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출연하기로 이야기하던 작품이 두 세 편 있었어요. 그런데 작품들이 한두 달 사이에 다 잘 안 됐어요. 출연료도 맞췄는데 말이죠. 다시는 무대에 못 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절대적인 외로움에 빠진 시간이었어요."
박철민(48)은 익살스러운 사투리와 즉흥적인 애드리브 연기가 장기인 배우다. 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스크린 속에서 주로 코믹한 감초 캐릭터를 맡아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해왔다. 그러나 다양한 역할에 도전해야 하는 배우가 대중에게 하나의 이미지로만 각인되는 것은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박철민이 지난 여름 배우로서 깊은 외로움과 마주하며 고민의 시간을 보낸 이유다.
돌이켜보면 박철민이 코믹 연기에만 능한 배우는 아니었다. '혈의 누'에서는 악역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고 '또 하나의 약속'에서는 절절한 부성애 연기로 진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박철민 스스로는 자신의 연기가 점점 더 식상하고 전형적이 돼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고민을 안고 있을 무렵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영화 '약장수'(감독 조치언)였다.
'약장수'는 어머니들을 모아 각종 건강식품과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일명 '떴다방'으로 불리는 홍보관을 무대로 소시민의 애달픈 삶, 그리고 독거노인 문제를 다룬 영화다. 박철민은 극중에서 홍보관을 운영하는 철중 역을 맡았다. 늘 친절하게 웃는 얼굴이지만 자신의 이익과 목표를 채우지 못했을 때는 악랄하게 변신하는, 영화의 주인공인 일범(김인권)을 각박한 현실로 내모는 악역 캐릭터다.
영화 '약장수'./대명문화공장·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시나리오를 받고 '이런 독특한 캐릭터가 나한테 왔네?'라고 생각했어요. 이전까지 안 해본 역할이라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죠. 선과 악을 넘나드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에 저예산의 작은 영화임에도 선택할 수 있었어요."
박철민은 철중을 "돈만 지향하는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보니 비열하고 악마 같은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고 이해했다. 악한 인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수긍할 부분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철중의 신념은 단 하나, 자신이 제공한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보상이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없이 선한 얼굴로 무료한 노인들에게 '효(孝)'를 제공하는 철중이 그 대가로 돈이 입금되지 않는 순간 악랄한 인물이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양면성을 지닌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박철민은 이전과 달리 진지한 정극 연기를 펼쳤다. 노인들 앞에서 제품을 홍보할 때는 특유의 애드리브 연기를 펼쳤지만 일범과 감정을 주고 받는 신에서는 웃음을 누른 채 연기에 임했다. 철중이 웃지 않을 때 입가의 주름을 통해 전해지는 서늘한 기운은 이번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박철민의 새로운 모습이다.
"나도 이전까지는 몰랐던 표정이에요. 내가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만족스러웠어요. 철중이 일범과 사람들을 다그치는 장면을 찍다 보니 연기가 신이 나서 스스로 발전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촬영 초반보다는 후반에 연기한 장면들이 더 마음에 듭니다."
'약장수'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같은 날인 오는 23일 개봉한다. 박철민은 "우리 영화가 지닌 진정성의 힘을 믿는다"며 "엄청난 규모의 오락영화에 맞서는 제작비 4억원의 절절한 한국영화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솔직한 기대를 나타냈다. 박철민의 소망은 소박하다. 홍보관을 통해 독거 노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조금이나마 생각했으면 하는 것이다.
박철민은 "완벽한 연기, 최고의 연기를 할 배우가 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저 "'전국노래자랑'처럼 어딘가 부족해도 희로애락을 전하는 배우"로 대중의 기억에 남고 싶을 뿐이다. '약장수'로 새로운 역할을 경험한 그는 자신이 만나보지 못한 인물로 또 다시 관객과 만나기 위해 배우의 길을 부단히 걸어가고 있다.
사진/라운드테이블(김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