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전 10시 우리은행 혜화동 지점이 문을 전부터 필리핀 고객들이 줄을 서 있다.
은행 점포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탄력 점포, 외국인 전용 점포, 이동 점포 등 고객 편의 제고와 수익 다변화의 일환으로 다양한 모습의 점포가 탄생하는 추세다. 이에 따라 은행원의 하루도 변하고 있다. 점포 특성에 따라 탄력적인 업무는 기본이다. 메트로신문은 일반 영업점과는 다른 특화 점포 등에서 일하는 은행원의 '특별한 하루'를 동행 취재했다.
지난 14일 일요일 오전 9시 40분. 아침부터 발런타인데이를 홍보하는 상점의 호객행위가 소란스러운 가운데 우리은행 서울 혜화점 앞이 유난히 북적였다. 그 곳엔 필리핀 근로자들이 한 달 동안 일한 급여를 고향에 보내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행원들도 개점 준비로 분주했다. 기자가 직원 전용 문을 통해 지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직원들은 일절 잡담 없이 업무 준비에 한창이었다.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영되는 해당 지점은 필리핀 고객 특화 점포로, 하루 최대 300여명이 방문할 정도로 바쁘다.
"매달 10일이 필리핀 근로자 급여일이라 바로 그 다음 일요일은 고객들이 많이 와요. 특히 이번 달은 설 연휴 때문에 한 주 쉬어서 오늘이 급여일 직후여서 더 정신없을 거예요."
10년차 행원의 예상은 적중했다. 오전 10시 정각, H 주임이 문을 열자마자 줄 서 있던 필리핀 고객이 들어와 대기표를 뽑았다. 눈 깜빡 할 새 지점 내 전 좌석이 꽉 찼다.
이날 지점에서는 과장 등 책임자 2명을 비롯해 필리핀 아르바이트생까지 총 9명이 근무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은 통장 개설 등의 단순 업무를 돕고, 필리핀 아르바이트생들은 주로 송금 대행 '머니그램' 관련 업무를 도왔다. 머니그램은 각국의 에이전트를 통해 거래계좌 없이 금액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당일 송금이 가능해 필리핀 고객의 75~80%가 이용하는 서비스다.
30분 정도 지나자 좌석이 없어 서 있는 고객이 눈에 띄었다. 정신없는 현장에 통장과 휴대폰 등의 분실물이 속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분실물은 장기 고객의 얼굴을 익힌 행원들이 곧바로 찾아줄 수 있었지만, 바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갑작스레 전산에 오류가 생긴 것. 사소한 전산 문제지만 휴일이라 담당자가 없어 문제 해결이 지연됐다. 대기자가 50명이나 밀렸지만 필리핀 고객들은 불평 없이 기다렸고,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행원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밀린 업무는 속전속결로 해결됐다.
정신없는 오전을 보낸 양 과장은 오후 1시가 다 돼서야 점심 식사를 하러 근처 분식집을 찾았다. 교대 근무를 위해 신속히 먹을 수 있는 라면과 김밥을 주문한 뒤에야 양 과장과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우리은행 혜화지점에서 근무하는 Y 과장이 필리핀 고객의 금융 거래를 돕고 있다.
"우리은행 혜화점은 필리핀 신부님이 계신 혜화 성당에서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필리핀 고객이 급증하기 시작했죠. 특화 점포로서 맞춤형 서비스를 다양하게 제공해 왔기 때문에, 장기고객이 많은 편이에요."
이 지점에서 실시하는 맞춤형 서비스로는 필리핀 고객이 이해하기 쉽게 자체적으로 필리핀어 브로슈어를 만들어 제공하고, 영업점 2층에 쉼터를 만들어 커뮤니티 형성에 도움을 주는 등이 있다.
양 과장은 우리은행 본점 전략부에서 근무하다가 한 달여 전 혜화점으로 발령 받았다. 이동 후 일요일 근무는 이번이 두 번째이지만, 벌써부터 필리핀 고객에 대한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얼마 전 20대 정도로 보이는 필리핀 남성이 통장에서 자꾸 돈이 빠져 나간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다른 곳에서도 몇 번 민원을 낸 모양인데 금액이 워낙 적고 말이 잘 안 통하니까 해결을 못 했더라고요. 제가 여기 저기서 코드 확인 등을 해 보니까 대구에서 출금 기록이 나왔어요. 카드가 복제 된거죠. 카드 취소해주고 경찰서 신고 절차 알려줬더니 나중에 고맙다고 다시 오시더라고요."
이번 일을 통해 양 과장은 금융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의 입장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에 저는 '한국인이었더라면 좀 더 민원을 제대로 파악해서 신경써주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웠어요. 금융 서비스는 모르는 걸 알려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점포는 그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고민 중이고 성당 커뮤니티를 통한 금융교육도 계획 중입니다."
우리은행 혜화 지점은 금융 서비스에서 소외 당하는 외국인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필리핀인들을 기간제직으로 고용했다.
"확실히 영어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필리핀 분들을 모셔 왔어요. 직원도, 고객도 답답한 부분이 있었는데 현지어를 사용하게 되니 고객들도 훨씬 좋아하시더라고요. 기간제로 일하는 돈나벨씨의 경우 한국에서 결혼해서 국적까지 한국으로 바꿨을 정도로 한국말을 잘해요. 필리핀 고객과 직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한결 수월해졌죠."
마지막으로 양 과장은 단순히 '따뜻하기만 한' 금융 보다는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금융 서비스를 추구할 것임을 다짐했다.
"우리 지점에서는 외국인 고객에게 감성이 섞여 있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어요. 단순히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적용해 나가고 있고, 거기서 차별화를 만들고 있어요. 차갑게만 느껴지던 은행이 꼭 필요할 때 따뜻한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것, 그게 저와 우리 지점의 목표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