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되도록 나오지 말래."
"왜?"
"당국에서 나왔대."
시중은행 본점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그들은 화장실에서 나서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플래시 터지는 소리를 좇아보니 금융위원장이 있었다. 당국에서 적극 밀어붙이고 있는 사잇돌대출 판매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금융부 기자가 된 지 9개월차, 금융권은 앓는 이가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관치(官治)'가 가장 아프게 파고들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국책은행의 부실대출이다. 올 상반기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조선·해운 기업에 수 조원대 대출을 지원하며 부실 직격타를 맞았다. 금융권을 비롯해 정계에서는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고 이례적인 구조의 자본확충펀드가 출범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낙하산 인사, 관피아 등 관치금융의 꺼풀이 벗겨졌다. 특히 홍기택 전 산은 회장이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지원은 청와대, 기재부, 금융당국이 결정했다"고 발언하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의문은 완벽히 해소되지 않았고, 합당한 처벌도 없었다.
금융권에서 내놓는 상품이나 서비스 이면에도 관치가 드러났다. 올해 뜨거운 감자인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와 성과연봉제가 그렇다.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ISA는 은행원들의 핵심성과지표(KPI)에 포함되면서 과당경쟁으로 치달았다. 결과는 '요란한 빈수레'였다. ISA 출시 한 달 간 은행권 전체 계좌의 74.3%(101만3600여개)가 가입 금액이 1만원 이하로 드러났다. 10개 중 7개의 계좌가 깡통계좌가 될 때까지도 당국은 뒷짐을 졌다.
성과연봉제도 마찬가지다. 유일호 경제 부총리를 비롯해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금융권 전체의 성과연봉제 확산을 주문했다. 결국 9개 금융공공기관은 모두 성과연봉제 도입을 결정했고, 은행연합회는 시중은행의 성과연봉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밀어붙이기 식에 노사 합의 절차는 건너뛰었다. 노사가 정해야 할 일에 당국이 끼다 보니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아야 할 손이 대놓고 시장을 휘젓고 있는 통에 애꿎은 은행원들만 새우등이 터지는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