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기업은 돈을 쌓아놓기만 하고, 늘어나는 빚과 이자에 서민들은 경조사비마저 줄이면서 한국 경제에 돈이 돌지 않고 있다. 경제활동 위축과 동의어인 '돈맥경화'가 9년 사이에 가장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18일 한국은행의 '2012년 중 자금순환(잠정)'을 보면 지난해 가계의 자금잉여는 86조5000억원에 달했다. 2003년 관련 통계가 집계된 이래 가장 많은 것으로, 전년도 54조9000억원과 비교해서도 31조6000억원 늘었다. 자금잉여의 과잉은 소비 부진 탓이다. 특히 부동산 매매 실종에서 드러나듯이 고소득층의 투자감소가 가계 잉여자금의 과잉을 이끌고 있다.
기업도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한은은 지난해 기업의 자금부족 규모가 59조9000억원으로 전년도(76조9000억원)보다 개선됐다고 밝혔다. 자금조달은 이 기간 151조3000억원에서 127조9000억원으로 축소했지만, 기업이 설비투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여유자금이 늘어난 것이다.
금융기관 관계자는 "미래에 대한 불안심리에 내수와 기업 설비투자가 모두 위축됐다"고 분석했다.
돈이 돌지 않는 상황에서도 서민들의 빚은 늘어가고 있다. 저축은행, 신협, 새마을금고 등 비은행 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이 최근 5년간 예금은행의 가계대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문턱이 높은 예금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서민들이 비은행 예금취급기관으로 몰렸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은에 따르면 비은행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은 2007년 12월 110조4130억원에서 올해 1월 192조4010억원을 기록했다. 2007년 12월 이후 74% 급증한 것이다.
같은 기간 예금은행의 가계대출은 363조6810억원에서 463조8420억원으로 27.5% 증가했다. 비은행예금취금기관의 가계대출 증가세가 예금은행의 2.7배나 됐다.
빚을 진 서민들은 경조사비까지 줄이는 등 웬만해서는 돈을 쓰지 않고 있다.
이날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경조사 건수는 2000년 이래 가장 많았는데도 경조비가 포함된 가구당 '이전지출'은 이례적으로 감소했다. 지난해 전국 2인 이상 가구의 '가구 간 이전지출'은 월평균 20만7310원으로 전년(20만8709원)보다 0.7% 줄었다. 지난해 사망·결혼 건수가 59만4400건으로 1999년(약 60만6000건) 이후 가장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조사에 참석했다고 해도 봉투에 넣은 액수를 줄였거나 참석률 자체가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경조사비 축소가 중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불황의 여파가 서민들의 경조사비 지출까지 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