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교황의 방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교황이 방문을 예정한 국내 '천주교의 상징'을 소개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 '명동대성당'
서울대교구주교좌 '명동대성당'은 명실 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부터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는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이 천주학을 접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이렇게 수도 한복판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명동대성당이 태생하게 됐다.
이후 1882년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이곳을 성당터로 매입하고 이곳에다 종현서당을 설립·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1892년 마침내 기공식이 열렸고 1898년 5월 29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이 진행됐다.
◆'꽃동네', 아무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을 꿈꾸다.
'꽃동네' 창립자인 오웅진 신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밥 동냥을 해 18명의 병든 노숙자들을 먹여 살리는 최귀동(1990년 선종) 할아버지를 보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 이라며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용담산 기슭에 '사랑의 집'을 지어 1976년 꽃동네라는 이름을 붙였다.
꽃동네는 '아무도 버려지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 최대의 종합복지시설이며 한국의 대표적인 종합복지시설이다. 입양기관인 천사의 집부터 임종의 집까지 한국사회에서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과 환우들, 그리고 장애인들과 알코올 중독자, 행려자들을 예수님으로 모시고 봉사하고 있다.
현재 꽃동네는 음성 꽃동네를 모원으로 해 가평 꽃동네, 강화도 꽃동네가 있으며 방글라데시, 필리핀, 우간다, 아이티 등에서도 운영되고 있다.
◆순교자의 고향 '솔뫼성지'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인 송산이라고도 불리는 터로 내포는 원래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로 유명했다. 특히 내포를 비롯해 서해안 여러 지역에서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너오는 서학 내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됐던 실학사상의 분파인 서학이 내포 선비들의 관심사가 됐고 내포의 서학자들이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으로 천주교가 전파됐다.
또 1784년경 김대건 신부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해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 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 가문이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순교하게 돼 솔뫼가 자연스럽게 '순교자의 고향'이 된 것이다.
◆순교 선열의 혼이 깃든 '해미성지'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고을(해미성지)'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 둔 곳으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다 할 국토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을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했으며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으로 순교 선열들을 끌어내 교수·참수·석형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1985년 4월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가 발족했고 이들은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통해 1998년 말 생매장 순교 성지를 7000평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어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가진 후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마침내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