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L.제임스 지음 박은서 옮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시공사 펴냄)가 번역 출간됐다. 미국과 영국에서 온갖 출판 관련 기록들을 갈아 치우며 신드롬을 일으킨 '바로 그 책(it Book)'이다. 과거 아픔을 지닌 27세의 억만장자 크리스천 그레이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1세의 아니스타샤 스틸의 파격적인 사랑을 관능적인 묘사로 그려낸 작품이다.
미국에서만 2000만부가 팔려 독서 인구의 25%가 읽었고, 출간된 지 석달만에 전세계적으로 3000만부가 팔렸다. 베스트셀러를 넘어 문화현상이 된 '그레이의~'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시리즈 외에도 2초에 한 권씩 팔리는 책, 다빈치 코드 이후 최고가 영화 판권 계약, 100만부 이상 판매된 최초의 전자책 등 수많은 신기록과 화제를 쏟아냈다.
여성작가 E L 제임스(사진)는 스테프니 메이어의 소설 '트와일라잇'에 매료돼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호주의 작은 출판사의 눈에 띄어 출간돼 25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후 미국 랜덤하우스 계열 빈티지 출판사에서 다시 출판되면서 초유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한편,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이 책이 출간 됐을 때 미국 출판계와 비평계는 '호기심 왕성한 독자에 의해 반짝 인기만을 누릴 것',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한 전업주부나 읽을 책'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책은 미국 전역, 모든 성인 연령의 여성이 읽은 책이 됐다. 공공 도서관이 성인소설을 구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책을 비치하지 않기로 한 플로리다 도서관은 시민들의 강력한 항의로 당초의 입장을 번복, 수백 권을 들여놓는 해프닝을 벌인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
라스베이거스 한 도서관은 이례적으로 이 책만 235권을 비치했지만 대출 대기자가 800명에 이른다고 밝히는 등 미 전역에서 대출 대기자가 너무 많아 몸살을 앓을 지경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그레이의~'는 할리퀸 로맨스와 소프트 포르노를 결합한 소설이다. 로맨스소설의 수요는 늘 있었고 관능소설 출간이 처음도 아닌 지금, 이 책이 세계 여성 독자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이 성(性)을 즐기는 것이 신드롬이 되어버린 건 여전히 억압받고 있는 여성성에 대한 반증', '가정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남성과의 경쟁에서 끊임없이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알파걸들이 그 피로를 달래려 읽는 책', '경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전율과 전통적 로맨스 코드가 주는 안도감의 조화' 등 숱한 해석이 나왔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레이의~'를 소비하고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 남자를 사랑이 구원한다. 세상을 모르던 여자가 사랑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사랑을 통해 결점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위해 변화하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울림이 있다. 수없이 반복돼도 여전히 읽히는 강력한 서사이다. 시공사는 이 책의 초판을 3만부 찍었다. 우리나라 여성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