에게 "그때 저녁식사로 라면 하나, 달걀 하나 먹을 수 있었으면 나도 서울대에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마음에 입은 상처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1980년 광운대 교원으로 재직 중 국비유학생에 선발됐을 때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아들의 입이 아닌 여동생의 전화로 소식을 접한 어머니가 "이 좋은 일을 왜 이야기 안했느냐"고 물었을 때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미국으로 떠나기전 서둘러 결혼을 해야하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말에도 그는 "부모님처럼 고생스럽게 사는 게 싫어서 장가들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당시 일을 후회하며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인간이라고 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럽지만 천 총장은 인간사에서는 완벽하려고 노력한다. 화투나 카드에 손댄 적도 없고, 술·담배도 하지 않는다. 결혼한 뒤 외박 한 번 한 적 없다. 30년 넘게 안양의 집에서 학교까지 지하철 1호선을 타고 1시간이 넘는 통근길에 시달리면서도 자동차를 사지 않았다. 연구생활에 매진하기 위해 휴대전화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불우한 아이들을 돕기 위한 후원활동을 수십 년 넘게 계속해 왔다.

이에 대해 그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다짐한 서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했다. 그는 자기서약을 마음에만 담아두지 않고 주변에 알린다. "보통 사람은 말이 앞서면 안된다고 하지만 말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하니까 열심히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꿈을 가졌으면 말을 하고, 말을 했으면 행동을 하고, 행동이 습관이 되면 운명이 된다. 하나님이 축복하면 꿈은 이뤄진다"는 게 지론이다.

천 총장은 딸이 결혼하기 전까지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그는 지난 2013년 33년만에 이발소에 가면서 자기서약을 처음 어겼다. 1980년 미국 유학 직전 결혼식을 위해 이발소에 간 뒤 천 총장은 아내에게 머리 손질을 맡겼다. 유학생활 중에 현지의 이발비가 너무 비싸 돈을 아낀 것이 습관이 됐다. 아내가 힘들어하자 거울을 보며 스스로 머리를 손질하는 통에 '사자머리'가 됐지만 약속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그는 마음을 바꿨다. "딸아이에게 줄 선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단정한 모습으로 딸의 팔짱을 끼고 식장에 서기로 했다"는 것이다. 천 총장은 "그때 이발비가 만원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이후 2014년 총장에 취임하면서 그는 한 달에 한 번은 이발소에 간다. 의전 때문이다.

이발소라는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여전히 천 총장은 자기서약에 엄격하다. 특히 공적인 일에서 더욱 철저하다. 그는 "구차한 연구계획서가 싫어서 한 번도 외부에서 연구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 직접 연구비를 해결했고, 대학원생이 없으면 내가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 낸 연구로 그는 환경·에너지 분야의 노벨상이라는 에니상 최종 후보에 2011·2012년 두 차례나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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