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트로신문 송병형기자] 초짜들의 유쾌한 반란에 세계 문학계가 들썩이고 있다.
17일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46)은 국내에서야 이미 유명세를 탔지만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1970년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작가는 24살 때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학계에 데뷔했다. 이듬해 단편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시적 문체가 인상적인 소설로 주요 문학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한국소설문학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등을 모두 거머쥐자 그에게는 '차세대 한국문학의 기수'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그는 세계 문학계에 데뷔한 지 불과 1년여 지났을 뿐이다.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는 바로 그의 국제무대 데뷔작이다. 이 소설은 국내에서 지난 2004년 발표됐지만 해외에서는 지난해 1월에야 첫 선을 보였다. 그런데 세계 문학계 데뷔작이 세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번역자는 작가보다 더한 초짜다. 영국인 데보라 스미스(28)는 7년전만해도 모국어인 영어 외에 다른 언어는 할 줄 몰랐다. 영문학 전공을 마친 뒤 번역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뒤에야 한국으로 건너와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2년만에 '채식주의자' 번역에 들어갔다. 그의 첫 번역 시도다.
스스로 그 결과물에 대해 "끔찍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스미스의 첫 한국어 번역 시도는 형편없었다. 그럴만 했다. 스미스는 한국어를 배우기 전 자신에 대해 "한국 문화를 접한 적도 없고, 한국인을 만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또 "영국의 누구도 실질적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거나 알지 못했다. 한국어는 이상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상한' 선택을 한 이유로 한국문학 번역가가 부족하다는 점과 번역에는 한국어 회화실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 두 가지를 들었다.
스미스는 첫 번역 시도가 실패한지 일년만에 출판업자의 권유로 다시 '채식주의자' 번역에 들어갔다. 한국어 학습 3년차의 일이다. 이렇게 나온 결과물은 놀라웠다. 보이드 톤킨 맨부커상 심사위원장은 시상식에서 "놀라운 번역"이라며 "기묘하면서도 뛰어난 소설이 영어에 들어맞는 목소리를 찾았다"고 평가했다. 제대로 된 한국어 회화도 못하는 초짜 번역가의 첫 번역작이 세계 문학계를 평정했다는 이야기다.
초짜 번역가가 넘어선 경쟁작을 살펴보면 놀라움이 더 커진다. 최종 경쟁작 5편 중 하나인 'A Strangeness in my Mind'는 터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의 작품이다. 그는 2006년 터키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세계 문학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나머지 중국의 옌렌커, 앙골라의 호세 에두아르도 아구아루사, 이탈리아의 엘레나 페란트 등도 이미 유명세를 탄 쟁쟁한 작가들이다.
'채식주의자'가 이런 쟁쟁한 작가들의 작품을 누르고 수상작이 된 데에는 새로 바뀐 규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맨부커상은 영어권 작품과 비영어권의 번역작, 두 부문으로 나뉜다. 번역작 부문인 인터내셔널상은 지난 6차례 수상작까지 2년마다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평가해 시상했다. 이를 올해부터 매년 작가의 한 작품만을 평가해 시상하기로 한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작가의 평판이나 권위를 떠나 순수한 작품성으로 다른 작품들을 모두 눌렀다.
>
※소설 '채식주의자' 작품설명
소설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거부하고 식물의 상태로 자신을 몰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주변에서 무심코 벌어지는 인간의 폭력성을 다룬 작품이다. 20대 시절 작가 자신의 채식주의 경험이 반영됐다. 어느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한 '영혜'를 남편·형부·언니의 시선으로 본 3가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1부이자 표제작인 '채식주의자'는 남편인 '나', 2부인 '몽고반점'은 형부인 '나', 3부인 '나무 불꽃'은 언니 인혜인 '나'가 화자다. 1부에서는 영혜가 어린 시절 자신의 다리를 문 개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꿈을 꾼 뒤 육식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2부에서는 비디오아티스티인 영혜의 형부가 영혜의 몸을 욕망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3부는 식음을 전폐하고 나뭇가지처럼 말라가는 영혜의 모습을 언니가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육체적인 욕망과 예술혼의 승화를 절묘하게 결합,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폭력성을 파헤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맨부커상이란
1969년 영국의 부커사가 제정한 문학상으로 2002년부터 맨 그룹이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맨부커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원래 영국 연방국가 내에서 영어로 쓴 영미 소설에 한해서 수상작을 선정, 영어권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2013년부터는 작가의 국적과 상관없이 영국에서 출간된 모든 영어 소설로 대상을 확대되면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이 상은 영어권 출판업자들의 추천을 받은 소설작품을 후보작으로 하여 신망받는 평론가와 소설가, 학자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수상작을 선정한다. 부커상 후보에 오른 작가들에게는 그들 작품의 특별판을 제작해 주고 최종 수상자는 상금과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보증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