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깜깜한 오전 6시. 주방에서 밥하는 소리가 식구들을 깨운다. “여보, 내 스타킹 어디 있어요?” “아빠∼! 교복 셔츠는 다렸어?”
식구들이 찾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남편이자 아빠인 명길현(42·가명)씨다. 아내와 딸아이가 식사를 하는 동안 부지런히 옷을 찾아놓고 책가방도 챙겨둔다. 지난 연말, 회사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능력 있는 아내를 보면 ‘내 덕’인 것 같아 흐뭇하다. 저녁 설거지까지 끝나는 오후 9시. 명씨는 부업인 건축설계 일을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 명씨처럼 전업주부로 활동 중인 남성이 크게 늘어나는 중이다. 19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남자 비경제활동 인구 가운데 활동 상태를 ‘가사’라 밝힌 이들이 15만6000명으로 2005년의 11만6000명에 비해 5년 만에 34.5% 급증했다.
반면 미취학 자녀를 돌보기 위해 구직활동을 하지 않는 여성은 줄었다. 자신의 활동 상태를 ‘육아’로 밝힌 여성은 지난해 146만9000명으로 2005년보다 1.9% 감소했다.
구직활동을 하는 대신 집안일을 하는 ‘남성 전업주부’가 빠르게 증가한 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고소득·전문직 여성이 늘면서 남성이 아내 대신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남성이 집안일을 하는 걸 금기처럼 여긴 고정관념이 급속하게 무너진 영향도 크다.
남성 전업주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미스터 주부 퀴즈왕’이 개봉한 2005년만 해도 낯설었던 이 직업은 이제 우리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게 됐다. 2년 전엔 한 TV 퀴즈 프로그램에서 남성 전업주부가 퀴즈영웅에 올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인터넷에도 ‘행복을 살림하는 남자’ ‘밥상 차리는 남자’와 같은 전업주부 커뮤니티가 여럿이다. ‘김전한의 살림하는 남편일기’에는 230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이다.
‘밥상 차리는 남자’를 운영 중인 오성근(46)씨는 13년차 베테랑 주부다. 공무원인 아내, 12세 딸과 함께 제주도에 살고 있는 그는 “살림이란 건 생명을 기르는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철학 없이 살림에 뛰어들면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숨기거나 움츠러드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안타까워했다. 오씨의 바람은 “사회에서 남성 전업주부를 독립적인 직업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시중 은행이 남성 전업주부에게 “남자를 주부로 볼 수 없다”며 카드 발급을 거절했다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를 받았다. 당시 인권위는 “배우자 역할이 바뀔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처사”라고 지적했다.