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연대기'(감독 백운학)를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뜻밖에도 사회생활의 애달픔이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점점 더 깊은 위기에 빠져드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 비춰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인 최창식(손현주)은 상사와 부하들의 신임을 모두 받고 있는 경찰서 강력반장이다. 출세를 위해 묵묵히 달려온 그는 이제 대통령상 표창과 함께 그토록 기다려온 승진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뜻밖의 사건이 평탄했던 그의 삶을 뒤흔든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최창식은 자신이 은폐한 시체가 건설 현장 크레인에 걸린 채 발견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악의 연대기'는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사건 수사에 있어서는 감정을 배제하고 팩트만 봐야 한다"고 후배에게 조언하는 최창식은 신념이 확고한 사람처럼 보인다. 선한 이미지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손현주가 최창식을 연기한다는 사실도 그가 선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창식을 습격한 괴한이 그가 저지른 비리를 폭로할 때, 우리는 최창식이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최창식을 마냥 미워할 수도 없다. 성공을 위해 때로는 원칙을 무시하고, 윗사람에게는 아양도 떨면서 아랫사람은 가족처럼 챙겨주는 최창식의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회인의 단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신념과 행동의 괴리에서 느끼는 최창식의 고뇌는 '악의 연대기'가 그려내는 긴장감의 정체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맡게 된 최창식은 사건 수사 과정 속에서 순수했던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스릴러로 포장돼 있지만 그 속에는 사회 초년생 시절의 순수한 열정을 뒤로 하고 눈앞의 성공과 출세만을 달려온 한 남자의 이야기를 숨겨놓고 있다.
다만 최창식을 중심으로 쌓여온 팽팽한 긴장감은 반전이 공개되면서 맥이 풀려버리는 감이 없지 않다. 최창식의 캐릭터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반면 반전의 중심에 선 캐릭터는 이해가 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동성애를 소재주의적으로 끌고 온 점도 불편하다. 반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달라질 것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5월 1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